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기울어진 원형무대. 빨간 구두를 신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등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아주 평범한 마을에 사는 아주아주 평범한 소녀 이야기….”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한 국립창극단의 창극 <소녀가>는 프랑스 구전동화 <빨간 망토>를 모티브로 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이야기, 소녀와는 좀 다르다. 늑대에게 잡아먹혀 사냥꾼에게 도움을 받는 연약한 소녀가 아니다. <소녀가> 속 소녀는 호기심이 넘치며 욕망에 충실하고 독립적이다.
10살이 된 소녀는 마을의 다른 소녀들이 그렇듯 ‘찰캉찰캉’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철로 만든 신발을 신게 된다. 이제 더는 담이나 나무에 올라가 놀 수 없다. 마을 뒤편에 있는 숲도 궁금하지만 갈 수 없다. “숲에 뭐가 있냐”는 소녀의 질문에 엄마는 말한다. “숲은 지나는 사람에게 각자 다른 것을 보여줘. 철 드레스와 철 신발이 벗겨지면 갈 수 있어.”
각고의 노력 끝에 철로 만든 드레스와 신발에서 벗어난 소녀는 빨간 망토를 입고 숲으로 심부름을 간다. 그때 어깨가 넓고 어딘가 숲의 냄새를 풍기는 늑대를 만난다. 할머니 집에 간다는 소녀의 말에 늑대는 먼저 가 기다린다. 꽃밭을 지나 자유를 만끽하며 할머니 집에 도착한 소녀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이가 할머니가 아니라 늑대임을 알지만 한껏 조롱하고 놀린 뒤 숲을 빠져나간다. 할머니집 고양이가 ‘미야옹’ 거리며 말한다. “겁 없는 꼬맹이.”
창극 <소녀가>는 한 명의 배우와 세 명의 연주자가 무대에 오른다. “한 명의 이야기꾼이 등장하는 모노드라마 형식도 창극의 일부로 포함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탐색해보는 것”이라는 국립창극단의 첫 시도다. 소리꾼 이자람이 연출·극본·작창·작곡·음악감독까지 1인 5역을 맡았다. 이자람은 “프랑스 작가 장 자크 프디다가 재창작한 <빨간 망토 혹은 양철 캔을 쓴 소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프디다는 소녀에게 ‘입혀진 옷’에 초점을 맞췄고, 옷 속에 감춰진 소녀의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했는데 이자람 역시 여기에 주목했다. “가보지 않은 길로 갈 거야. 재미있어 보이는 길로 갈 거야”라며 용기 있게 나아가고, “다 알고 있었다”며 늑대가 있는 할머니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발칙한 소녀의 호기심과 욕망이 건강한 것이란 메시지를 다양한 은유 속에 함축해 보여준다. 예컨대 철로 만든 드레스는 사회적 굴레와 규범, 숲은 소녀가 만날 새로운 세상, 꽃밭에서 발견한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꽃은 소녀의 여성성인 식이다.
독창적인 빨간 망토 소녀를 연기하는 배우는 국립창극단 소속 이소연이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서편제> <트로이의 여인들>에 출연했던 그는 소녀와 엄마, 할머니, 늑대, 고양이 등 다양한 역할의 연기와 노래를 홀로 하며 60분간 무대를 꽉 채운다. 이소연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고, 각종 무대음을 만드는 건 인디밴드 등에서 각자 활동하는 고경천(신시사이저), 이준형(고수/타악기), 김정민(베이스)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등 이들이 만들어내는 풍성한 음악이 더해져 한 편의 뮤지컬같은 창극이 완성됐다. 4일까지. 문의 (02) 2280-4114.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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