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각 공예품은 목공과 칠, 그림, 장석 등 각종 공예기술이 동원된데다 화려한 색감으로 장식 효과도 뛰어나 왕실에서 쓰이는 최고급 생활용품으로 사랑을 받았다. 이재만 화석장이 귀중품 보관함으로 쓰이던 화형합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미래를 내다본 신(神)의 질투였을까? 그는 한살 때 양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 기어 다니다가 화롯불에 손을 디디는 바람에 대부분 손가락의 끝마디나 둘째 마디가 사라졌다. 성한 손가락은 오른손 엄지와 새끼손가락뿐. 어린 그에겐 정신적으로도 큰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가장 큰 단점을 최고의 장점으로 극복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손가락을 사용하는 공예, 그것도 쇠뿔을 얇게 종잇장처럼 갈아 투명하게 만든 뒷면에 그림을 그려 목재 가구에 붙여 치장하는 화각(華角)공예의 최고 장인이 된 것이다. 그가 만들어 내는 화각공예는 전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다. 한민족이 만든 독특한 공예품이다. 오방색의 화려함으로 봉황과 모란, 학과 구름, 동자와 복숭아, 신선, 거북, 연꽃 등을 주로 붉은색 바탕에 그려놓은 화각은 대부분 왕궁에서 쓰는 가구와 손거울, 실패 등 생활소품의 장식에 쓰였다. 궁중의 사용자가 숨지면 장사를 치를 때 함께 무덤에 묻는 바람에 전해 내려오는 유품도 거의 없다. 그러니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화각 공예품은 귀할 수밖에 없다.
이재만 명장의 손끝에서 나온 명품들. 화형합 세트.
중요무형문화재 109호인 화각장 이재만(62·사진)은 망가진 손가락으로도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초등학교 시절 전국미술실기대회에서 여러차례 입상했다. 그건 ‘유전의 법칙’이다. 그의 할아버지(이윤성)는 단청장이었고, 그가 세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이금달)는 대목장이었고, 어머니(정경희)는 자수를 빼어나게 놓았다.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우연히, 그리고 운명적으로 스승 음일천(1908~73년)을 만난다. 그가 고교 1학년 때였다. 음일천은 조선시대 고종 때부터 3대째 쇠뿔을 다듬는 각질장(角質匠)이자 거북 등딱지에 채색을 하는 대모공예 장인이었다. 그는 공정이 복잡한 화각 대신 셀룰로이드와 유리에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오면서 전멸하다시피 한 화각공예의 맥을 이어 1920년대 초부터 화각장 공예품 제작에 전념하고 있었다.
“신문 배달을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가 음일천 선생님 공방에 배달하러 갔다가, 음 선생님에게 ‘그림 잘 그리는 친구가 있는데, 이 그림을 보면 좋아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는 나를 공방으로 데리고 간 겁니다.”
이씨는 “노인네가 쪼그려 앉아 홀로 작업하는 모양이 너무 안타까워서 배우기보다는 도와주고 싶은 동정심에서 화각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화각공예는 모두 36단계의 공정이 있을 만큼 복잡하다. 쇠뿔을 삶고 펴고 자르는 일은 물론, 돌가루로 안료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목재 가구 짜는 일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배워서 혼자 다 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화각장의 길을 재촉했다. “10여년 동안 선생 집에 보내 수발을 들게 하면서, 집에 다니러 오면 하룻밤도 재우지 않고 다시 가라고 엄하게 대하셨어요.” 스승은 마음이 내키면 작업을 했고, 누가 작품을 달라고 하면 거저 주는 등 옛 시대 장인의 풍모를 지녔다. 가끔 인사동에서 자신의 작품이 팔릴 때면 약주를 걸치고 돌아오곤 했다. “성격이 강하고 불같이 무서운 분이셨지만 정도 깊고 가르치실 땐 매우 꼼꼼하게 지도해주셨어요.”
이재만은 스승이 숨지자 독립해 작업을 하게 됐다. 74년 공예대전 준비를 하던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미완성인 채로 출품을 했고, 어머니상을 치르고 난 뒤에야 입상 사실을 알았다.
당시 그에게는 단돈 30만원으로 얻은 방 한 칸이 전부였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화각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를 지켜준 것은 “내가 고수해온 것을 자네가 끝까지 지켜달라”는 스승의 유언이었다. 9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됐으나 종문(30)과 종인(26), 두 아들이 유일한 제자이다. 첫째는 목공 솜씨가, 둘째는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 그동안 10여명의 제자가 입문했으나 모두 도중에 포기했다. 그의 작품은 미국·중국·일본·러시아·독일 등지에서 수십차례 전시됐다. 특유의 화려한 문양과 독특한 재질이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빛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는 “국가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놓고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누가 이 힘든 길을 가려고 하겠어요?”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따르는 두 아들을 장인은 안쓰럽게 바라봤다.
인천/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쇠뿔 말린 각지에 그림 그려 장식…세계 하나뿐인 기능 맥 잇는 명장
화각장이란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공예품입니다.” 화각장 이재만은 화각공예를 이렇게 표현한다.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공예품입니다.”
화각장 이재만은 화각공예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 수긍이 간다. 우선 쇠뿔을 마련해야 한다. 화각에 쓰이는 쇠뿔은 생후 3년 된 수소 뿔이 제격이다. 사료가 아닌 풀을 먹고 자란 소라야 쇠뿔이 투명하다. 찾기 쉽지 않다. 쇠뿔을 8시간 끓이면 쇠뿔 안의 단백질이 쏙 빠진다. 속이 빈 쇠뿔을 20일 정도 그늘에 말린다. 쇠뿔 꼭지를 톱으로 잘라내고 숯불을 피우며 반듯하게 편다. 그리고 투명한 부분을 잘라낸다. 사료 먹인 소의 뿔은 검은색이 많다. 이것이 각지(角紙)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웬만한 머릿장 하나 장식하려면 400여장의 각지가 필요하니, 소 200마리가 동원되는 셈이다. 0.04㎜ 두께로 미색이 된 각지에 오방 염료로 그림을 그린다. 안쪽에 그려 붙여야 하기에 거꾸로 그려야 한다. 그리고 목재 가구나 소품에 부레풀을 가공한 접착제로 붙인다. 붙이기 위해서는 다리미까지 동원된다. 목재 가구의 각지가 붙지 않는 밑바닥이나 내부에는 옻칠을 하고, 경첩과 들쇠 등 금속 장식도 직접 붙인다. 마지막으로 각지의 표면을 갈아 더욱 투명하게 만든다. 회색 쇠뿔이 화려한 장신구로 재탄생해 구중궁궐 여주인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일반 서민들은 평생 구경하기도 어려운 최고급 공예품이다.
제작 도구로는 뿔과 뼈를 자르거나 켜는 데 사용하는 틀톱, 실톱과 갈기칼, 조각도, 가위, 평줄과 인두와 다리미, 압착기와 누름쇠판, 황새집게, 뿔방망이틀, 풍로와 석쇠 및 풍구, 작두 등 다양한 용구가 동원된다.
애초 중국 당나라 때 거북의 등딱지를 얇게 갈아서 그림을 그려 목공예품의 표면을 장식하던 대모복채(玳瑁伏彩) 장식 기술에서 시작돼 통일신라시대에 전래됐으나, 쇠뿔을 이용한 것은 우리나라 화각공예가 유일하다.
이길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