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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인두를 붓삼아 대나무 화폭 지지니 천년학이 훨~훨~

등록 2014-12-30 19:56수정 2015-01-19 16:42

대나무를 인두로 지져서 그림과 글을 새기는 낙죽은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작업을 한다. 인두의 온도와 누르는 힘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에 고도의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다. 김기찬 낙죽장이 전남 보성의 서재필기념관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대나무 필통에 그림을 새기고 있다.
대나무를 인두로 지져서 그림과 글을 새기는 낙죽은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작업을 한다. 인두의 온도와 누르는 힘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에 고도의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다. 김기찬 낙죽장이 전남 보성의 서재필기념관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대나무 필통에 그림을 새기고 있다.
[장인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낙죽장 김기찬씨
인두는 무서운 도구다. 죄인을 고문하기 위해 살갗을 지지는 데 쓰였고, 동물에 소유권을 표시를 하는 데 쓰였다. 붉게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열에 달아오른 인두는 그래서 잔인함과 고통의 상징이었다.

그런 인두가 대나무와 만나면 예술로 승화된다. 천천히 타오르는 조그만 화로에 앙증맞게 생긴 기역자 모양의 인두가 놓인다. 인두의 끝은 앵무새 주둥이처럼 뾰족하다. 화로의 숯불은 결코 활활 타오르지 않는다. 인두의 끝을 살갑게 달굴 정도다.

중요무형문화재 31호 낙죽장(烙竹匠) 김기찬(59)은 인두를 들어 자신의 볼에 살짝 접근시킨다. 인두의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인두의 열도에 따라 대나무에 새겨지는 그림의 짙고 옅음이 결정된다.

20대 초반 순천 송광사 여행길에 정착
여관집 딸과 결혼해 서예·산수화 섭렵
담양 낙죽장 이동연 선생 문하에 들어

대학에서 디자인·목공예도 3년간 공부
기능보유자 공방 열었으나 화재로 소멸
“욕심에서 해방…싫증 안나니 천직이네”

낙죽 작업을 할 때에는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는다. 두 발은 앞쪽에서 모아 왼발 바닥에 낙죽할 재료를 얹고 왼손으로 단단히 잡는다. 오른손으로는 인두를 들고, 대나무에 그림과 글씨를 지지는데, 이때 재료를 잡은 왼손은 인두의 움직임에 맞추어 적절히 이동시켜 주어야 한다. 인두의 열이 높을수록 빠르게 손을 놀려 선을 그리고, 열이 낮아지면 눕힌 채 힘을 주어 질감을 넣는다. 꽃을 놓을 때는 낮은 열을, 줄기를 놓을 때는 높은 열을 쓴다. 인두가 지나간 자리의 흔적은 검정과 다갈색, 밤색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과학적 실험이나 온도 측정 방법에 따른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오랜 숙련과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지혜에서 나온다.

인두 끝에 닿은 대나무 껍질이 검게 그을리며 타들어간다. 지져지는 것이다. 건조하고 무표정한 대나무 위에 천년을 산다는 학이 날아든다. 뾰족히 깎은 연필로 쓴 것보다 가늘게 불교 경전이 새겨진다. 구부러진 붓대엔 산수화가 새겨지고, 못생긴 맷돌엔 대나무로 만든 어처구니(맷손)가 접목된다. 어처구니에는 물론 인두로 예쁜 그림이 그려졌다.

시인이기도 한 김기찬은 내친김에 맷돌을 주제로 시를 쓴다. ‘어처구니 없는 둥근 돌 한짝 눈에 들어왔네/ 무정의 한 물건에 의식을 불어넣어/ 우주로 돌려 보네/ 얼럴럴 잘 돌아가네/ 어처구니 있으나 없으나 잘 돌아가네’

맷돌에 자신이 낙죽으로 장식한 어처구니를 붙이는 아이디어는 그만의 창작이다. 낙죽공예가 현대 생활에 스며들 수 있기 바라기 때문에 전통만을 고집하진 않는다. 안방 스탠드에 낙죽공예 들인 대나무를 세우기도 하고, 전통의 천 장식에 낙죽을 접목한다.

어처구니 손잡이를 단 맷돌
어처구니 손잡이를 단 맷돌
대나무 뿌리로 된 자루에 낙죽을 한 붓
대나무 뿌리로 된 자루에 낙죽을 한 붓
김기찬은 우연히 낙죽과 만났다. 경기도 광주가 고향인 선친은 농사를 지었는데, 짚으로 만드는 물건인 멍석, 둥구미, 걸망태 등과 싸리나무로 엮어 만드는 채반, 소쿠리, 삼태기 등 무엇이든지 모양이 좋고 튼튼하게 잘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하였으며 의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20대 초반 전남 순천의 송광사를 여행 갔다가 절 입구의 여관 겸 식당에 한 달을 머물렀다. 여관 주인은 자신의 딸과 결혼을 제의했다. 그래서 결혼하고 송광사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 그는 여러 공부에 매달렸다. 송담 이백순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순천의 상운 김영도 선생한테서 붓글씨를 배웠다. 광주 화실에서 국제 이종득 선생에게서 사군자와 산수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담양의 낙죽장 이동연 선생에게서 본격적으로 낙죽을 배우기 시작했다. 광양에서 전통 칼을 만들던 인간문화재 박용기 선생이 자신이 만든 장도의 칼자루에 새겨진 낙죽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김기찬에게 낙죽을 배워보라고 권유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때는 낙죽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는 배운 지 6개월 만에 낙죽장 국비 전수장학생이 되었다. 그의 공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붓자루에 새겨진 그림과 한시
붓자루에 새겨진 그림과 한시
참빗을 매단 장식물
참빗을 매단 장식물
1988년부터 전남도에서 실시한 공예인 지원 프로그램 덕분에 그는 광주대에서 김종식 교수에게서 디자인을 3년 정도 지도받았고, 동신대의 김병록 교수한테서도 목공예를 3년간 배웠다. 중요무형문화재 낙죽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2000년에 송광사 안에 전시관 금죽헌과 공방을 지었다.

하지만 2007년 전시관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20여년간 공들인 낙죽 제품이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6개월간은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상했지만, 어느 순간 마음의 화가 사라졌다. 자신을 속박했던 속세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흥이 난 김기찬은 자작시를 읊조린다.

‘몸 받아 스스로 선택한 일은/ 대나무에 무늬를 넣은 일이라/ 하고 또 해도 싫증이 안 나/ 천직이라 여기네.’

보성/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낙죽장이란

겨울 대나무 잘라 1년 넘게 말려
인두 달궈 새긴뒤 칼·끌로 마무리

낙죽을 할 때는 두 개의 인두를 불에 달구어 가며 번갈아 사용한다. 낙을 놓은 뒤 칼이나 끌 등으로 마무리해야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낙죽을 할 때는 두 개의 인두를 불에 달구어 가며 번갈아 사용한다. 낙을 놓은 뒤 칼이나 끌 등으로 마무리해야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낙죽(烙竹)은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공예다. 이때 사용되는 대나무는 2년생이 주로 쓰인다. 12월에서 2월 사이에 채취하는데, 여름 대나무는 광택이 적고 좀이 잘 생기기 때문이다. 곧게 뻗은 대나무 줄기뿐 아니라 구부러진 뿌리도 예술적 가치가 높아 애용된다. 채취한 대나무는 불에 굽거나 물에 삶아 진과 때를 없애고, 햇볕에 1년 이상 말려 사용한다.

낙죽을 할 때는 두 개의 인두를 불에 달구어 가며 번갈아 사용한다. 낙을 놓은 뒤 칼이나 끌 등으로 마무리해야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낙죽 제품은 생활용품으로는 참빗, 비녀, 담뱃대, 지팡이, 실패 등이, 문구류로는 필통, 붓이 있고, 합죽선이나 책장, 장도와 화살통 등 다양하게 쓰였다.

낙죽이 생활용품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고대 중국에서부터이나, 한반도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명확히 규명할 만한 문헌 기록이 없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상고>에 “조선 순조 말에 박창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낙화를 잘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을 뿐이다.

낙죽의 무늬는 매우 다양하다. 전통적으로 많이 새겨진 무늬는 소라문, 산수문, 매화와 국화 등 사군자문, 백수백복문(百壽百福文)과 만자문(卍字文), 십장생문, 박쥐문, 연화문 등이다. 특히 십장생문은 세속을 초월한 세계에서 불로장생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서민들의 소박한 염원을 담고 있어 낙죽 제품에 사랑을 받았다.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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