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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발물레·망댕이가마·고집으로 9대째 잇는 ‘도공 유전자’

등록 2015-05-19 22:04수정 2015-05-20 16:47

경북 문경에서 ‘영남요’를 열고 있는 김정옥 사기장이 전통 방식의 발물레를 돌리며 그릇을 빚고 있다. 계속 발질을 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물레의 회전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섬세하게 빚을 수 있다.
경북 문경에서 ‘영남요’를 열고 있는 김정옥 사기장이 전통 방식의 발물레를 돌리며 그릇을 빚고 있다. 계속 발질을 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물레의 회전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섬세하게 빚을 수 있다.
[장인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사기장 김정옥씨
물레 위에 진흙덩이를 올린다. 양손에 물을 묻히고 진흙더미를 감싼다. 발물레다. 왼발로 물레의 아래 축을 안에서 바깥쪽으로 힘차게 찬다. 물레가 돈다. 엄지손가락으로 진흙덩이의 중심부를 누르자 그릇 형태가 나온다. 발질은 강약이 있다. 세게 차면 물레는 빨리 돌고, 약하게 차면 천천히 돈다. 숨이 거칠어진다. 남들은 전기물레를 쓴다. 스위치를 넣으면 물레가 돌아가 손작업만 하면 된다. 하지만 수많은 도공 가운데 유일하게 아직도 발물레를 쓴다. 굳이 힘이 드는 발물레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팔뚝 힘줄이 선명하게 각을 세운다.

조선 영조때 서당 집안 가난에 지쳐
“입에 풀칠이라도…” 도공의 길 선택
왕실자기·막사발·사기요강 쇠퇴불구
중학 그만두고 대물림 아들·손자대로

“전통방식이어야 가장 한국적 그릇”
삶 채우고 보듬는 소박한 사발 ‘일품’

김정옥 사기장이 만든 그릇들. 찻사발과 달항아리 등 그의 대표 작품은 소박하면서 고고한 한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어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도 상설 전시돼 있다.
김정옥 사기장이 만든 그릇들. 찻사발과 달항아리 등 그의 대표 작품은 소박하면서 고고한 한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어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도 상설 전시돼 있다.
발물레뿐 아니다. 그는 현대적인 가스가마 대신 전통적인 망댕이 가마를 쓴다. 가마는 마치 누에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길고 크다. 약 12도의 경사를 이루며 조금씩 커진 가마가 여섯개 붙어 있다. 각 칸의 연결 부위에 통풍 장치인 살창구멍이 나 있다. 적송 장작으로만 두 달에 한번씩 불을 지핀다. 놀랍게도, 굽기 위해 유약을 발라 가마에 넣는 100여개의 도기 가운데 작품으로 살아남는 것은 겨우 서너개. 전기가마는 최소한 80%는 살아남는다. 고집스럽다. 백산 김정옥(74·사진)이 도공으로는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沙器匠)인 이유는 이렇게 힘들고 고단한 전통 방식을 포기하지 않고 전통을 고수하기 때문일까?

그의 피에는 도공의 유전자가 진하다. 그가 7대째 도공이다.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도공의 길을 가고 있으니 무려 9대가 한 직업을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270년간 도자기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그의 8대조 할아버지(김영만)는 문경에서 서당 훈장을 했다. 가난했다. 수업료는 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나락 한 말이 전부였다. 그의 아들 김취정은 가난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도공은 비록 천한 직업이었지만 입에 풀칠하긴 훈장보다 훨씬 나았다. 5대 김운희는 조선 최고의 사기장들이 모이던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왕실 도자기를 빚었다. 대를 이어 그의 아버지(김교수)도 도공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는 하루에 800여개의 막사발을 빚어낸 명공이었다. 서구 문물이 들어오며 도공들이 만드는 물건들은 돈이 안 됐다. 사기요강을 만들어 팔았지만 일꾼 품삯을 주면 남는 것이 없었다. 빚만 늘어갔다. 그는 30리를 걸어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했다. 일꾼 품삯을 아끼기 위해 직접 도기를 빚기 시작했다. 산간벽촌인 가마터에 땔감과 흙 등 모든 재료를 지게로 지어 나르느라 어깨가 성한 날이 없었다.

김정옥 사기장이 만든 그릇들. 찻사발과 달항아리 등 그의 대표 작품은 소박하면서 고고한 한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어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도 상설 전시돼 있다.
김정옥 사기장이 만든 그릇들. 찻사발과 달항아리 등 그의 대표 작품은 소박하면서 고고한 한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어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도 상설 전시돼 있다.
“가장 한국적인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법부터 전통적이어야 합니다. 발물레와 망댕이 가마를 포기하면 안 돼요.” 그의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200년 된 발물레와 160년 된 망댕이 가마는 도 민속자료로 지정됐다. 망댕이 가마의 내부에는 미세한 공기구멍이 많은 데 비해 기계로 찍어낸 벽돌로 만든 가마에는 공기구멍이 거의 없어, 망댕이 가마는 같은 두께의 벽돌가마에 비해 갑절 이상의 단열효과가 있다. 게다가 가마 안에 끝이 뭉툭한 망댕이(장딴지 모양의 진흙)가 촘촘히 박혀 볼록거울처럼 열을 반사해 그릇을 구울 때 불을 때는 시간과 땔감을 절약할 수 있다. 망댕이 가마 안의 변화무쌍한 불꽃의 움직임과 온도는 독특한 색깔과 문양을 만들어냈다.

그가 만든 백자는 단조로우며 간결한 선, 부드러운 감촉과 적당한 빙렬(유약이 굳으며 생기는 표면의 갈라짐)로 자연스러운 특징이 있다. 그가 만든 찻사발은 말차를 즐겨 대접 같은 찻사발이 필요한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한다. 임진왜란 때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보가 된 찻사발(이도다완)은 원래 조선의 막사발이었다. 이름 그대로 막 쓰는 사발이었다. 밥이나 국그릇으로 쓰였고, 물이나 막걸리를 마실 때도 사용했다. 금이 가거나 일부가 깨져나간 것은 개밥그릇으로 쓰였다. 화려한 중국 자기와 지극히 인공적인 일본 자기에 비해 소박함과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조선 자기의 맥을 그가 이었다.

“시름에 젖은 이에겐 술사발로, 아픈 이에겐 약사발로, 마음을 닦는 이에겐 찻사발로, 나의 그릇은 그들의 삶을 채우고 보듬어주길 바랍니다.” 서민의 소박한 삶이 그의 투박하고도 소담스러운 그릇에 담겨 있다.

문경/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김정옥 사기장이 만든 그릇들. 찻사발과 달항아리 등 그의 대표 작품은 소박하면서 고고한 한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어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도 상설 전시돼 있다.
김정옥 사기장이 만든 그릇들. 찻사발과 달항아리 등 그의 대표 작품은 소박하면서 고고한 한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어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도 상설 전시돼 있다.

사기장이란

고려때부터 사옹원 두고 특별관리
사토·교통 발달한 ‘문경’ 산지 꼽혀

김정옥 사기장이 망댕이 가마 앞에서 막 완성한 찻사발을 살펴보고 있다.
김정옥 사기장이 망댕이 가마 앞에서 막 완성한 찻사발을 살펴보고 있다.
사기장은 백토를 혼합해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사기그릇을 구워내는 장인을 말한다. 하지만 사기뿐 아니라 도자기를 굽는 명장을 사기장이라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국가기관인 사옹원에서 청자를 빚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경기도에 사옹원 본원을 설치하여 특별히 제작했다. 사옹원은 임금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과 어용, 궁중용 그릇을 만드는 일을 관할했다. 조선 후기 들어 관요가 폐쇄되면서 도공들은 문경, 괴산, 단양 등 지방으로 흩어졌다.

자기 가운데 청색의 유약을 입힌 것을 청자, 백색의 유약을 입힌 것을 백자, 청자 위에 백토를 발라 다시 구운 것을 분청사기라고 했다. 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면서 서민적이고 자유롭게 자기가 만들어졌다. 망댕이 가마는 한민족 전통 가마다. 가마의 구조가 독특해서 1000℃ 이상의 고열에도 끄떡없고 불길의 흐름도 부드럽다. 내화성이 강한 진흙을 20~25㎝ 길이로 길쭉하게 빚어, 기마 안에 거꾸로 촘촘히 박아 반구형의 가마 칸을 만든다. 내벽은 진흙물로 매끈하게 바르고, 외벽에는 짚을 섞은 진흙을 두껍게 바른다. 외벽의 흙이 비바람에 씻겨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마 위에 초가지붕을 얹는다.

문경이 손꼽히는 도자기 생산지가 된 것은 원료가 되는 사토 광맥이 잘 발달해 있어 좋은 흙을 구하기가 쉽고, 백두대간의 첩첩산중에 둘러싸여 가마에서 태울 땔감을 얻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또 일찍부터 교통로가 발달해서 도자기를 운송하는 데 유리했고,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등짐장수들이 들고 나기도 편리했다.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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