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정 장인이 만든 각종 대나무 제품들. 전통 방식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입혀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든다.
쌀쌀한 가을 저녁이었다. 50대 초반의 아버지가 툇마루에 홀로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먹먹하게 가슴 가득 느껴졌다. 평생 대나무를 만지며 살아온 일생이셨다.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을 받긴 했지만, 집안은 항상 가난했고,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내리 7명의 딸을 낳은 집안에 그는 둘째였다. 아버지가 때로는 원망스러웠다. 고교를 졸업하고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차마 대학 진학을 입에 올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시는 대나무 작업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19살이 됐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난 뒤 마음이 ‘확’ 바뀌었다. “문득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막상 하니까 너무 재미있었어요. 비록 힘이 들고, 돈벌이도 안 됐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중요무형문화재 53호 채상장(彩箱匠) 서신정(56·사진)씨는 아버지 서한규(85)씨를 이어 3년 전 인간문화재 반열에 올랐다. 죽세공예품 중에서 가장 정교한 손길이 필요한 것이 채상이다. 채상은 대나무 껍질을 가늘고 얇게 만든 대오리에 여러가지 색깔을 들여 가로세로로 엮어 상자를 만든, 죽세공예품의 정수다.
서신정 장인이 만든 각종 대나무 제품들. 전통 방식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입혀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든다.
‘채상장 2호’였던 아버지는 좋은 대나무가 생산돼 예로부터 갖가지 대나무 제품을 생산해온 전남 담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뒤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6살 때부터 죽세공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란 담양 벌뫼 마을의 100여가구 가운데 70여가구가 농사를 지으면서 대나무 제품을 만들었다. 삿갓과 부채 등 다양한 대나무 제품을 만들던 아버지가 특별히 채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집안에 있던 100년 넘은 대나무 상자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외할머니가 17살 때 시집을 오며 가져왔던 채상은 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모가 난 부분은 천이 해지고, 일부 바스러지긴 했지만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색과 형태가 변하지는 않았다.
서신정 장인이 만든 각종 대나무 제품들. 전통 방식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입혀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든다.
담양에서도 대나무 다루는 솜씨로는 손꼽히는 아버지였지만 그 채상을 복원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채상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마침내 공모전 수상으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아버지는 1987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스승 없이 자력으로 이룬 결과였다.
미대 가고 싶었던 칠공주집 둘째
원망했던 아버지 뒷모습에 ‘공감’
“문득 따라해본 대나무 엮기 재미”
담양 벌뫼마을 출신 부친 서한규
100년 넘은 대나무상자 홀로 복원
부녀 함께 수행하듯 1년에 5벌 완성
서신정 장인이 만든 각종 대나무 제품들. 전통 방식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입혀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든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서씨는 대나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달리 미적 감각이 뛰어난 그는 마흔이 넘어서부터는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채상은 궁중과 사대부의 여성들이 즐겨 사용하던 공예품입니다. 통풍이 잘되고 습기나 곰팡이가 생기지 않아 물건을 오래 담아 두어도 냄새가 배지 않아요. 처녀들이 시집갈 때 혼숫감을 담거나, 여인들의 옷, 보석 등을 담아 두는 용기로 쓰였죠.”
서씨는 아버지의 전통 기법은 그대로 재현하면서, 현대인들의 감각에 맞게 변형된 채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디자인을 고집하지 않고, 일상에서 채상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용도의 작품을 만든 것이다. 음식을 담는 피크닉 바구니와 도시락은 물론, 나무에 채상을 입혀 의자를 만들기도 했고, 소반에도 채상을 접목했다. 은은한 종소리가 나는 풍경과 분위기 넘치는 전등갓 등도 만들었다. 핸드백과 노리개도 만들고, 물에 취약한 대나무의 성질을 보완하기 위해 채상에 옻칠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화학염색을 했지만, 서씨는 대오리에 치자, 쪽, 잇꽃 등으로 천연염색을 해 더욱 부드럽고 환경친화적인 색감을 내기도 했다. 그는 채상에 새기는 전통 문양이 태극, 만자(卍字) 등 기하학적인 모양과 수(壽), 복(福) 등 10여종이었지만,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40여가지 문양을 더 개발했다.
“3개나 5개로 이뤄진 채상 한 벌을 만들자면 수만번의 손질이 가야 해요. 대나무를 종이처럼 가늘게 만드는 것도 어렵고, 염색한 대오리로 각종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그래서 하루 종일 앉아서 수행하는 마음과 정성으로 작업해요.”
서신정 장인이 만든 각종 대나무 제품들. 전통 방식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입혀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든다.
서씨가 아직도 대나무 작업을 하는 아버지와 함께 1년에 만드는 채상은 겨우 5벌 정도이다. 하지만 담양 죽녹원 근처에 자신의 공방과 전시장을 갖고 있는 서씨는 지금도 대나무 일을 배우던 처음처럼, 매일매일이 즐겁다고 한다. 작업을 기다리며 걸려 있는 화려한 색깔의 대오리들이 바람에 춤을 춘다.
담양/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채상장이란
얇게 저민 대오리 엮어 만든 상자
천연염료 물들여 다양한 무늬 연출
가공한 대오리를 가로세로로 엮는 섬세한 서신정씨의 손길.
채상장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대오리)을 염색해 기하학적 무늬로 엮어 상자를 만드는 장인이다.
옷이나 귀중품을 보관해 두는 채상은 3~5개가 한 합(合)으로, 겉상자와 속상자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얇고 가는 대오리로 짠 겉상자는 여리고 부드러워서 상하기 쉽기 때문에, 튼튼한 속상자를 덧대어 탄력과 강도를 유지했다.
좋은 채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은 대나무가 필수적이다. 그래야 겉대와 속대를 모두 쓸 수 있다. 주로 3~4년생 겨울 대나무를 쓴다. 그 시기에 나는 대나무는 수분이 적어 병균이 없고 단단하다. 채취한 대나무는 물에 불려 부드럽게 만든 뒤 서너 조각으로 쪼갠다. 쪼갠 대는 다시 겉대와 속대로 분리한 다음 0.5㎝ 정도로 쪼갠다. 쪼갠 대는 일일이 손으로 잡아 조름판에 통과시켜 두께를 얇고 고르게 만든다. 저민 대오리는 입으로 물어 겉껍질과 속껍질을 갈라낸다. 이 대오리를 천연염료를 사용해 염색한다. 물을 들이는 방법은 솥에 물과 천연염료를 섞어 끓인 다음, 대오리를 다발로 묶어 담갔다 뺀다.
염색을 하고 나면 1~5가닥씩 엇갈려가며 엮는다. 엮을 때 각종 문양을 새긴다. 모서리와 테두리에 바스러지지 않게 남색이나 검은색 등의 비단으로 감싸 완성한다.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만들어진 채상을 <목민심서>에서 “무늬와 촉감이 비단을 바른 듯 곱다”고 표현했다.
이길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