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55살의 가브리엘 샤넬. 샤넬 제공
두달 뒤면 37살이다. 많은 록스타가 죽어간 나이인 27살이 지난 뒤로는 딱히 나이를 세지 않았다. 보통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면 이런 ‘나이 타령’을 하기 마련이지만, 나한테는 스물일곱이 기준이었다. 그 나이만 무사히 넘기면 비로소 진정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거기서 벌써 10년이나 더 지났다니! 문득 다가올 시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함께 비혼의 삶을 이어나갈 것 같던 친구의 연애 소식이 들려왔다. 결혼도 고려 중이란다. 마음이 흔들린다. 이럴 땐 선배들의 인생을 뒤적여 볼밖에.
갑자기 디자이너 가브리엘 코코 샤넬을 떠올리게 된 건, 그의 말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여성 패션에 혁신을 가져온 샤넬. 그는 바닥에 질질 끌리던 드레스의 치맛단을 과감히 올리고, 여성의 재킷에 처음 주머니를 달았다. 허리를 조이지 않는 저지 소재의 드레스로 여성의 몸을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다. 여기까지는 그의 젊은 날을 그린 전기영화 <코코 샤넬>(2009년)을 통해 익히 알려진 내용. 영화는 샤넬의 첫사랑인 아서 카펠이 교통사고로 죽는 것을 클라이맥스로, 일에서 성공하는 샤넬의 모습을 그리며 끝이 난다. 공교롭게도 샤넬이 카펠을 잃은 1919년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인 36살이었다. ‘메종 샤넬’을 열게 도와준 장본인이며 결혼을 꿈꿨던 연인을 잃은 뒤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잘 알려졌듯이 샤넬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88살까지 살았다. 그의 일생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사랑과 일’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연인을 잃은 뒤 크게 상심했지만, 곧 장 콕토 등 당대의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1921년에서 1924년까지 그는 몇번의 연애를 했고, 때로는 한번에 여러명의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달리,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등과 염문을 뿌렸으며 그의 연인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 드미트리 대공, 영국의 대부호 웨스트민스터 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활화산’ 같은 여성이었던 샤넬은 연애를 통해서도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과의 영국 생활에 영감을 받아 트위드 천을 이용한 ‘잉글리시 룩’을 만들었고, 드미트리 대공 덕분에 알게 된 러시아 조향사를 만나 역사적인 향수 ‘샤넬 넘버 5’를 탄생시키게 된 것. 지칠 줄 모르고 ‘사랑’을 했지만, 그의 연애는 불운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들은 그의 곁에서 빨리 떠났다. 다시 한번 결혼을 결심하게 했던 연인 폴 이리브는 1935년 심장마비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녀는 당시 사교계에선 선망의 대상이었고, 많은 여성의 우상이었지만 정작 혼자 남겨진 밤에는 몽유병과 싸워야 했고, 잠들기 위해 모르핀 진정제를 맞아야 했다.
샤넬은 일요일을 싫어했다. 크리스마스나 신년 휴일도 싫어했다. 휴일엔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부친을 잃은 동료에게 “너무나 상심해 있는 날, 이제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없다고 생각될 때 언제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당신의 친구… 그건 바로 일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호텔방에서 홀로 숨을 거둔 날이 하필이면 일요일이었다. 가난한 카바레 가수 시절 얻게 된 ‘코코’라는 애칭을 싫어했지만, 평생 코코라고 불렸던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한다.
김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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