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금속활자장이 작은 칼로 밀랍에 새긴 활자를 다듬고 있다. 고려 때부터 이어온 밀랍 금속활자술은 밀랍에 글씨를 새겨 붙인 틀을 만든 뒤, 진흙으로 감싸 20일간 굳힌 다음 틀에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낸 빈자리에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든다.
금속활자는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보다 200여년 앞선다.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종이와 목판인쇄술을 가장 먼저 발명한 나라는 중국인데, 선진화된 기술인 금속활자는 어떻게 한민족이 먼저 발명했을까?
중요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임인호(51)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마도 고려시대에 목판활자가 널리 퍼졌으나 재활용할 수 없는 목재로 만들어 빨리 닳고 균에 약하고, 화재에 쉽게 타 개선이 필요했을 겁니다. 목재도 충분하지 않았구요. 그래서 나무가 아닌 금속에 눈을 돌렸을 겁니다. 필요가 발명을 부르게 되니까요.”
잠시 고려시대로 돌아가 보자. 고려는 개국 초부터 목판인쇄술이 성행했다. 불교와 유교 문화가 발전했으나 후반기에 묘청의 난과 무인의 난이 잇따라 일어나 궁궐이 불타며 전각에 가득 비치해 놓았던 귀중한 문서와 책들이 소실됐다. 13세기 초 무신 최충헌 일가가 정권을 잡으며 안정되긴 했으나 서적 간행은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다.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어 학문하는 수요도 상대적으로 소수였으나 여러 주제에 걸친 다양한 서적이 필요했다. 그래서 금속활자가 탄생했다. 예로부터 범종, 불상, 동전 등을 주조하는 기술을 축적했기에 금속활자 주조가 가능했다.
현존 세계 최고 인정받은 금속활자본
정작 금속활자 제조법 기록은 없어
“고려시대 너무 흔한 방법이었을 것”
실제론 기상천외한 ‘밀랍주조법’ 전래
고교 중퇴 뒤 무작정 상경 ‘서각’ 배워
1996년 금속활자장 오국진 선생 ‘사사’
그런데 금속활자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짚신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기록이 없어요. 너무 흔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아마도 고려시대에 밀랍으로 금속활자를 만드는 것은 아주 흔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임 장인이 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물사주조법을 선보이고 있다.
모래로 틀을 만들어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것(주물사주조)은 쉽게 이해가 가는데, 밀랍을 이용해 금속활자를 만드는 ‘기상천외’한 방법은 설명이 필요하다. 밀랍은 꿀에서 가공한 지 2~3년 지나 딱딱한 것을 준비한다. 밀랍 판형 위에 새길 글씨를 뒤집어 붙인다. 밀랍에 붙은 자본(어미자)을 조각칼로 한자 한자 새긴 뒤 낱개로 잘라낸다. 이런 날자본을 여러개 붙혀 틀을 만든 뒤 1차로 흙을 마른다. 진흙과 모래, 물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밀랍 활자틀을 감싼 뒤, 대나무통 안에 넣어 20일쯤 건조시킨다. 이 대나무통을 가마에 넣어 6시간 가열시키면 안에 있던 밀랍이 녹아 내린다. 이 공간에 섭씨 1100~1200도의 온도로 녹인 청동 쇳물을 주형에 붓는다. 쇳물을 부어 응고된 낱개의 활자를 책의 내용에 따라 조판틀에 맞추어 배열한다. 결국 밀랍이 녹아낸 자리에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세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밀랍이 마를 때 한번 축소하고, 쇠물이 식으며 다시 한번 미세한 축소 과정을 거친다. 주물로 뜬 활자의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내며 한차례 확장한다. 이렇게 두번 축소와 한번 확장의 과정을 감안해 처음부터 밀랍 활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활자체가 고르게 나올 수 있다. 고려시대 범종의 용머리 장식 등은 대부분 밀랍주조법을 썼다. 입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임씨는 어려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집안이 가난해 수업료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가세는 더욱 기울었고,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구두닦이와 미장 등 막노동을 했고, 목공과 용접일 등으로 돈을 벌었다. 스무살 때 우연히 나무에 글자를 파는 서각에 빠져들었다. 1987년 서각 장인인 고 신영창 선생으로부터 정식으로 서각을 배웠고, 92년 고향으로 내려와 ‘무설조각실’을 차려 본격적인 서각 작업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장기알을 기막히게 잘 만드셨어요. 장기알을 깎아 멋지게 글자를 새기시곤 했어요.”
목각만 하던 그가 금속활자에 눈을 뜬 건 96년이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금속활자장 오국진 선생의 이야기를 보고 무작정 찾아갔다. “뜨거운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선생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지요.” 그때부터 7년동안 글씨를 새기는 일부터 청동을 녹여 활자를 만드는 일, 활자를 맞춰 조판하고 인쇄하는 일까지 금속활자 주조에 관한 모든 기술을 배웠다.
그러면서 스승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복원에 힘을 쏟았다. 오 선생이 별세하자 그는 2009년 12월, 45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제2대 금속활자장이 됐다.
조선시대 첫 금속활자인 계미자·경자자·병진자·율곡전서자 등 30종과 동국정운자·인경목활자 등 목활자 8종을 되살렸고, 직지심체요절 상·하권 2만9천여자를 복원한 그는 지금 <월인천강지곡>의 금속활자본을 부활시키고 있다.
“활자는 정보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그릇을 정갈히 보존하는 일은 정보사회를 이끌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벌겋게 달아오른 쇳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청주/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금속활자장이란
13세기초 고려 때부터 금속활자 기록
조선 태종 때 주자소 설치 35종 제조
금속을 녹여 주형에 부어서 각종 크기의 활자를 만드는 기능 보유자이다. 통일신라 이전까지는 책을 직접 필사했으나 통일신라 말기부터 목판 인쇄 기술이 개발됐다. 고려시대에는 금속활자 인쇄가 시작됐다. 그러나 인쇄술에 관한 기록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떤 방법으로 금속활자가 만들어지고, 인쇄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 개경의 서적점에서 찍은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와, 국가전례서인 <상정예문>을 금속활자로 찍은 것으로 기록은 있으나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인 <불조직지심체요절>은 백운화상(1298~1374)이 여러 서적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들을 초록해, 상·하 2권으로 나누어 편찬한 것이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재료로는 구리·철·납 등의 금속류가 단독으로 쓰이거나, 이들의 합금이 사용됐다.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방법으로는 밀랍주조법과 주물사주조법이 있다. 금속활자가 크게 발달한 조선시대 들어와 1403년 태종이 처음으로 주자소를 설치했고, 조선시대 말까지 활자 계보에 든 금속활자는 35종에 이른다. 서양의 금속인쇄술은 성경을 대량으로 찍어낸 덕분에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의 기본이 된 반면, 우리 민족의 금속활자는 제한된 계층만이 그 혜택을 보았다.
이길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