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배우 로봇연기 하네”라는 말이 씨가 됐다. 다만, 연기 못하는 배우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번엔 진짜로 ‘로봇’을 연기한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정보통신기술 융합 시대를 앞두고, 드라마에서도 ‘4차 산업혁명’이 꿈틀댄다.
■ 실장? 검사? 이제는 로봇 9월 시작한 <보그맘>(문화방송·MBC)을 필두로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로봇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잇따라 선보인다. <한국방송2>(KBS2)가 사전제작하는 <너도 인간이니>는 혼수상태에 빠진 재벌 3세 역할을 대신하는 로봇 남신3(서강준)이 주인공이다. 엄마가 아들과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들어 진짜 아들 행세를 시킨다. 하반기 방영 예정이었는데 파업 등으로 내년 상반기로 미뤄졌다. <문화방송>이 하반기 선보이는 <로봇이 아니야>는 로봇 개발자 백균(엄기준)이 금융회사 대주주 김민규(유승호)한테 투자받기 위해 헤어진 여자친구 얼굴을 본떠 만들었던 로봇 아지3(채수빈)이 망가지자 예전 여자친구 조지아(채수빈)한테 로봇 행세를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폐기 처분 직전 연구소에서 도망친 로봇이 인간 남자와 결혼하려고 노력하는 웹툰 <부적격 그녀>(2015년 6월 완결)도 드라마 제작사에 판권이 팔렸다. 방영 중인 <보그맘>은 로봇 개발자 최고봉(양동근)이 죽은 아내와 닮은 ‘보그맘’(박한별)을 만든 뒤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담았다.
서강준이 로봇으로 나오는 <너도 인간이니>(KBS2). 한국방송 제공
■ 인공지능시대 영향…사람 같은 모습으로 이질감 줄여 일본 드라마 <절대 그이>(2008), 미국 드라마 <미스터 로봇>(2015) 등 해외 대중매체에서 로봇은 흔한 소재이지만, 현실성을 강조하는 한국 드라마에서는 체감도가 떨어졌다. <너도 인간이니> 조정주 작가가 6년 전 인공지능 로봇 드라마를 기획했고, 한국로봇학회에서 작가단을 꾸려 로봇 소재 드라마를 구상한 적도 있지만, 실제 제작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드라마 작가는 “당시만 해도 비현실적이라는 반응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랬던 로봇이 드라마의 중심이 된 데는 시대의 변화가 첫째 이유다. <너도 인간이니> 이건준 책임피디는 “요즘은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달했고, 인간에 가까운 로봇이 나올 수 있다는 상상이 가능한 시대라는 점에서 개연성에 무리는 없다”고 했다.
‘사람과 다름없는 안드로이드 로봇’에 주목하며 혹시 모를 거부감도 줄였다. 1920년대 영화에 처음 등장한 로봇은 60~80년대 기계의 몸이지만 지능이 뛰어난 존재를 거쳐, 80년대 이후에는 정체성을 고민하는 등 시대에 따라 대중매체가 원하는 로봇의 형태는 달라졌다. <로봇이 아니야> 홍보대행사 쪽은 “20~30대 여성(70명)한테 ‘로봇 소재 흥미도’를 물었더니 절반이 고개를 갸웃했고, 그중 ‘로봇이 사람 역할을 대신한다는 게 무섭다’, ‘기계와 인간의 사랑이 공감되지 않는다’ 등의 반응이 많았다”며 “로봇에 감정을 불어넣어 사람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공감도를 높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로봇이 아들(<너도 인간이니>), 아내(<보그맘>), 여자친구(<로봇이 아니야>)처럼 가족이나 친근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임피디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드라마의 정서를 반영해 이질감을 줄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채수빈이 로봇이 되는 <로봇이 아니야>(MBC). 문화방송 제공
■ 철학적 고민, 앞선 발상이 성공 열쇠 로봇은 한해 100편 가까이 제작되는 ‘드라마 왕국’에서 소재를 넓혔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대기업 실장에서 재벌 2세, 초능력자까지 완벽한 주인공에 호감을 느끼는 시청자들의 요구가 로봇까지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이기원 드라마 작가는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를 위해 살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로봇은 종국에 폐기처분 되기에 이별을 내포하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신파를 좋아하는 한국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기에도 좋은 소재다. <너도 인간이니>는 혼수상태에 빠진 진짜 아들이 깨어나면서 감정을 가지기 시작한 남신3과의 슬픈 서사도 이어질 예정이다.
그러나 이런 로봇들이 그저 소망충족적인 판타지적 전유물로 여겨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먼저 공개된 <보그맘>이 미래적인 소재를 설정했으면서도 전형적인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그맘’은 남편한테 사랑받고 좋은 아내 역할을 위한 고민이 대부분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완벽한 존재가 타자의 주체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나에게 복종하는 존재로만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도 “로봇이라는 소재를 차용한 만큼 인간의 감정을 각성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관도 확장해 로봇의 주체성까지 생각할 수 있는 소재로 그려져야 성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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