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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치켜 오른 꽃신의 코에 도도히 흐르는 ‘150년 갖바치 혈통’

등록 2015-01-27 19:44수정 2015-01-28 13:12

한민족 전통 신을 만드는 작업은 72번의 공정을 거칠만큼 정성을 들인다. 황해봉 화혜장이 멧돼지 목덜미 털을 바늘 삼아 꽃신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한민족 전통 신을 만드는 작업은 72번의 공정을 거칠만큼 정성을 들인다. 황해봉 화혜장이 멧돼지 목덜미 털을 바늘 삼아 꽃신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장인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116호 화혜장 황해봉씨
무려 6대에 걸쳐 가업이 이어지고 있다. 대를 이어 줄기차게 한민족 전통의 가죽신을 만들고 있다. 멧돼지 목덜미 털을 바늘로 삼아 곱게 쑨 쌀풀로 삼베와 모시를 붙여 만든 백피(배악비·백비)와 소가죽을 한땀 한땀 이어 붙인 가죽신을 만든 지가 150년을 넘었다. 그야말로 장인의 피가 ‘뚝뚝’ 흐르는 집안이다.

철종때 고조부부터 6대째 대물림
증조부·조부는 고종·순종 신발 전담
‘값바치’ 호시절 고무신에 밀려 퇴조

홍익전문대 공예과 다니다 입대
부친 별세로 조부로부터 가업 계승
외로운 작업 두 아들 전수 면목 세워

궁중 의례 때 정복 차림의 왕이 신는 적석과 왕후가 신는 청석
궁중 의례 때 정복 차림의 왕이 신는 적석과 왕후가 신는 청석
중요무형문화재 116호 화혜장 기능보유자인 황해봉(62·사진)의 고조부(황종수)는 조선 25대 철종(재위 1849~63) 때부터 궁궐에 가죽신을 납품하는 ‘갖바치’였다. 증조부(황의섭)와 조부(황한갑·최초 화장(靴匠) 기능보유자)도 고종과 순종의 신발을 전담했다. 당대 최고의 갖바치였다. 열여섯살에 궁중의 혜공(鞋工)이 된 조부는 고종의 적석(왕이 정복을 입을 때 신는 신)을 전담했고, 국상이 날 때마다 흰 가죽신인 백혜(白鞋)를 만드느라 밤을 새워야 했다. 부친 황등용 역시 가죽신을 만들었다. 가업을 이은 황해봉에 이어, 아들 덕성(35), 덕진(33)도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사대부들이 일상 평복 차림에 신었던 흑혜
사대부들이 일상 평복 차림에 신었던 흑혜
가죽신은 1920년대 고무신과 구두가 출현하기 전까지 양반들의 신발이었다. 아름답게 수를 놓은 꽃신은 한복을 입은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완성시켰고, 늠름한 자태의 사대부들은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신을 신고 권위를 과시했다. 특히 신코가 날렵하게 솟아 있고, 볼은 가름하고 길게 뻗은 꽃신은 여성스러운 부드러움과 매력의 절정을 장식했다. 꽃신의 수줍은 듯 날렵한 곡선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한옥 추녀마루의 도도함을 그대로 담고 있다.

“꽃신의 묘미는 곡선을 그리며 치켜 오른 신발코에 있어요. 신발은 코의 곡선을 따라 앞으로 걸을 때 벗겨지지 않고 나아가게 됩니다. 처음엔 왼쪽 오른쪽 구별이 없는 듯하지만, 조금 신다 보면 발 모양이 나서 제짝이 생겨나요. 그래서 우리의 전통 신은 신이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변하면서 사람에 맞추어 가는 게 특징이죠.”

가죽신은 제작 과정에 72번이나 손이 갈 만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우선 신울(발등을 감싸는 부분)을 구성하는 백피(白皮)는 봄과 가을에 만든다. 삼베와 모시를 쌀풀로 붙여 햇빛에 말렸다가 이슬 맞히기를 일주일간 해야 백피가 만들어진다. 신울을 이루는 가죽은 원래는 신나무와 백반으로 까맣게 물들인 노루가죽을 썼으나 점점 귀해지면서 소가죽으로 바뀌었다. 신울과 밑창을 맞바느질하여 연결할 때 중심이 틀어져 신코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나무로 된 신골을 박아 신의 형태를 잡아 주면서 완성한다.

발목이 긴 남자용으로 왕과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었던 목화
발목이 긴 남자용으로 왕과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었던 목화
조부 때까지만 해도 ‘갖바치’는 ‘값바치’로 불릴 만큼 잘나갔다. 신분제가 허물어지면서 양반의 전유물이던 꽃신에 대한 평민의 수요가 몰렸기 때문이다. 서울 혜화동엔 당시 갖바치 공방이 100군데나 몰려 성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무신과 구두가 들어오면서 가죽신은 급격히 사라졌다.

황씨는 서울시 인사동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신발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홍익전문대 공예과를 입학했던 그는 쉰살이 넘어 뒤늦게 할아버지를 도와 일을 배우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

“군을 제대한 직후였어요. 할아버지가 80대 노인이 됐는데 수계자가 없어 ‘나 아니면 한국에서 화혜장이 없어지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연로하시니 마음이 급했어요. 주무시는 걸 깨워서 계속 묻고 배웠어요. 그런 손자를 기특하게 여기셨죠.”

그는 할아버지가 만든 가죽신을 고급 호텔 토산품점에 납품하는 등 판로를 개척했다. 수요가 많지 않았던 70년대 초반에는 주로 박물관에 납품했다. 80년대 이후 복고풍이 불기 시작했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있었던 86년과 88년 즈음이 그나마 호황기였다.

십장생을 수놓은 여성용 꽃신
십장생을 수놓은 여성용 꽃신
그는 또 옛 문헌과 복식학자의 도움을 얻어 사라진 전통 신을 되살렸다. 칼을 사용해 가죽을 재단하는 솜씨와 변(발을 감싸는 부분), 도리(발을 감싼 부분의 가장자리), 칙휘(신의 뒤꿈치) 부분의 처리가 매우 정교하다. 영화 <스캔들> <황진이>에서 쓰인 조선시대 신발을 제작했고, 근래에 별세한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구평회 엘지(LG) 창업고문이 이승에서 신은 마지막 신발도 그의 솜씨였다. 재벌가 자녀의 혼례 때 쓰이는 전통 신발을 주문제작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제는 일년에 10여건 들어오던 주문도 거의 끊겼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항상 외롭고 고독했어요. 조그만 골방에 처박혀 혼자 가죽과 씨름했어요. 할아버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겠다는 의지였어요. 다행히 아들들이 대를 잇겠다고 나섰네요. 조상 볼 면목은 생긴 겁니다.”

곱게 수놓은 꽃신의 마무리 바느질 작업을 하는 손끝에 정성이 묻어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화혜장이란

장화는 ‘화장’ 목없는 신은 ‘혜장’
가죽·비단신 조선시대 양반 상징

신의 코를 만들거나 가죽을 부드럽게 만들 때 쓰는 갖가지 모양의 나무틀. 이 틀을 신발 안에 넣고 바느질로 잇거나 나무망치로 두들겨 모양을 완성한다.
신의 코를 만들거나 가죽을 부드럽게 만들 때 쓰는 갖가지 모양의 나무틀. 이 틀을 신발 안에 넣고 바느질로 잇거나 나무망치로 두들겨 모양을 완성한다.
한민족의 전통적인 신발은 짚, 마, 나무, 가죽, 비단 등을 재료로 만들었다. 높은 신분은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고, 일반 백성들은 나막신이나 짚신 등을 주로 신었다. 전통 신발을 만드는 장인인 화혜장(靴鞋匠)은 신의 목이 있는 장화 형태의 ‘화’를 제작하는 장인인 ‘화장’(靴匠)과 신목이 없는 고무신 형태의 ‘혜’를 제작하는 장인인 ‘혜장’(鞋匠)을 함께 부르는 명칭이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경국대전>을 보면 중앙관청에 화장은 16명, 혜장은 14명이 소속되어 있을 정도로 신의 수요가 많았다.

화혜장이 생긴 것은 고려시대 말기로 추정되고,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다. 고려시대에는 왕과 백관의 관복제도가 시행되면서 관복용 신의 착용이 제도화됐다. 조선시대 백관들은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에는 흑피혜(黑皮鞋)를 신고, 공복(公服)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화(黑皮靴)를 신도록 규정했다.

사대부 양반들이 주로 신은 태사혜는 앞코가 넓고 높은 것이 특징이고, 가죽으로 만든 신바닥에는 작은 쇠징을 160개 정도 박았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신은 신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운혜는 뒤꿈치에 구름무늬가 있는 비단을 사용했다.

화혜장들은 서울 혜화동 일대에서 모여 살았고, 신을 파는 혜전은 종로2가 보신각 주변에 몰려 있었다.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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