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서 ‘2002년 한일월드컵 성공적 개최를 위한 해맞이 축제’가 열린 2002년 1월1일 아침 해금강에서 민예총 대표단인 임옥상(왼쪽부터)·김정헌·김용태·홍선웅씨가 함께했다. ‘용태 형’의 손에 든 술은 춤 공연과 함께 단상에서 축제 선언을 위해 준비해 간 술이다. 사진 홍선웅씨 제공
90년대 예술 교류때 친화력 발휘
2002년 금강산 해맞이 축제 때는
찝차 내린 북쪽인사가 “형님” 인사
몇년뒤 TV보며 “그 친구 장관급 됐네”
2002년 금강산 해맞이 축제 때는
찝차 내린 북쪽인사가 “형님” 인사
몇년뒤 TV보며 “그 친구 장관급 됐네”
“두 점 깔아, 형.” “두 점이라니, 니가 깔아야지!” “어, 내가 아마 2단인데…형!”
‘현실과 발언’ 동인인 조각가 심정수씨가 ‘용태 형’과 맺은 인연은 ‘바둑 이야기’로 시작한다. “1980년대 중반 나는 그래도 20년가량 되는 기력이었지만, 용태는 만년 7급으로, 내게 여섯 점 깔고 배우는 처지였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의 바둑 실력은 일취월장을 거듭했다. 신경림 선생, 임재경 선생, 원동석 선생 등등과 호적수가 되어 그 실력이 나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그는 ‘민예총’ 중심으로 해마다 바둑대회를 열고 바둑을 통한 친목과 결의를 다졌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고 김용태 선생과 ‘바둑’은 ‘낮술’만큼이나 떼어놓을 수 없는 일상이었다. 그에게 바둑은 인간관계를 맺는 디딤돌이자 세상사를 풀어가는 축소판이었다. 특히 민예총을 꾸려내고 문화판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해낸 그의 안목과 끈기는 바둑판에서 수담을 나누며 쌓은 덕목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84년 무렵 인사동에 있던 원동석 선생의 미술자료실은 미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때 월간 <대학> 주간을 맡고 있던 용태 형은 반주로 낮술을 한잔하고 들러 바둑을 두던 단골손님이었다. 그런데 목포가 고향이면서 성격이 꼬장한 선비풍의 원 선생이 바둑을 두다 한 수 물리면서 “이런 썩을 놈” 하고 한마디 뱉으면 부산 사나이 용태 형은 “이놈아 저놈아 하지 마시오. 나도 낼모레면 사십이오” 하고 되씹듯 내뱉는데 반말도 아니고 경어도 아닌 말투 땜에 주위를 한바탕 웃게 만들고 했다.”
판화가 홍선웅은 “군부독재 시절 외로운 들판에서 저항의 깃발을 들고 맞서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다행히도 용태형은 좋아하는 바둑을 통해서나마 나름 위안을 찾을 수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93년 민예총 주도로 남과 북, 국외동포 미술인이 참여한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성사시킬 때 ‘바둑을 통한 용태형식 친화력’이 북쪽 문화예술인들에게도 통했다며 몇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2002년 ‘월드컵 성공적 개최를 위한 문화예술인 해맞이 축제’를 하기 위해 금강산에 갔을 때 용태 형과 둘이서 밤 산책을 하는데 ‘찝차’에서 내린 북쪽 인사 누군가가 ‘형님’ 하고 넙죽 인사를 했고, 용태형은 늘 그렇듯 ‘그래’ 하며 말을 내렸다. 앞서 94·95·98년 남북 예술교류를 위해 세 차례 북쪽 차관급 인사와 실무회담을 했던 용태 형이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남북 장관급 고위회담 장면이 나오자 용태 형은 ‘어! 금강산의 그 친구가 이제 장관급이 되었네’ 하며 혼잣말을 했다.”
언론인 임재경 선생은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서 70년대 후반부터 관철동과 인사동 일대에서 수담을 즐겨온 용태 형과 나이차를 뛰어넘은 인연을 “말 그대로 이웃사촌이었다”고 말한다. 90년대 초반 한겨레신문 부사장을 끝으로 신문제작 현업에서 물러난 뒤 낙원동에 마련한 그의 집필실이 민예총 사무실과 100m 안팎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민예총 사무총장실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바둑판이 있었다면 내 오피스텔에는 바둑판이 아예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 그의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승률이 아니라 포석을 포함한 전반적인 판짜기에서 보여주는 남다른 면이다. 비슷한 실력의 여느 바둑꾼들에서는 쉬이 보기 힘든 멋 혹은 풍미가 깃들어 있다. ‘모양이 중요하다’는 바둑의 격언대로, 화가 김용태의 바둑에는 조형미가 깃들어 있다.”
임 선생은 ‘이웃사촌을 잘 둔 덕분에’ 99년 도쿄에서 열린 ‘원코리아 바둑대회’에 참가해 입상까지 했던 뜻깊은 일화도 소개했다. 이 대회는 민단계와 총련계로 나뉘어 반목하며 좀처럼 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었던 재일동포사회가 원코리아 깃발 아래 마주 앉은 바둑 시합이었고, 민예총은 한국기원과 함께 남북한 문화교류 차원에서 참가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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