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작가 황석영은 국외를 떠돌다 93년 귀국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8년형을 받고 5년간 옥살이 끝에 98년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사진은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예총 등의 문인과 예술인들이 공주교도소 정문 앞에서 황 작가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용태 형이 기억하는 ‘황석영 방북기’
“민예총 만들고 얼마 안 된 1989년 어느 날이었을 거야. 황석영 형이 갑자기 사무실에 와서는 ‘나, 평양 가야 되겠다’ 그러더라고. 가시라고 그랬지. 나랑 제일 가까우니깐 의논하러 온 거야. 누구하고 연결됐나 하니깐 일본에 계시는 정경모 선생이라고 해. 총련 쪽은 아니고, 일찍이 군사독재 정권에 쫓겨나 통일운동 해온 지사이자 논객이지. 석영 형이 일본에 가서 만나고 왔다는 거야.”
고 김용태 선생은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구술 대담에서 당시 국내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큰 파문을 던졌던 ‘문익환 목사, 황석영 작가의 방북’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 그래 가지고 평양에 들어간 거야. ‘문목’보다 석영 형이 먼저 들어갔지. 그러다가 며칠 뒤 문목이 평양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발표되니깐 다들 완전히 뒤집어진 거야. 석영 형은 황해도 해주인가에 있다가 문목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바로 올라갔다고 해. 아무튼 그날 저녁 때 신학철 선배와 홍선웅이 우리 집에 놀러와서 같이 술 먹고 있는데 새벽에 안기부에서 쳐들어온 거야. 날 잡아갈라고.”
그렇게 그 악명 높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간 ‘용태 형’은 며칠 동안 고초를 겪어야 했다. “취조를 받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깐 나 혼자, 내가 보낸 걸로, 다 되어 있는데,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수사관에게 말했어, 사실대로. ‘가기 전부터, 집권 여당의 이종찬 사무총장도 알고 있었고 야당의 김상현 부총재도 같이 있었다.’ 그랬더니 안기부에서 난리가 난 거야. 이 총장은 애초 육사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간부를 지냈어. 자기네 선임의 이름이 등장하니깐 골치 아프게 된 거지. 3일간 잡아두더니 풀어줬어. 물론 이 총장과 김 부총재 다 조사를 받았어. 그래서 이 총장은 요즘도 나만 보면 ‘야, 용태 이××, 내가 대통령 될 뻔했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쳐버렸다’고 농을 치곤해.(ㅎㅎㅎ)”
그렇게 용태 형과 민예총은 무사했지만, 방북 파동의 주역들도 고초를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 2차례 회담을 통해 이른바 ‘4·2 선언’을 발표한 뒤 4월13일 김포공항으로 귀국하자마자 구속되었다. 또 고은 시인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재오(현 새누리당 의원)도 구속되는 등 공안정국이 덮쳤다. “만약 그때 문목이 곧바로 귀환하지 않았으면, 안기부에서도 잡아넣지 않고 싶었던 것도 같아. 노태우 정부에서도 북방정책을 시작하고 했으니깐. 그런데 아무튼 공안서슬이 퍼렇게 도니까, 석영 형은 그 뒤 4년 넘게 독일로 미국으로 떠돌아다녀야 했어. 그러다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니까 형한테 연락이 왔어. 난 지금 들어오면 구속이라고, 오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청와대 쪽과 얘기를 했나봐, 괜찮지 않겠느냐고. 결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잡혀가서 5년이나 옥살이를 했지.”
“평생토록 석영 형 때문에 세번이나 잡혀갔다”는 용태 형은 “나나 석영 형은 물론이고 누구든 잡혀가면 예술인들이 철야농성에 기자회견도 열어 지지를 해줬다”며 그 시절의 연대의식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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