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윤병협씨가 자신의 ‘가족’으로 꼽은 만화 원고를 들고 ‘1인 가구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만화책, 노트북, 이어폰, 자동차… 이런 물건들이 한 사람의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지난 21일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인 가구 가족사진관 738’ 아트 팀 쁘레카(Bbreka)의 작업실에 1인 가구들이 모였다.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1인 가구인데 무슨 가족사진이냐고? 가족은 가족인데 이들이 데리고 온 가족은 하나같이 사람이 아니다. 혼술(혼자 술 마시기)·혼밥(혼자 밥 먹기)·혼행(혼자 여행하기)까지 다양한 싱글라이프를 즐기던 이들이 ‘혼자 가족사진 찍기’에 나선 것이다.
쁘레카는 지난 10일부터 1인 가구인 사람의 가족사진을 무료로 찍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1인 가구 가족사진’은 혼자 찍어도 되고 가족 같은 무언가와 같이 찍을 수도 있다. 반려 강아지, 고양이, 물고기, 난초, 인형, 누군가의 사진 또는 자신의 직업을 상징하는 물건 등이 모두 가능하지만, 사람은 안 된다. 1인 가구라는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조소과 출신 신재은·최진연 작가로 이루어진 아트팀 쁘레카는 늘어나는 1인 가구에 주목했다. 행정자치부 통계를 보면, 9월 말 기준 전체 2121만 세대 가운데 1인 세대의 비율은 34.8%로 무려 739만명에 달했다. 한국의 1인 가구가 사상 처음으로 2인 세대나 4인 세대보다 많아졌다.
만화가 윤병협씨가 ‘가족’으로 가지고 온 만화책 ‘마스터 키튼’ 전질.
컴퓨터 들고 온 사람부터 ‘허공’을 데려온 사람까지
혼자 살면 남이 찍어주는 사진이 귀하게 느껴진다. 여권사진, 증명사진, 영정사진이 아니고서는 1인 가구 세대주들이 번듯한 사진을 찍을 기회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목마름이 대개 비슷했던 것일까. 이날 쁘레카의 작업실 스튜디오를 찾은 다섯 명의 참가자들은 진지한 분위기로 자신의 ‘무생물 가족’과 사진을 찍었다.
유정완(41)씨는 노트북 컴퓨터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서 세계 병맥주 판매 전문점 ‘바틀원’ 을 운영 중이다. 그는 “애착이 가는 물건을 떠올리다가 최근 컴퓨터가 고장 나 불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컴퓨터가 없으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컴퓨터는 혼자 있는 시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나와 세계를 연결해 주는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진사로 나선 최진연 작가 역시 자신의 ‘가족’으로 꼽은 작업복을 입고 촬영을 진행했다.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하던 사람들은 “모델 같다” “사진발이 잘 받는다” 등 다른 참여자들의 칭찬에 점점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30대 직장인 박진희씨는 자신의 가족으로 이어폰을 꼽았다. 박씨는 “혼자 지내니 대화할 기회가 적다. ‘타인의 소리’가 그리워 자연히 음악을 많이 듣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이어폰을 늘 곁에 두게 됐다”고 말했다.
문화기획자 황윤중(32)씨는 가족으로 ‘허공’을 데리고 왔다. 혼자 지낸 지 10여년이 됐다는 그는 “여백 같은 시간에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혼자 있는 공간의 압박감”이라며 “곁에 두는 가족 같은 물건들이 많이 있지만 혼자 사는 삶의 무게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아무것도 안 가져왔다”고 말했다.
기타리스트 노병기씨가 자신의 가족으로 데리고 온 ‘스틸 기타’를 들고 ‘1인 가구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외로울 거라고? 혼자라도 괜찮아!
만화책을 가져온 만화가, 기타를 가져온 뮤지션도 있었다. 만화가 윤병협(37)씨는 제일 좋아하는 작가의 만화책 전질과 가장 애정이 가는 자신의 작품 원고를 가져와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번 촬영에 참여하며 옷부터 신발까지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을 어머니가 사준 것으로 챙겨 입고 왔다고 했다. 만화책 또한 5~6년 전 여자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그는 “이번 기회에 혼자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막상 무언가를 가지고 오려니 나 혼자만의 물건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살고 있지만 주변의 여러 요소가 ‘나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은빛 스틸기타를 가져온 기타리스트 노병기(48)씨는 9년째 혼자 살고 있다. 그는 1인 가구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이유에 대해 “흔히들 혼자 살면 외롭다고 하는데, 혼자 사나 같이 사나 느끼는 외로움은 같다. 혼자 살아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외롭거나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트 팀 ‘쁘레카’의 최진연 작가(왼쪽 앞)와 신재은 작가(오른쪽)가 1인 가구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기획자인 아트팀 ‘쁘레카’에게 특이한 참가자에 관해 물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반려묘와 누드를 찍고 싶다는 분도 있고, 세상을 떠난 반려견의 사진과 함께 찍고 싶다는 분도 있었다. 제일 특이한 것은 아무도 혼자 찍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촬영을 신청하고 실제 촬영일이 늦어지는 분들도 있는데, 대부분이 같이 찍을 물건을 고민하느라 그렇다. 아마도 물건이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라 전했다.
점·선·면이라는 기본 조형 요소를 주제로 사회현상을 해석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 이들은 ‘무생물 가족사진’을 기획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점’에 대한 해석을 고민하다가 1인 가구에 이르렀다. ‘점’을 연속적으로 찍어놓으면 그대로 ‘면’이 된다는 점에서 가족이 ‘면’이라면 1인 가구는 ‘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프로젝트는 12월 22일까지 진행된다. 지난 10일부터 보름간 40여명이 참여했다. 아직 30~40대가 대부분이다. 쁘레카는 “통계를 보니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연령대는 50대였다. 현재는 젊은 층 위주로 진행되고 있지만 좀 더 다양한 층을 담고 싶다”고 말했다.
인천시·인천문화재단·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으로 진행되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촬영된 사진은 추후 갤러리에서 전시될 예정이며, 참가자들은 당일 촬영한 사진들을 전자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다. 쁘레카 페이스북(http://ttps://www.facebook.com/thebbreka)과 이메일(
thebbreka@naver.com)로 참여 신청을 할 수 있다.
글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사진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