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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땀 한땀 실·바늘로 생명 불어넣어 짓는 ‘일년에 단 두벌’

등록 2015-02-24 22:34수정 2015-02-25 17:22

한복 최고의 장인인 침선장 구혜자씨가 자신의 공방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 전시하기 위해 보낼 색동저고리를 바느질하고 있다.
한복 최고의 장인인 침선장 구혜자씨가 자신의 공방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 전시하기 위해 보낼 색동저고리를 바느질하고 있다.
[장인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침선장 구혜자씨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작은 바늘에 실이 꿰어진다. 밀랍이나 초를 살짝 칠한 무명실은 다리미로 다려 꼬임을 방지하고 매끄럽게 만든다. 한땀 한땀 정성을 들여 바늘과 실이 미세한 섬유의 공간을 지날 때마다 조각조각 재단한 천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옷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부드러운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면 바늘은 스스로 제 갈 길을 가곤 한다. 섬세한 모시에서부터 투박한 무명, 화려한 오방색 비단이 인간의 육체를 감싸는 단순한 생존의 옷에서 고품격의 예복으로 변신하는 데는 장인의 지혜와 노력이 덧붙여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바느질이지만, 그가 하면 다르다. 그는 단 한명의 침선장(針線匠)이다. 일년에 단 두벌의 한복이 그의 손을 거쳐 단아하고 정갈한 전통의 복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재봉질한 옷에선 결코 볼 수 없는, 장인의 손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우아하고도 깔끔한 곡선이 그가 만든 옷에는 살아난다. 인체의 모습을 따라 만든 양복과는 달리 한복은 입지 않은 상태에선 2차원적인 평면 형태다. 몸에 걸치고 움직이는 순간 한복은 감추었던 아름다운 선이 드러나며 몸의 곡선을 완성한다. 게다가 한복은 옷이 몸에 맞추는 엄청난 융통성을 지니고 있다. 크면 허리춤을 조이면 되고, 작으면 덜 조이면 된다. 그래서 한복은 인간적이고 입체적이다.

‘정인보 맏딸’ 시어머니 ‘1대 침선장’
후계나서 ‘10년간 바느질 시집살이’
2007년 문화재 인정에 “며느리 최고”

조교때 침선기법 정리한 ‘노트’ 펴내
팔만대장경 속 광해군 두루마기 ‘친견’
“비운의 기운 서린 바느질 재현하고파”

침선장 구혜자씨가 재현한 조선시대 의복. 왕비와 정4품 이상의 부인이 입었던 노의.
침선장 구혜자씨가 재현한 조선시대 의복. 왕비와 정4품 이상의 부인이 입었던 노의.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89호 침선장 구혜자(73)는 이번 겨울 가슴 뛰는 시간여행을 했다.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속에서 발견된 광해군의 두루마기를 만나러 간 것이다. 지난 1962년 절을 보수하면서 발견된 이 광해군의 옷고름 안쪽에는 육신의 안녕을 비는 ‘을해생조선국왕수만세’(乙亥生朝鮮國王壽萬歲)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자리가 불안했던 광해군은 자신을 폐위시키게 될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622년 겨울 일상복인 이 두루마기를 팔만대장경 사이에 끼워넣었다. 이런 불심 덕인지 광해군은 폐위되고도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지를 바꿔가며 18년간 더 생명을 유지했다.

“광해군의 옷을 보는 순간 숨이 멈춰졌어요. 비운의 주인공이 당시 입었던 옷의 느낌이 전해졌기 때문이죠. 그때의 바느질을 그대로 재현해 볼 작정입니다.”

평범한 전업주부이던 그가 침선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인연은 결혼이었다. 위당 정인보의 맏딸인 시어머니 정정완(2007년 작고)이 바로 1대 침선장이었다. 남편이 후계자의 길을 권했다. “네 뜻이 그러면 그리하라”고 시어머니는 간결하게 허락했다. 하지만 한복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위질부터 서툴렀다. 옷감이 귀한 시절이라서 혼쭐이 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한 달에 두세 번은 어르신들 옷을 빨아서 갈아입게 해드려야 했는데 그냥 세탁만 한 게 아니었다. 솔기를 모두 뜯어서 다시 풀을 먹이고, 새 옷을 짓듯 다시 바느질로 하나하나 꿰매어야 했다.

침선장 구혜자씨가 재현한 조선시대 의복. 조선 무인 신경유의 출토 복식.
침선장 구혜자씨가 재현한 조선시대 의복. 조선 무인 신경유의 출토 복식.
분가해 살던 며느리는 매일 아침 1시간 반 버스를 타고 시어머니를 뵙고 바느질을 배웠다. 많은 제자를 가르친 시어머니는 유난히 며느리에게 엄했다. 공들여 만든 한복을 보여드리니 “시궁창에 갖다 버려라”라고 꾸짖기도 했다. 어느 날 도포 10벌을 주문받은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일을 시켰다. 며칠 밤을 새워 도포를 완성해 보여드리니 시어머니는 “웬만큼 흉내는 냈구나”라며 처음으로 칭찬을 했다.

10년간 시어머니 곁에서 바느질 기법을 익힌 구씨는 1995년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받았다. 그때부터 시어머니의 바느질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따로 패턴을 뜨지 않았어요. 치수를 재어서 옷감에 표시한 뒤 곧바로 가위질을 하셨어요.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침선을 수치화, 체계화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한복만들기-구혜자의 침선노트> 시리즈를 책으로 펴낼 수 있었다.

침선장 구혜자씨가 재현한 조선시대 의복. 왕이 제사를 지낼 때 문무백관이 입은 예복인 금관조복.
침선장 구혜자씨가 재현한 조선시대 의복. 왕이 제사를 지낼 때 문무백관이 입은 예복인 금관조복.
2007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을 때 시어머니는 “구 선생이 알아서 다 하고 있으니 나는 괜찮아. 우리 맏며느리가 최고다”라며 흡족해했다. 몇 달 뒤 시어머니는 운명을 달리했다.

구씨가 가장 즐겨 만드는 의상은 남자의 포 종류다. 삼국시대부터 입기 시작한 행사용 의상이라 다양하고 아름답다. 색이나 모양을 자연의 동식물에서 본떠 온 것들이 많다. 요즘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 보내 전시할 색동저고리를 짓고 있다.

“침선장의 할 일은 옛것을 되살리고,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제는 돋보기를 쓴 채 바느질해야 하지만 구씨의 손가락을 휘감은 명주실은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팽팽히 긴장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침선장이란

왕실·양반가 의복 책임진 필수장인
디자이너·재단사·재봉사 ‘1인다역’

침선(針線)은 바늘과 실로 옷이나 장신구를 만드는 일이다. 옷은 삶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에 침선도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침선(針線)은 바늘과 실로 옷이나 장신구를 만드는 일이다. 옷은 삶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에 침선도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침선(針線)은 바늘과 실로 옷이나 장신구를 만드는 일이다. 옷은 삶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에 침선도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특히 여자면 누구나 침선을 할 줄 알아야 했다. 집안에서 바느질법을 배웠고, 궁중에도 침방이 있어 그 기법이 전승됐다.

의복을 정갈하게 입는 것에서부터 예(禮)가 시작된다고 여긴 한민족은 옷을 지을 때에도 시기를 봤다. 때를 가려서 옷 마르기 좋은 날과 피해야 하는 날을 정했다. 옷에 때가 묻거나, 일하던 도중에 도구나 재료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미리 준비했다.

왕실과 사대부들은 그들 스스로 옷을 만들지 않았기에 솜씨가 뛰어난 장인을 고용했다. 조선시대 경공장(京工匠)에는 10명의 침선장이 있었다. 옷을 만드는 일은 실을 만드는 제사장(制絲匠), 옷감을 짜는 직조장(織造匠), 옷감을 재단하는 재작장(裁作匠) 등의 협업으로 이뤄지나 가장 중요한 장인은 바느질을 직접 담당하는 침선장이다.

침선장들은 혼자 힘으로 디자이너, 재단사, 재봉사의 1인다역을 했다. 1900년대 재봉틀의 등장은 여성들이 바느질에서 해방되며 사회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지만 전통 침선기법의 맥이 끊기는 위협이 됐다.

침선에는 옷감, 바늘, 실, 실패, 골무, 가위, 자, 인두, 인두판 등이 사용되고, 옷감으로는 비단, 무명, 모시, 마 등이 쓰인다. 실은 무명실을 많이 사용했다. 바느질 방법으로는 홈질, 박음질, 감침질, 상침질, 휘감치기, 사뜨기, 공그르기 등이 있다.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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