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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파주 강요배 작업실은 술과 노래, 토론 날뛰는 집회장이었다”

등록 2014-10-13 19:11수정 2014-10-14 15:34

1985년 11월22일 민미협 창립총회 몇 시간을 앞두고 ‘용태 형’은 이대 앞 순댓국집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손장섭 형’을 설득해 대표로 세웠다. 사진은 91년 10월 지리산 답사에 나선 민미협의 주역들. 왼쪽부터 김용태·홍선웅·손장섭·주재환.
1985년 11월22일 민미협 창립총회 몇 시간을 앞두고 ‘용태 형’은 이대 앞 순댓국집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손장섭 형’을 설득해 대표로 세웠다. 사진은 91년 10월 지리산 답사에 나선 민미협의 주역들. 왼쪽부터 김용태·홍선웅·손장섭·주재환.
30년 지기 이종률 민주화사업회 국장
“우주적 상상력이 넘나드는 구라
느닷없는 씨름판 얽히는 자리 좋아해”
“내가 ‘용태 형’을 처음 만난 건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창립 이듬해인 1986년, 인사동 사거리 경미빌딩의 민미협 사무실에서였다. 총무를 맡고 있던 홍선웅 형을 만나러 간 길이 아니었나 싶다. 낮술 마신 용태 형은 처음부터 곰살맞게 나를 대해 주었다. 그길로 인연을 맺어 30여년을 민미협-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백본)-민예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같이 일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이종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사업국장)은 이처럼 가장 오랜 세월 고 김용태 선생과 함께 일을 했던 만큼 갖가지 숨겨진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형이 하소!” 85년 11월22일 민미협 창립 당일. 용태 형은 이대 앞 순댓국집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몇 시간째 손장섭 선생을 “꼬셨다.” 자신이 사무국장을 맡아 ‘감옥행’을 포함해 모든 뒷일을 맡을 테니 손 선생더러 초대 대표 자리를 수락해 달라고 한 것이다. “완도 촌놈 출신으로 곤궁한 서울 생활을 거듭하다 겨우 <동아일보>에 자리잡은 손 선생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용태 형의 꼬임에 빠진 손 선생은 팔자에 없는 재야단체의 대표로서 도전과 응전이 교차하는 시대의 한복판으로 나섰다.”

86년 7월 민족화가이자 ‘절친’ 오윤이 돌연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구보다 마음 아파했던 사람이 용태 형이었다. “술병(간암) 치료를 위해 오윤 형의 진도 요양을 주선했던 집이 하필이면 ‘진도 홍주’를 빚는 집이라서 병을 악화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고 그랬다.”

“그것도 못하냐? 야이 새끼야 죽어!!” 젊은 시절 용태 형은 성질도 급하고 욕도 많이 했다. 큰일을 앞두고 후배들이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면 인정사정없이 몰아쳤다. “정희섭·정남준·이수남·양문규 그리고 나…. 민예총에서 일하던 시절 우리는 용태 형을 안주 삼아 부산식당이며 인사동, 낙원동 등지에서 술도 많이 마셨다. 형은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다 슬쩍 불러서 일의 길목과 방법을 얘기해주고 일이 잘 마무리되면 용돈도 챙겨주곤 했다.”

민예총 사무총장 시절인 90년대 초반, 용태 형은 파주 덕은리에 있던 강요배의 작업실에 자주 놀러왔다. “위채에 강요배와 김용덕, 아래채에는 나와 김기호가 있던 그 무렵 작업실은 술과 노래와 토론이 날뛰는 집회장이었고 지방 상경객들의 합숙소였고 신입회원들의 교육장이었다. 용태 형이 멸치 육수로 제법 맛을 낸 국수 몇 그릇과 김기호가 한 다라 무쳐낸 콩나물을 안주로 막걸리 수십 병을 비워도 끝날 줄 모르는 자리였다. 작업실 뒤편 햇살 좋은 무덤가에 둘러앉아 시국담과 만담, 우주적 상상력이 넘나드는 구라, 그러다 느닷없는 씨름판이 어우러진 그런 자리를 용태 형은 좋아했다.”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 용태 형이 <코리아 통일미술전>을 성사시켰을 때였다. “일본 도쿄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개막 행사 때 최계근 북쪽 대표와 함께 활짝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은 생전에 용태 형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정작 정남준 형과 함께 미술전 실무를 맡았던 나는 일본대사관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는 바람에 도쿄에 갈 수 없었다. 섭섭했던 내 마음을 알았던지 용태 형은 그 뒤 중국 노신(루쉰)미술대학, 중국미협 교류를 위한 선양(심양)~베이징 출장길 동행으로 기분을 풀어주었다.”

민예총을 그만둔 뒤 옥상에 빨래를 널며 실의에 빠져 살던 그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불러준 것도 용태 형이었다. “성유보·나병식·조성우·문국주 등과 어울려 정치인들과 접촉이 잦나 싶더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2002년부터 용태 형은 상임이사로 나는 기념사업과장으로 3년간 한솥밥을 먹었다. ‘송두율 교수 초청 사건’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6월항쟁 기념 공연을 기획하고 대규모 광장축제 ‘6월난장’도 함께 만들었다. 용태 형이 형수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갖다준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용태 형은 소원대로 지상에서 소주 만 병을 마시고, 68년 동안 세상 한판 멋지게 놀다 갔다. “그이는 본능적으로 시대정신을 체득한 사람이었다. 독재와 독점이 횡행하던 시대와 타협 없는 싸움을 이끌었으니까. 신학철 선생은 80년대 김용태를 일러 야전사령관이라 불렀다. … 용태 형은 조그맣고 얼굴이 약간 얽었다. 그 얼굴에 째진 눈으로 웃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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