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이래야 한다.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한 연극 <리차드 3세>를 보고 나오면 이런 생각부터 든다. 바로 극중 리차드 3세를 연기하는 배우 황정민 때문이다. 영국 장미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희대의 악인 리차드 3세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에서 그는 공연시간 100분 내내 휘몰아친다.
먼저 배우의 기본인 연기력에서 관객을 압도한다. 그는 극의 70~80%에 해당하는 방대한 대사량을 혼자 소화하며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줄곧 등장하지만,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곡을 원작으로 하기 때문에 자칫 어설퍼 보일 수 있는 시적인 문어체 대사도 어색하지 않게 소화한다. 무엇보다 황정민의 리차드 3세가 다른 점은 연기뿐 아니라 영화처럼 캐릭터의 디테일을 세밀하게 살렸다는 점이다. 그는 100분 내내 허리를 깊게 굽히고 다리를 절고 손가락이 꺾인 상태로 연기한다. 왼쪽 다리를 저는 움직임이 각도와 방향 등을 세밀하게 계산한 느낌이다. 멀리서 보면 특수분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연 내내 꺾여 있는 손가락은 한번도 움직이지 않는데 작품 관계자는 “그가 직접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황정민은 개막 전 “정확한 딕션(발음)과 단어들의 장단음 구분 등 연극배우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잘해내서, 이제 시작하는 후배들이 대사와 딕션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황정민의 열정은 무대 준비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연극을 하게 되면 <리차드 3세>를 하고 싶었다”는 황정민은 지난해 초 제작사 대표와 함께 연극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이후 오롯이 이 작품에 열정을 쏟았다. 튀어나온 등을 표현한 특수분장은 연극 포스터 촬영 때 특수분장 전문가한테 의뢰해서 만들었다. 이전의 ‘리차드 3세’들도 등을 굽히고 연기했지만, 특수분장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처리한 적은 없다. 연극 내내 옷을 벗는 장면이 없는데도, 리얼리티를 위해 ‘사서 고생’을 선택한 것이다. 그와 함께 출연 중인 김여진은 “그냥 서서 연습해도 녹초가 되는데 황정민은 연습할 때도 몸을 구부리고 뒤트는 자세로 하더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원캐스트로 1주일 6일, 7회 공연 내내 혼자 무대에 서는데 정웅인이 권한 포도당으로 체력보충을 한단다.
황정민이 리차드 3세의 왕관을 쓴 덕분에 <리차드 3세>는 그동안 원작이 같은 작품들이 갖고 있던 한계를 깰 수 있었다. <리차드 3세>는 연극으로 몇번 만들어졌지만 작품 자체가 어려워 대중성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한 연극배우는 “희곡이 원작인 작품은 배우의 연기의욕을 부추기지만, 일반 관객들이 쉽게 보러 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단점을 깨부수려고 <리차드 3세>는 극을 쉽게 풀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원문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을 과감하게 쳐내고 압축요약을 시도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황정민이 일종의 화자 역할도 한다. 혼잣말 대사에서 현재 상황을 설명해주고 “그래서 나는 권력을 잡기로 결심했다”는 식으로 말하며 다음 장면을 이어가는 식이다. 원작의 대사를 최대한 살리면서 “마치 고구마 100개 먹은 것처럼 답답하구나”처럼 일부 대사는 현대어로 바꿔 해학미를 심어넣기도 했다. 황정민에게 빠진 정신을 잠시 꺼내두고 작품을 뜯어보면 ‘<리차드 3세>가 이렇게 쉬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성이 가벼운데, 황정민의 연기가 빈 곳을 채워주고 묵직함을 심어준다.
이전에 선보였던 <리차드 3세>들과 달리 그는 과연 타고난 악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악인이었을까 곱씹게 만드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작품을 각색한 한아름 작가는 “<리차드 3세>는 악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권력을 향해 가는 다양한 군상들, 장애를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 등 현대에 곱씹어봐야 할 내용도 많다”고 말했다. 황정민이라는 배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절절한 눈빛과 진심 어린 대사 처리는 리차드 3세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고뇌를 드러내며 캐릭터를 풍성하게 만든다. 2007년 <웃음의 대학> 이후 10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른 황정민은 “관객들이 이제 영화 그만하고 연극만 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잘하고 싶다”고 했다. “연극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공연이 끝날 때까지 들을 것 같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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