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10명의 작가·감독·평론가·활동가가 추천하는 본격 문화 가이드
10명의 작가·감독·평론가·활동가가 추천하는 본격 문화 가이드
‘월화수목금금금’.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평가절하한 이도 있지만,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월화수목금토일’의 나날에 한 줄기 빛 같은 ‘수목금토일’ 연휴를 애타게 기다렸다. 설 연휴를 황금같이 아끼는 당신을 위해 마련한 문화 가이드. 바빠서 문화를 즐길 틈도, 세상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던 이들을 위해 조언할 10명을 모셨다. 작가와 감독과 평론가와 활동가가 연휴를 ‘내일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 문화 콘텐츠를 추천했다. 밀린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연휴를 보낼 당신을 위한 제안. 특별히 ‘타인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작품’이라는 부탁도 겸했다. 10명의 제안을 모아보니 성장·청춘·고향 같은 말로 추천하는 이유가 압축됐다.
과연 패배자의 이야기일까?
아, 모으고 보니, 추천자 가운데는 유난히 ‘없는’ 분이 많다.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학교를 자퇴한 경험이 있거나…. 멋대로인 세상의 기준으로 무언가 하나는 ‘없는’ 이들이 요즘 ‘없는’ 청춘을 위해 추천했다.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아니까. “취직했냐” “결혼해라”, 타박에 시달리며 명절을 견디는 당신을 위한 문화적 수단이 되기를.
소설만큼 음악을 ‘애정하는’ 김중혁 작가는 지난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라며 <인사이드 르윈>을 추천했다. 그는 “패배한 자들의 이야기 같지만, 패배가 어떤 관점에서는 패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는 영화”라며 “배우들이 노래도 굉장히 잘 부른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설에는 깊은 독서보다는 틈틈이 책 읽을 시간이 있을 것 같다”며 “여러 작가들의 인터뷰를 모은 <작가란 무엇인가>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작가별 인터뷰를 끊어 읽기 좋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들이 고루하고 진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인터뷰를 통해 유머 감각도 세상을 보는 시선도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작가들의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라고 추천의 이유를 말했다. 특히 커트 보네거트의 유쾌한 인터뷰를 강추 아이템으로 꼽았다.
사회학자이기도 한 심보선 시인은 오래된 시집과 올해의 영화를 권했다. 그가 일독을 권한 건 <정본 백석 시집> 중 ‘여우난골족’이다. 이 시는 명절을 맞아 큰집에 놀러간 이가 화자다. 심 시인은 “가난해도 풍요로웠던 시절을 생각나게 하고, 상실한 공동체적인 삶은 물론 정치까지 느껴진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그리워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올해 개봉했다 거대자본이 관리하는 극장에서 ‘철거’당한 <파티51>도 그의 추천작이다. <파티51>은 두리반 투쟁에 참여한 젊은 뮤지션,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그는 “각개전투하던 젊은 예술가들이 어떻게 서로를 만나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사람의 처지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며 “이들처럼 각개전투에 내몰린 대다수 청춘들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이 모이고, 놀고, 싸웠던 두리반은 재개발 건축사의 사과와 보상을 받았다. 그는 “낭만적으로 ‘우리가 이겼다’고 자축하는 영화가 아니”라며 “두리반 투쟁이 승리한 뒤에도 계속되는 예술가들의 쉽지 않은 삶, 예술과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뜨겁다”고 말했다. 이렇게 “빛과 그림자로 예술을 빚는” 다큐의 본질처럼 “음과 양을 모두 보여주는” 영화로 <파티51>을 권했다. 공동체 상영운동을 벌이는 <파티51>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청춘을 위한 제언은 끊이지 않았다. 출판평론가인 이다혜 <씨네21> 기자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권했다. 이다혜 기자가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한국에서 (청년) 세대론은 보통 386세대가 쓰는데, 이 책은 세대론의 대상이 되는 세대의 필자가 썼다. 저자는 ‘요즘 젊은이들’이라는 표현의 등장부터 따진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는가?’ 묻는 것이다. 그는 ‘한심하다, 나태하다’고 청년을 타자화하는 어른들을 기득권 세대로 비판한다. 거품경제 직전부터 현재까지 이런 논의가 어떻게 등장하고 변했는지도 짚는데, 현재의 한국 상황에 크게 참고가 된다.”
꿈꾸기를 응원하는 <빌리 엘리어트>
“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책은 지금 여기 ‘절망의 나라’에 사는 청춘을 위로한다. “진짜 문제는 어른들이 ‘요즘 것들이 어쩌고’ 하면 젊은이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지 않았고, 저들이 싸워서 만든 세상에 살고 있는데, 이런 지원을 받은 내가 무언가 이루지 못한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닐까, 자책하는 청춘들이 적잖다. 이 책은 청년 빈곤을 ‘구조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상심하거나 자책하지 말라고 어깨를 두드린다.” 역시 그가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귀성을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을 구분해 추천한 사람도 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는 귀성객에게 이문구 작가의 <관촌수필> 중 ‘공산토월’을 권했다. 그는 “역사적 격랑과 지독한 가난이 몰아치던 시기에 가족과 이웃을 위해 늠름하고 의연하게 자기 몫의 윤리를 다한 사람의 이야기”라며 “웃으며 읽기 시작해 울면서 끝난다”고 말했다. 여기에 “고향 풍경을 그리는 부분이 있어 더욱 귀성에 어울리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귀성 안 하는 이들을 위해선 2000년 개봉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추천했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탄광촌 소년의 성장기가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식이나 친척에게 ‘이래라저래라’ 막 하는데 결국은 제 삶의 길이 다 있다”며 “‘결혼해라’ ‘취직했냐’ 등 떠밀지 말고, 지켜보며 등 두드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영화사 ‘청년필름’ 대표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은 “설에는 ‘조선명탐정’이지” 하며 웃었다. 청년필름이 제작한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이 설 연휴에 개봉해서다. 그도 청년을 위한 영화로 <빌리 엘리어트>를 추천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이 ‘꿈을 꿀 수나 있나?’라는 생각마저 든다”며 “탄광노동자의 아들이 발레리노를 꿈꾸는 것처럼, 어려운 현실에서 용기를 내서 꿈꾸기를 바란다”고 추천 이유를 말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그에게 “저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다. 그는 “성장영화이지만 마거릿 대처 시대의 파업을 실감나게 담았다”고 말했다. “탄광촌에서 소외됐던 친구들이 꿈을 이룬 얘기이기도 하다. 영화의 끝에는 주인공의 발레 공연에 친구가 게이 애인을 데리고 온다. 한 명은 발레의 꿈을, 또 한 명은 사랑의 꿈을 이뤘다.” 이렇게 그는 퀴어영화로도 <빌리 엘리어트>를 추천했다.
명절에 만나는 친척이 때때로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이들도 있다. 명절이 힘든 청춘, 명절이 무서운 게이 등등등. 명절의 일부를 다른 삶을 이해하는 시간으로 쓰려는 당신을 위해 장애활동가들의 추천도 받았다. 노들장애인야학(노들야학) 교사로 오래 일한 홍은전씨는 2003년 개봉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추천했다. 그는 “주체적인 장애인 여성상”을 추천 이유로 꼽았다. 그는 장애에 대한 인식을 넓힐 책으로 김도현씨가 쓴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를 추천했다. “장애인운동의 입문서 같은 책으로 청소년이 읽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는 “장애운동 15년을 사람 이야기를 통해서 풀어낸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도 주옥같다”며 웃었다. 모두 노들야학과 관련된 책이기 때문이다.
다른 삶 이해하는 시간이 될 거예요
김상희 사회적 기업 ‘노란들판’ 노동자는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의 관계를 담은 영화 <유아 낫 유>를 추천했다. “영화에서 (장애여성인 주인공) 케이트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순간에도, 심지어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도 활동보조인 벡과 함께한다. 벡은 케이트의 삶에 빠져들고, 그녀가 보고 느끼는 것을 자신도 보고 느끼게 된다.” 장애인인 그가 <유아 낫 유>에 대해 쓴 글의 일부다. 노동을 매개로 만나는 둘의 관계가 가족보다 애인보다 가깝게 되는 상황을 깊이 있게 다뤘단 것이다. 그는 사고로 절단 장애를 당한 여성과 밑바닥 인생을 사는 비장애인 남성의 사랑을 그린 <러스트 앤 본>도 추천했다. “비장애인 남성과 장애여성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 확인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담겼다”는 것이다.
희망버스부터 굴뚝농성까지 다양한 현장예술을 기획한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는 정혜윤 기독교방송(CBS) PD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인터뷰해서 펴낸 책 <그의 슬픔과 기쁨>을 추천했다. 그는 “쌍용차 투쟁 과정을 담은 책도 있었지만, <그의 슬픔과 기쁨>은 쌍용차 사람들의 삶과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며 “부당함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대신해 이들이 용기를 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윤충렬 아저씨”를 기억하길 바란다. 윤씨는 해고자가 아닌데도 해고된 동료들을 외면하지 못해 해고의 길을 택했다. 그처럼 묵묵한 사람의 얼굴이 <그의 슬픔과 기쁨>에 새겨져 있다.
뮤지션 ‘시와’는 2013년 발표된 요조의 음반 <나의 쓸모>를 추천했다. 그는 “요조의 음반을 들으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게 된다”며 “지난해 리믹스된 싱글 <춤>의 ‘행복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너와 나’라는 가사가 자꾸 생각난다”고 말했다. 이걸 들으며 “‘어떤 상황일까’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음악은 ‘나도 이렇게 해볼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요조의 노래는 그냥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도 추천했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는 선한 사람, 반대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만 생각하는 인물을 동시에 보면서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의 쓸모>를 들어보세요
북적이는 친척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시간에 들을 음악을 추천한 사람도 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은둔의 가수 김두수의 음반 <곱사무>를 추천했다. 그는 “분주하고 들뜨기 쉬운 명절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차분하게 응시하고 경건하게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두수의 음악이 “삶의 본질, 생의 시작과 끝 같은 철학적 가치를 질문하고, 여기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 연휴를 즐기고 견디다보면 다시 맞서야 할 내일이 온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빌리엘리어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유아 낫 유
인사이드 르윈
“광부의 아들이 부자들이나 여성이나 하는 발레를 꿈꾸다니!” 이런 관습과 계급의 벽을 넘는 소년의 도전을 담은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꿈꾸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시대에 울림이 더욱 커졌다(위). 철거에 맞서 놀고 싸우고 예술한 이야기 〈파티51〉은 오늘을 꿈꾸는 청년의 빛과 그림자를 담았다. 한겨레
인사를 나누는 사이사이에 ‘단타’로 〈작가란 무엇인가〉를 작가별로 끊어 읽는다. 귀향을 하면서 〈관촌수필〉을 본다. 〈그의 슬픔과 기쁨〉을 통해 해고자의 삶에 다가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를 읽으며 장애운동 10년을 이해한다. 설을 보내는 하나의 방법이다. 한겨레
서정민갑 음악평론가는 “음악 형식과 내용에 공히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은 김두수씨의 음반 〈곱사무〉를 혼자 있는 시간에 들어보라”고 권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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