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구리’(심해 잠수부)가 갈고리로 건드리자 대왕문어는 온몸을 쫙 폈다. 문어가 뿜은 먹물이 연기처럼 바닷속에 흩어졌다. 문어는 머구리의 몸을 가릴 만큼 컸다. 주먹만 한 빨판이 무수히 달린 8개의 다리가 춤을 추듯 머구리의 몸을 휘감았다. 문어를 잡은 건지, 문어에게 잡힌 건지 모를 머구리가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지난 2일 개봉한 영화 <올드마린보이>는 가족을 위해 남한으로 온 탈북자인 심해 잠수부 박명호씨가 삶의 터전인 바닷속에서 문어와 벌이는 사투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원시 자연에서 자급자족 생존기를 보여주는 <에스비에스>(SBS)의 <정글의 법칙>도 화려한 수중생태를 보여준다. 뉴질랜드 북섬, 인도네시아 코모도섬, 마다가스카 공화국 등 다양한 국가의 오지에서 해산물을 채집하는 과정과 독특한 해양생물을 보는 재미가 있다. 때론 상어와 맞닥뜨리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마음을 졸이게도 한다. 영화와 방송 속 매력적인 수중영상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올드마린보이> 고태식(62) 촬영감독과 <정글의 법칙> 수중촬영을 담당하는 김성욱(38) 수작코리아 이사에게 들어봤다.
SBS <정글의 법칙-피지편>에서 가수 겸 배우 오종혁이 상어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SBS 제공
■ 수중촬영의 기본은 스쿠버다이빙 고태식 감독은 우리나라 ‘1세대 수중비디오 저널리스트’다. 1990년대 <출발 서울의 아침>(SBS), <환경스페셜>(KBS) 등의 방송에서 나온 바닷속 풍경은 거의 다 그가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성욱 이사는 수중촬영 경력이 10년 됐다. <정글의 법칙> <미운 우리 새끼>(SBS) 등 방송과 ‘갓세븐’ 뮤직비디오, 최근 이슈가 됐던 배우 이세창-정하나 부부의 수중웨딩촬영 등을 찍었다. 두 사람 모두 스쿠버다이빙을 오래 하다 카메라 기술을 익혀 수중촬영감독이 됐다.
수중촬영 때 카메라는 디에스엘아르(DSLR)를 주로 쓴다. 광고나 영화처럼 고화질이 필요할 땐 4K(해상도)가 지원되는 카메라를 사용한다. 카메라는 모두 방수커버인 하우징을 씌워 촬영한다. 카메라 장비들은 수천만원에서 억대에 달한다. 잠수복 같은 스쿠버 장비도 풀세트로 갖추면 천만원 가량 된다. 디에스엘아르와 달리 4K가 지원되는 카메라는 스태프가 더 붙어야 한다. 이 때문에 수중촬영은 장비구매비용이 곧 인건비가 된다. 김 이사는 “수중촬영 장비가 고가인 데다 일감이 고정적으로 많지 않아 실제로 활동하는 국내 수중촬영 감독은 10명 내외”라고 말했다.
■ 무조건 찍는다 바다는 수심이 깊어질수록 색온도가 낮아진다. 깊이 내려갈수록 색이 없어지는데 붉은색이 먼저 사라진다. 빛이 부족하니 조명이 닿지 않는 먼 거리는 색을 맞추기 위해 필터를 써야 한다. “연출감독의 의도에 따라 바다색은 파란색 또는 녹색으로 밸런스를 맞춰 찍을 수 있어요. <올드마린보이>는 캐논 5D Mark2로 찍었는데 물속에서 잘 흔들리기 때문에 스테빌라이저(자세안전장치)를 대고 찍었죠.”(고태식) “<정글의 법칙>은 관광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찍어요. 막상 물에 들어갔더니 물고기가 없거나 물이 혼탁해 아무것도 안 보여도 그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일단 찍죠.”(김성욱)
수중영상은 일반 촬영과 달리 촬영감독이 홀로 연출, 촬영, 조명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카메라 한 대가 출연자를 홀로 따라다니며 찍다 보니 원하는 영상을 잡기가 쉽지 않다. “머구리를 뒤에서 쫓다 문어를 만난 장면을 놓치면, 머구리가 문어를 마주한 장면을 찍기 위해 몇 날이고 다시 물속에 들어가야 해요.”(고태식) “상어를 촬영한다 치면, 영국 <비비시>(BBC) 다큐는 한 장면을 위해 1년씩 머물러요. 반면 우리는 약 보름간의 촬영 기간 동안 운 좋게 상어가 나타나 줘야 하고, 출연자를 걸고 상어를 찍기도 해야 하죠. 그래서 출연자들에게 (액션캠인) 고프로를 장착해 촬영분을 보충하기도 해요.”(김성욱)
SBS <정글의 법칙>에서 족장 김병만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팔라우의 수중 세계를 소개했다. SBS 제공
■ 열악해도 매력적인 수중촬영 “강원도 고성 최북단 어장에서 촬영하다 보니 추웠어요. 추우면 뇌 활동이 잘 안 돼 멍해져요.”(고태식) “웨트슈즈를 입고 장시간 촬영하다 보니 전신에 두드러기가 나는 만성 피부병이 있어요. 안전요원이 따로 있지만 가장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다 보니 출연자들의 안전을 챙기는 일도 하죠.”(김성욱)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카메라 장비까지 혼자 다 챙겨야 하는 수중촬영은 고되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크다. “대왕문어를 안고 머구리가 상승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장면이 아닌가 싶어요. 이 영화의 모든 수중영상중 백미가 아닐까 싶네요.”(고태식) “캐리비안 해안쪽 벨리즈라는 곳에 ‘블루홀’이라는 산호초 지대가 있어요. 고래상어, 매너티 등 희귀생물을 볼 수 있죠. <정글의 법칙>을 6년 넘게 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기억나네요.”(김성욱)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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