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율’을 깬 공연이 찾아온다. 오는 23~24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리는 ‘한국음악 명인전’이다. 한자리에 모으기 쉽지 않은 10명의 국악 명인들이 참여하는 합동공연에서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대표하는 박현숙(65) 명인과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를 대표하는 김해숙(64) 명인이 함께 하나의 산조를 연주한다. 가야금 산조는 유파가 다르면 한 무대에 서지 않는데 기존에 없던 파격적인 시도다. 가야금 인생 50여년 만에 다른 유파와 산조를 연주한다는 두 명인을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연습실에서 만났다.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대표하는 박현숙 명인(왼쪽)과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를 대표하는 김해숙 명인이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 연습실에서 대화를 나누듯이 가야금을 타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빨간색이라고 똑같이 불러도 채도 차이가 있죠. 가야금 산조의 다양한 유파는 그렇게 다른 채도를 말하는 거예요. 같은 듯 다른 거죠.”
유파가 복잡하다는 질문에 김해숙 명인이 색깔 예시를 들었다. 산조는 한국 민속음악의 기악 독주곡 형태 중 하나다. 느리게 시작돼 빠른 악장으로 마치는 연주곡을 말하며, 거문고·아쟁 등 다른 악기도 각자의 산조가 있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80분 가까이 이어진다. 19세기 말 김창조(1856~1919)가 만든 가야금 산조는 초기 제자 한성기, 최옥삼, 안기옥 등에게 전수되었다. 스승의 음악은 제자들이 이어가면서 변주해 뿌리내렸다. 한성기의 음악은 김창조의 친손녀인 김죽파에게, 안기옥의 음악은 성금연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내려온 유파가 현재 김죽파류, 최옥삼류, 성금연류, 김병호류, 서공철류 등 10여개에 이른다.
“유파에 따라 독특한 연주 스타일이 있어요. 그래서 다른 유파와 섞이지 않고 홀로 독주회를 해왔죠. 하지만 독주로만 연주하는 게 산조의 발전이라고 볼 수 없기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자 우리가 기꺼이 만났어요. 듀엣으로 연주하면 서로 양보하며 화합도 하고, 자기주장도 하며 개성도 보여줘야겠죠.” 김 명인의 설명에 박현숙 명인이 거들었다. “기존에 한 유파의 산조만 듣던 것보다 더 박진감 있고 감동을 주는 무대가 될 거예요.”
그동안 유파들이 협연 무대를 펼치지 않은 건 서로 다른 연주 성격 때문이다. 특히나 김죽파류와 최옥삼류는 확연히 대비되는 색깔을 가졌다. 김죽파류가 여성적이고 섬세하다면, 최옥삼류는 남성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연주를 보여준다. 스승의 계보를 잇는 국악계에서 가야금 역시 유파를 일찌감치 선택해 배운다. 박 명인은 “예전엔 도제식이어서 한 스승 밑에 들어가면 평생을 따랐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여러 유파를 접해본 뒤 자신과 맞는 유파를 고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 명인은 현재 서원대학교 음악학과 교수로 있으며, 김 명인은 지난해까지 국립국악원 원장으로 재임하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각자의 유파를 이을 후배들을 가르치는 중인 두 명인은 유파의 계승 방법이 “모방과 창조”라고 말했다. “1960년대 중반엔 스승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게 유행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방식이 음악을 화석화시킨다는 반성 아래 교육 방식이 달라졌죠. 지금은 충실히 모방하며 자신의 것을 붙이라고 얘기해요. 단, 뿌리 없이 건너뛰지는 말라고 하죠.”(김해숙)
두 사람이 이번에 함께 연주할 가야금 산조는 연주시간이 15분짜리로 비교적 짧은 편이다. 최옥삼류가 다스름(본연주에 앞서 조율을 위해 연주하는 짧은 곡)을 시작하면 김죽파류가 느린 장단인 진양조로 애절하게 이어받는다. 서로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등의 장단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연주하게 된다. 한 사람이 받쳐주는 가락을 깔면 다른 사람이 그 위에서 놀기도 하고, 서로 다른 멜로디를 동시에 연주하는 대위적인 기법도 선보인다. 박 명인은 “듣는 데 2시간이 걸리는 두 개의 산조를 15분 사이에 한 곡에서 맛볼 수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모두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황병기 명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김죽파류이면서 황병기 명인의 산조를 배우던 8명의 제자 중 한명이기도 한 박 명인은 “황 선생님은 산조에 대해 평생 해도 끝을 알 수 없는 음악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김 명인도 “가야금이 낼 수 있는 온갖 기법을 개발해 창작곡을 만들어내신 분”이라며 황병기 명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반백년 함께해왔지만 가야금은 이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악기다. “가야금은 음색의 변화가 무궁무진해요. 현을 수직으로 들어 올리느냐, 비틀어 올리느냐 등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내죠. 명주실로 만들어진 현은 습도에 따라 장력이 달라져 날씨 영향도 받아요. 살갗으로 소리를 느끼는 손맛이 나는 악기예요.”(김해숙)
‘한국음악 명인전’에서 합동무대를 펼치는 우리 시대 10인의 명인. 왼쪽부터 유지숙, 김영기, 박현숙, 이재화, 최경만, 정화영, 이춘희, 양성옥, 김해숙, 김영길.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두 명인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명인은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인 정화영, 삼현육각 예능보유자 최경만,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이춘희, 거문고 산조 예능보유자 이재화, 태평무 전수조교 양성옥, 가곡 인간문화재 김영기,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악장 김영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이다. 평생을 걸쳐 우리 시대 전통예술의 지평을 넓혀온 명인들이다.
김영길 명인의 아쟁 솔로에 맞춰 양성옥 명무가가 추는 ‘비나리’ 독무는 국내에선 초연이다. 2015년 프랑스 국립극장에서 먼저 선보여 프랑스 관객들로부터 갈채를 받은 작품이다. 이춘희 명창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의 주제곡 ‘이별가’를 독창으로 부르고, 음역대가 넓어 자주 선보이지 못했던 ‘금강산 타령’을 다른 경기민요 이수자들과 함께 선보인다. 김 명인은 “예전에는 민속음악과 궁중음악을 하는 분들이 서로 만나지 않는 등 경계가 많았는데 이제는 국악의 대중화에 다 같이 노력하고 있다”며 “신구 세대가 함께하는 이번 공연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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