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고려청자 유행에 밀렸던 ‘질그릇’ 웰빙 바람 타고 되살아나다

등록 2015-06-16 20:52수정 2015-06-17 14:18

[장인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옹기장 정윤석씨
정윤석 옹기장은 진흙을 송판처럼 넓적하게 만든 뒤 이를 이어 붙여 옹기를 만든다. 기술과 힘이 필요하다. 그가 만든 칠량 봉화 옹기는 다른 지역의 옹기보다 배가 불뚝하다. 그래서 발효 기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정윤석 옹기장은 진흙을 송판처럼 넓적하게 만든 뒤 이를 이어 붙여 옹기를 만든다. 기술과 힘이 필요하다. 그가 만든 칠량 봉화 옹기는 다른 지역의 옹기보다 배가 불뚝하다. 그래서 발효 기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장독대는 정성의 상징이다. 어머니는 객지에 나간 자식의 건강과 성공을 비는 기도를 장독대에서 했다. 아이를 점지해달라는, 삼신할머니에게 드리는 치성의 무대 역시 장독대였다. 정성 들여 빚은 장과 술이 크고 작은 장독에 담겨 가족들의 삶과 함께했다. 집안끼리 원수가 되면 장독을 깨는 것으로 분노를 표시했다. 장독대가 깨지는 것을 집안이 망하는 징조로 여긴 탓이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술맛이 변하면 나라에 변고가 생긴다고 여겼다. 그런 장독대의 주인공은 옹기다. 자연과 신의 섭리와 도움이 옹기를 통해 인간에 전해졌다.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가 보편화되며 옹기는 한때 일상의 뒤편으로 사라질 뻔했으나 웰빙 바람이 불며 ‘숨쉬는 장독’으로 부활했다.

옹기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중요무형문화재 96호 옹기장인 정윤석(73·사진)의 ‘옹고집’ 덕분이 크다. 모두 옹기를 버리고 돌아설 때, 그만은 투박한 진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전남 강진의 칠량면 봉황리는 바닷가 마을이다. 700년 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옹기를 만들어 생활했다. 옹기를 굽기에 적당히 차진 진흙이 천지에 널려 있었고, 만들어진 옹기는 곧바로 마을 앞에 정박한 배로 실어 날랐다. 대대로 옹기를 구워 살았다. 마을 한가운데는 공동으로 쓰는 가마가 다섯개나 있었다. 고려청자가 탄생한 강진은 고려시대의 가마터 17곳이 발견된 곳이다.

강진 칠량면 외가·처가 모두 옹기장
1980년대 중반 청자 보물선 발굴 뒤
옹기 27가구에서 1가구 홀로 남아

중학도 못가고 무작정 상경 방황도
옹기 기술 배워 20대때 이미 ‘최고’
2000년대 ‘살아 숨쉬는 장독대’ 각광

정씨의 외가와 처가 모두 옹기를 굽던 옹기장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서 모두 27가구가 옹기를 구웠어요. 89년에는 한곳만 남았어요. 다들 청자를 굽거나 다른 일을 했어요.”

앞서 70년대 후반 정부는 서해안에서 청자 보물선이 발견되자 강진에 청자박물관을 세우며 청자 복원사업에 몰두했다. 너나없이 옹기에서 도자기로 바꿨다. 정치적 바람은 청자 복원지 공사 인부 노릇을 하다가 연줄을 대어 도예가로 변신한 사람이 나올 정도로 뜨거웠다. 수백년 이어온 전통의 특산품을 만드는 일은 천한 짓이 됐고, 천여년 전에 쓰다가 사라진 역사적 복제품을 만드는 것은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고귀한 예술작업’이 된 셈이다.

정씨의 부친은 옹기장이 아니라 옹기를 팔러 다니는 장사를 했다. 가난했던 탓에 그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쉬었다가 16살에야 졸업했다. 중학교 진학도 못했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홀로 서울에 올라왔다.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등포는 난장판이었다. 그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잡일을 하다가 두달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옹기장이 다른 일에 비해서 많은 품삯을 받는 것을 보고 옹기 제작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외숙부에게 기초부터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빨리 일을 배워 5년 만에 기술자가 되었다. “스무살 때 열 말 넘게 들어가는 큰독을 만들 줄 알았어요.”

정윤석 옹기장이 만든 각종 옹기들. 간장독, 된장독, 술독 등 옹기는 숨을 쉬는 신비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손가락으로 투박하게 새겨넣는 그림은 옹기의 허허로움을 채워줘 질박한 미감을 살려준다. 꽃, 동물, 산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정윤석 옹기장이 만든 각종 옹기들. 간장독, 된장독, 술독 등 옹기는 숨을 쉬는 신비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손가락으로 투박하게 새겨넣는 그림은 옹기의 허허로움을 채워줘 질박한 미감을 살려준다. 꽃, 동물, 산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하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빚만 늘었다. 옹기를 실어 나르는 선주만 좋은 일을 했다. 매출의 반을 선주가 가져가니 옹기장들은 힘들여 만들기만 한 셈이었다. 그래서 정씨는 직접 판매에 나섰다. 배를 빌려 자신이 만든 옹기를 싣고 남해의 섬을 돌아다니며 옹기를 팔고 다녔다. 중간 유통 마진을 없앤 것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엔 옹기를 안전하게 운송하는 데 배가 최적의 수단이었다. 그는 배를 빌려 부산, 마산 등 남해안 일대와 거제도, 제주도까지 가서 옹기를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사정은 나아졌다. 90년대가 되자 건강과 웰빙 바람을 타고 전통 된장·고추장·김치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늘어나며, 전통 옹기를 찾는 이도 늘어났다. 옹기가 ‘살아 숨쉬는 그릇’으로 새롭게 알려지며, 통기성 있는 그릇에 발효식품을 저장하고 숙성시키는 원리가 새삼 가치를 인정받게 된 덕분이었다.

정윤석 옹기장이 만든 각종 옹기들. 간장독, 된장독, 술독 등 옹기는 숨을 쉬는 신비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손가락으로 투박하게 새겨넣는 그림은 옹기의 허허로움을 채워줘 질박한 미감을 살려준다. 꽃, 동물, 산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정윤석 옹기장이 만든 각종 옹기들. 간장독, 된장독, 술독 등 옹기는 숨을 쉬는 신비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손가락으로 투박하게 새겨넣는 그림은 옹기의 허허로움을 채워줘 질박한 미감을 살려준다. 꽃, 동물, 산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그는 진흙을 넓적한 판처럼 만든 타래미(질판)를 쌓아 잇는 ‘쳇바퀴 타래미 기법’을 쓴다. 다른 지역의 옹기는 떡가래처럼 만든 진흙을 돌려 쌓아 만들지만 쳇바퀴 타래미 기법은 옹기를 더 쉽고 빠르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 “칠량 옹기는 가운데 부분이 유독 볼록하게 나온 것이 특징입니다. 튼튼하기 때문에 볼록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발효도 더 잘돼요.”

2008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한국관이 문을 열었을 때 그의 옹기 3점이 들어가 지금도 전시되고 있다.

강진/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옹기장이란

신라때 와기전 설치 기와·그릇 구워
조선시대 경공장에도 장인 100여명

장식용 도자기인 청자와 백자는 사기이고, 식기와 쌀독, 간장독 등 일상생활에 쓰인 그릇은 옹기였다. 옹기에는 잿물 유약을 발라 구운 오지그릇과 잿물을 바르지 않고 그냥 구운 질그릇이 있다.
장식용 도자기인 청자와 백자는 사기이고, 식기와 쌀독, 간장독 등 일상생활에 쓰인 그릇은 옹기였다. 옹기에는 잿물 유약을 발라 구운 오지그릇과 잿물을 바르지 않고 그냥 구운 질그릇이 있다.
장식용 도자기인 청자와 백자는 사기이고, 식기와 쌀독, 간장독 등 일상생활에 쓰인 그릇은 옹기였다. 옹기에는 잿물 유약을 발라 구운 오지그릇과 잿물을 바르지 않고 그냥 구운 질그릇이 있다.

청자는 1250℃ 이상, 백자는 1300℃ 이상 높은 온도에서 굽고, 옹기는 1100℃ 이하에서 굽는다. 높은 온도에서 구우면 더 단단해지지만, 대신 자기처럼 무겁고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신라시대에는 기와와 그릇을 굽는 일을 관장한 와기전을 두었고, 조선시대는 경공장에 옹기장이 100여명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밥을 담아 먹는 하얀 막사발과 함께 질그릇에 흑갈유의 잿물을 입힌 옹기가 생활용기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옹기를 굽는 가마의 땔감으로는 오랜 시간 제 온도를 유지해주는 소나무 장작을 쓴다. 광택을 내는 유약은 납 성분이 많은 유해한 유약이 아니라, 풀을 태운 재와 소나무를 태운 재에 약토를 갠 유약을 만들어 쓴다. 질 좋은 점토를 반죽해서 응달에서 약간 건조시킨 뒤 떡메로 쳐서 판자 모양의 타래미로 만든 다음 물레 위에 올려놓고 돌려가며 타림질(다듬는 일)을 한다. 손으로 빚은 항아리는 그늘에서 15일 동안 말린다. 이 생옹기들이 30% 정도 말랐을 때 유약(잿물)을 바르고 음지에서 20일 이상 건조시킨다. 그런 다음 가마에 넣고 4일간 불을 때 완성한다.

이길우 선임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