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한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정용일 기자
‘홍라희 삼성미술관 관장은 일신상의 이유로 3월6일(월)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사퇴하기로 결정했음. -이상-’
단 한줄. 6일 오전 9시 각 언론사 미술담당 기자 앞으로 전자우편을 통해 발송된 삼성문화재단의 ‘홍 관장 사퇴 관련’ 보도자료는 이 내용이 전부였다. 재단 쪽 담당자도 “사퇴 배경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홍 관장은 세계적 명성을 지닌 삼성가 미술 컬렉션을 관리하는 수장이자 국내 미술계에서 지난 20여년간 가장 영향력이 지대한 컬렉터로 꼽혀왔다. 그의 사퇴 조짐은 지난달 17일 외아들인 삼성그룹의 총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등을 위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400억원대의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되면서 감지된 바 있다. 그는 아들이 구속수감된 뒤 “참담한 심정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는 뜻을 주위에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용 부회장은 현재 병석에 있는 부친 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어 2015년부터 컬렉션을 총괄하는 삼성문화재단과 삼성생명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홍 관장의 사퇴는 재단의 수장이 사실상 공석이 된 상황에서 관장으로서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겠느냐는 게 주된 관측이다. 실제로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 뒤 최지성 전 그룹 미래전략실장 등과 면회했지만 홍 관장 등 가족과도 만났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룹 안팎에서는 이 부회장이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두 재단 이사장직을 내려놓을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미술계 인사들도 대체로 이 부회장 구속 수감에 따른 정신적 압박을 사퇴 배경으로 꼽고 있다. 그와 친분이 있는 화랑가 관계자는 “홍 관장은 2014년 남편인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병석에 누운 뒤 거의 매일같이 수발하며 공식 활동을 극도로 피해왔다. 재단 수장인 아들까지 구속된 마당에 정상적인 업무가 힘들다고 보는 게 상식”이라고 말했다.
이와 달리 재계나 미술계 한편에서는 최근 최순실씨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아들과의 갈등설에 따른 구설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도 나온다. 최근 일부 언론에 보도된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의 특검 진술을 통해 불화설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박 전무가 최씨한테서 이 부회장이 그룹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으며, ‘홍라희씨가 이 부회장을 탐탁지 않아 한다. 딸 부진씨, 동생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함께 실권을 잡으려 한다’고 특검에 진술했다는 내용이지만, 재단 쪽과 미술시장 관계자들은 근거가 불확실한 추측일 뿐이라는 반응이다.
홍 관장은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으로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에 취임했다. 2008년 미술품 비자금 사건 여파로 관장직을 사임했다가 2011년 복귀한 바 있다.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대표적 인물’ 설문조사에서 10년 이상 1위에 오를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리움은 후임 확정 때까지 홍 관장의 동생인 홍라영 부관장 체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노형석 이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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