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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불똥이 니 한겨레 만평작가 지원해라” “아, 그건 박재동이 적임잡니다”

등록 2014-10-06 18:50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으로 맺은 김용태 선생과 박재동 화백의 인연은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 창간 때 ‘한겨레 그림판’을 탄생시켰다. 사진은 지난 3월26일 ‘용태 형과 함께 가는 길’ 출판 기념 전시회 때로 왼쪽부터 박재동·김용태·김상철·이애주. 
 사진 화가 권용택 제공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으로 맺은 김용태 선생과 박재동 화백의 인연은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 창간 때 ‘한겨레 그림판’을 탄생시켰다. 사진은 지난 3월26일 ‘용태 형과 함께 가는 길’ 출판 기념 전시회 때로 왼쪽부터 박재동·김용태·김상철·이애주. 사진 화가 권용택 제공
삽화·만평 ‘출판미술’ 해 보라며
‘교사 박재동’ 끌어들인 민중미술
‘한겨레 그림판’ 작가로 등 떠밀어
1988년 5월15일 국민주신문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보태던 김용태 선생과 민중미술운동 진영에서는 시사만평 작가를 찾는 데도 앞장섰다.

“1988년 풋내기 화가가 겁없이 덜렁 결혼을 했으니 신접살림이 연일 곤궁이었다. 이내 아이까지 태어나자 그에 못 견뎌 ‘금성아트프로덕션’이란 곳에 출근을 했는데 전임자로 강요배·박세형·박재동 선배가 있었다. 한날, 사무실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불똥이냐? 내다. 용태다.’ 용건인즉 ‘곧 창간될 <한겨레신문>의 만평작가를 구하는 게 급하다. 공모를 했으나 네칸 만화의 김을호 외 당선작가가 없다’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이 형님 생각에는 불똥이 니가 그 일을 맡았으면 좋겠으니 서둘러 샘플을 몇 컷 그려 와 보라’는 하명이었다. 나는 단숨에 제언했다. ‘아, 그건 박재동이 적임잡니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 담긴 화가 박불똥의 증언이다. ‘용태 형’의 회고담은 맥이 조금 다르다.

“그때 박재동은 육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중경고 미술 교사였어. 근데 그때 주재환 선생이 출판미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어. 그야말로 현장미술이 중요한 거니깐. 출판미술이란 이름을 주 선생이 만들어내면서, 이거는 미술 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삽화·만평·포스터 이런 데까지 진출해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 그때 강요배도 창문여고 선생이었는데 나하고 주 선생이 ‘강’과 ‘박’에게 학교 관두고 출판미술로 뛰어들라고 권유했지. 근데 자기들 직장이 있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 고집부리더라고. 재동이는 결혼을 하려고 했거나 막 했을 때였어.”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안정된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나와 서울 광화문의 한 건물 옥탑방을 빌려 금성아트프로덕션을 차려 함께 일을 시작했다.

“옛날에는 선배들이 이야기하면 후배들이 따르곤 했어. 어떻게 보면 참, 좋은 직장 하나 내던지고 미술운동 한다는 마음으로 갔으니, (…) 옛날에 순수미술 하는 사람들이 삽화 그리는 사람을 우습게 알고 그랬다고. 그런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사회운동의 중추를 이루게 된 거지. 앞으로 그림 전시장에 누가 오겠어. 대중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애들도 즐겨 볼 수 있는 그런 전시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게 선명지명이야. 잘한 거지.”

그러다 ‘한겨레 만평작가’ 공모를 맞게 됐고 용태 형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유홍준 교수와 함께 박재동에게 해보라고 했더니 안 하겠다고 하는 거야. 만평작가로 처음엔 이력서를 넣지도 않은 거야. 내가 화를 막 냈지. 결국은 사표를 내고 한겨레신문사에 들어가더라고.”

그렇게 해서 국내 시시만화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의 그림판은 첫회부터 독자 대중을 열광시켜 연재 8개월 만인 89년 2월 단행본 <환상의 콤비>까지 펴냈다.

“그때 용태 형, (임)옥상이 형 등등 나한테 해보라고 등 떠민 선배들이 여럿이었지. 처음엔 싫다고 했는데 막상 한겨레 들어와서 그려보니 재밌는 거야. 나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지. 반응이 뜨거우니 절로 신바람이 나던 시절이었어.”

박재동(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박불똥의 ‘추천 비화’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동의했다. ‘금성아트’에서 같이 일하면서 그가 울산의 만화방집 아들로 자라 일찍이 중학생 시절에 만든 <내 가슴에도 봄은 왔읍니다>란 만화책까지 주위에 보여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태 형과 박재동의 인연은 82년 무렵 강요배의 추천으로 참여한 ‘현실과 발언’(현발)에서 시작한다. “초창기에 용태 형이 몇몇 그림쟁이들과 둥근 술상에 막걸리 먹으면서 한 말이 아직도 생각나. ‘시대가 이럴 때 예술가들이 뭔가 해야 돼!’ 지금은 민중미술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고 작가들도 당연히 시대의 정신을 구현하는 미술을 하지만 그때는 아주 특별한 일이었잖아. 그래서 그런지 난 형의 그 말이 아직도 생생해. 예술가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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