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제 인생의 ‘멘토’세요. 남에게 바라는 게 없으신, 현재의 삶에 충실하신 분이시죠. ‘남에게 정성을 다해라’ ‘내 중심 잡고 살면 그게 종교다’ 같은 말씀을 늘 하셨어요.”
이세은(45)씨는 출판계에서 10여년간 일한 콘텐츠 기획자다. 직업 특성상 그는 세심하고 꼼꼼하다. 한때 세심한 성격이 지나쳐 주위 지인들이 불편해할 정도로 예민했던 적도 있다. 그때마다 시어머니 허귀남(83) ‘여사’의 ‘인생 부적’과, 인생을 대하는 평범하지만 범상하지 않은 자세로부터 큰 힘과 평안을 얻었다.
특히 시어머니 허씨의 간장 맛은 비범하다. 강한 짠맛이 혀를 마비시키는 것 같다가 은은한 단맛이 툭 튀어나온다. “온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 간장을 가져다 먹어요. 누구에게나 장독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씨는 시어머니의 장과 그 장에 담긴 우리 시대 한 여성의 평범하지만 달콤짭짤한 삶을 주제로 지난 22일부터 서울 성북동 ‘갤러리 우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옥상 간장전’을 열고 있다.
며느리 이씨 갤러리 오픈 기념으로
‘상도동 허 여사의 옥상간장전’ 기획
시할머니 물려준 씨간장 ‘소문난 맛’
‘내 중심 잡고 살면 그게 종교다’ 등
“귀에 딱지 앉은 말씀” 병마다 포장
“중심잡아준 인생멘토 경험 나누고파”
지난 23일 서울 상도동에 위치한 허귀남 ‘여사’의 집을 찾았다. 정갈한 흰옷 차림의 허씨는 옥상으로 곧장 이끌었다. 10개가 넘는 아담한 독이 차곡차곡 책장의 책처럼 앉아 있다. 곁을 지키는 이씨는 “시어머니 간장은 씨간장”이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씨간장은 종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간장을 말한다. 허씨는 매년 새로 담근 간장에 지난해 남겨둔 간장을 섞는다. 남겨둔 간장이 이른바 ‘씨간장’이 되는 것이다. 허씨가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아 매년 섞기 시작한 씨간장은 이제 후대로 이어질 것이다.
올해로 50년 묵은 이 간장은 허씨의 모든 음식에 들어가 소박하고 은은한 맛을 낸다. 조리 과정은 평범하지만 비결은 있다. 허씨만의 물과 소금 섞는 배율이다. “간장은 묵을수록 좋아요. 이거 먹으면 속도 편합니다.” 허씨의 간장 철학이다. 이씨는 “삶에 대한 건강한 생각과 기운을 가진 이가 만든 간장은 다른 이들의 속도 편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말한다.
본래 경기도 안성이 고향인 허씨는 23살에 김준섭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199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허씨의 친정어머니는 제사가 많은 종가에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아 한사코 피했다. 허씨는 “그렇게 고르고 골랐는데 결국 종가를 책임지는 장남과 결혼했다”며 웃는다. 6남매를 낳아 대학 공부를 다 시킬 정도로 부부는 다복했다. “1년에 10번도 넘게 제사상을 차렸지만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운이 납디다. 돌아가신 분이 잡수시겠어요? 우리가 먹을 걸 만드는 거지요. 내 마음 착실하게 하고 정성스럽게 차렸어요.” 허씨가 웃으며 말한다. 이씨는 둘째 며느리다. 허씨의 며느리 자랑은 이씨의 시어머니 자랑에 못지않다. “며느리가 착해요.” 요즘 보기 드문 고부 사이다.
이씨는 시어머니의 간장뿐 아니라 “시집와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씀”을 라벨로 만들어 붙인 병간장을 전시 기간 동안 한정 판매하고 있다. “어머니표 ‘부적 간장’입니다.” 병마다 붙은 ‘부적’은 읽을수록 사람 마음을 다스리는 명약이다. ‘부지런히 먹어라’ ‘내 중심 잡고 살면 그게 종교다’ ‘서로 손 안 벌리고 사는 게 부조다’ ‘돈은 잘 써야 돈이다’ ‘형편껏, 정성껏 대접해라’ ‘명 길고 복 많으면 됐다’ 등등. ‘부적’ 디자인은 이씨의 지인인 권석연씨 작품이다.
“일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거릴 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고는 남들의 판단과 시선을 걷어내고 삶의 중심을 잡았다”는 이씨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들과 나누고 싶어서 ‘옥상 간장전’을 열었다고 한다.
이씨의 신혼 시절부터 내내 시어머니 간장을 맛보았다는 작가 김서령(오래된이야기연구소 대표)씨는 “지풍수화, 땅에서 온 콩과 바다에서 온 소금, 하늘에서 온 햇살이 주고받아 생긴 것이 간장”이라며 “상도동 햇볕 아래 팔순 넘도록 간장을 담근 허귀남 여사의 부엌 질서는 간단하게 볼 게 아니다”라고 평했다. 전시는 11월25일까지 갤러리 우물(서울 성북구 성북동 215-1 우무우물 2층)에서 열린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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