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2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 방목학술정보관 국제회의장에서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위하여’를 주제로 정년퇴임 기념강연을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정년 맞은 유홍준 명지대 교수
‘인문학 스타’ 만들어준 ‘답사기’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 다하려 집필
퇴임 뒤 석좌교수로 활동할 계획
문화재 부실복원에 대해서도 쓴소리
“개인 아닌 조직문제…지청 설치필요”
‘인문학 스타’ 만들어준 ‘답사기’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 다하려 집필
퇴임 뒤 석좌교수로 활동할 계획
문화재 부실복원에 대해서도 쓴소리
“개인 아닌 조직문제…지청 설치필요”
“정신적으로는 아직 뒤를 돌아다보고 싶지 않은데,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다 차서 ‘정년퇴임’이라고 하니 그 말이 주는 ‘형식의 긴장’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는 맘껏 얘기해도 좋다는 홀가분한 기분도 일어난다. 그래서 오늘은 잘못 말하면 자기 자랑과 미화가 될 수 있어 인터뷰 때마다 자제했던 나의 인생, 나의 학문, 나의 저술에 대해 말해볼 생각이 생겼다.”
지금까지 나온 9권의 누적 판매가 350만부를 넘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하 <답사기>) 등으로 ‘일세를 풍미했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인문학계의 스타’ 유홍준(64)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28일 정년퇴임 기념강연을 했다.
이날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 인문캠퍼스 300명 정원의 국제회의장은 백낙청 창비 편집인,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교수 등 지인들을 비롯해 그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각계 인사들, 동창, 제자, 답사회 골수회원, 독자들로 가득찼다. “돌이켜 보건대, 나의 인생, 나의 이미지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답사기>와 함께 가게 되었다. 내가 사회적으로 존재를 드러낸 것도 이 책 덕분이며 이 책 때문에 문화재청장을 맡았고 명지대 미술사학과를 창설할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이 오신 것도 이 책과 무관하지 않다.” 유 교수는 “어떻게 <답사기>를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며, 그때마다 살다 보니 우연히, 함께 월간 <사회평론>을 창간할 때 친구 안병욱 교수가 한 권유 등을 그 답으로 제시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겸양지사였다면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 바로 그 얘기를 하겠다”며 말했다.
“미술사학의 길로 들어서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면서, 전문가로서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일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일생엔 고난의 시절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오히려 그 사회적 실천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날 강연 제목이 바로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위하여’였다.
미학·예술학 전공 평론가·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던 그를 미술사 쪽으로 안내한 사람은 김윤수 교수였고, 역시 얼마전에 성균관대를 정년퇴임한 서중석 교수 등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친구들이 그를 “버려놓기 시작했다”고 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반대운동에 나선 것도 그 연장이었다. “현실이 망가져도 학문의 순수성만 내세우고 자기 전공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냐. 학문의 길을 지키면서 지식인으로서 행동하며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길은 없는가? 그때 나에게 답을 준 것이 <창작과비평>의 문학비평이었다. 백낙청, 염무웅, 구중서의 비평은 구체성을 띠고 있었다.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 분석 등 나중에 <전환시대의 논리>로 묶인 글들이 후련했다. 나도 그런 미술평론, 미술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창비와 <문학과지성>은 내 대학시절 가장 긴요한 텍스트였다. 창비에 연재된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내게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주었고, 평생 바라보는 나의 미술사 연구의 북극성이 되었다.”
그는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이란 목표의 “8부능선은 넘은 것 같다”고 했다. “<답사기> 두세권, <화인열전> 한두권, <순례기> 한권, <한국미술사 강의> 마지막 권(4권)을 쓴 뒤 한권짜리, 예컨대 <온 국민을 위한 한국미술사> 한 권을 쓰면 끝이다. 칠순 잔치 때 손을 터는 것이 목표다. 올해처럼 4권을 펴낸 속도라면 할 수 있을 것같다.”
유 교수는 삼선개헌 반대 시위로 무기정학을 당했고, 강제징집당해 35개월 만기제대한 뒤 1974년 복학하자마자 민청학련 관련 긴급조치 4호 위반 죄목으로 체포돼 징역10년을 언도받고 그 다음해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67학번인 그가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한 것은 1980년 10월. 다음해 홍익대 미술사학과에 들어가 1983년 석사학위와 함께 건국대 교수로 공채 임용통보를 받았으나 ‘전과’ 때문에 임용 하룻만에 취소통보를 받았다. “나는 정상적인 경로로 학문의 길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학 졸업까지 10년(정확히는 14년), ‘공간’ 등에서의 직장생활 10년(8년), 미술평론가로서의 백수생활 10년(8년), 영남대 교수 10년(11년), 명지대 교수 10년(11년), 그 사이 군복무 3년, 감옥생활 1년, 문화재청장 3년6개월 등 대학입학 이후 오늘까지 약 50년(48년)”으로 요약한 그의 평탄치 않았던 학문적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현실과 민족적 서정에 기반을 둔 진짜 우리의 현대미술이기를 바란” 민중미술에 뛰어든 것도 그 연장이엇고, <답사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문화유산 답사회’를 만든 것도 그 시기였다.“1980년대 민중미술의 미술사적 의의는 1930년대 중국 루쉰의 목판화운동, 멕시코의 벽화운동, 미국의 지방주의 미술과 같은 성격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중미술은 정치를 위한 도구로서의 미술이 아니고, 가난한 미술이거나 난폭한 미술도 아니며, 위대한 리얼리즘 미술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민중미술의 이념을 논리화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입버릇처럼 좋은 평론을 쓰는 것보다 작가의 작업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좋은 평론가로 남기를 바란다고 했다. 민중미술가들의 작업에 대한 비평적 증언이 더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믿었다.” ‘비평적 증언’이란 “작가가 어떤 생각에서 그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을 그릴 때 사회적 이슈는 무엇이었고, 조형적으로 어떤 고민을 했는가를 증언하면서 나의 비평적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다. “신학철의 <모내기>, 임옥상의 <아프리카 현대사>,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라는 그림을 1백년 뒤 보는 사람은 내가 증언한 것을 아주 유용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 중에 51살에 그린 <총석정>을 보고 먹의 사용이 능숙하다는 평은 지금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김경림이라는 부자가 부탁해서 그린 것이라는 증언은 아주 값진 사료가 된다. 평론은 대개 작품 분석과 조형적 평가에 집중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르포라이터처럼 증언을 많이 했고 이것은 세월이 지날수록 소중하게 여겨질 것으로 믿는다.”
<답사기>는 원래 “인생 계획에 없던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의 이미지는 거기에서 나온다. 보너스가 본봉보다 더 많은 것 같은 형상이다. 이것이 지금은 큰 부담으로 되고 있다. 마지막 권으로 다가올수록 이것을 유종의 미로 마무리하는 것이 나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출판의 역사 내지 지성사의 과제로 되었다는 사명감같은 것이 생긴다.” <답사기>의 성공배경을 얘기할 때 미술사에 국한하지 않은, 국사학, 건축학, 동양철학 등을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강의한 그의 문화사가로서의 면모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운명적으로 요즘 많이 찾는 통섭과 학제간 교류, ‘인문학으로서의 미술사’를 몸에 담고 살아가는 조건 속에 놓여 있었다.” 그가 <답사기>를 그저 기행문학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중국 고전학자 궈모루(곽말약)가 동정호를 바라보며 소상팔경과 악양루를 읊은 시인 묵객의 자취가 있기에 가슴 저미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며 ‘역사가 없는 동정호는 그저 똥물일 뿐이다’라고 했다는 구절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미술사가로서 그가 바라는 것은 “<한국미술사 강의>전4권과 이를 풀어쓴 한권짜리 <한국미술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어느 분야든 한 사람의 시각으로 통사를 쓴다는 것은 시도 자체가 몇 번 없는 일이다. 김원용, 안휘준의 <한국미술의 역사>(68년 초판, 93년 신판, 2003년 개정판) 이후 10년 내지 40년만에 내가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여기에 나의 힘이 실리지 않을 수 없다.”
미술사가로서 그가 꼽은 자신의 업적은 <완당 평전>과 <화인 열전>이다. 그리고 대중적 글쓰기의 대표작으로 꼽은 것은 <국보 순례>와 이번에 나온 <한국미술사 강의 3>과 동시출간된 <명작순례>다.
화인 열전의 능호관 이인상을 읽기 위해 친구인 퇴계학 연구자 이광호 연세대 교수한테서 배우기 시작한 한문 공부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고, 추사 김정희를 쓰기 위한 한국사상사 공부를 위해 안병주 교수가 가르치던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추사 사후 150년 동안 추사 전기가 나오지 못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추사는 대단히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동했다. 그런데 우리 학계가 추사라는 인간상의 총체적 인식보다 그의 일생을 세분화시켜 학자마다 시문학, 경학, 고증학, 정치적 입장, 예술, 차, 불교학 등을 따로 연구하다보니 추사의 삶을 아우르는 전기가 나올 수 없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유 교수는 스님이 되기 위해 머리 깎고 절집을 찾는 심정으로 진지한 자세를 가질 것, 새로운 자료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탐구하며 논문을 쓰는 훈련과 작업이라는 기본동작을 익힐 것, 명확한 현실의식과 문제의식을 지닐 것,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미술사적 과제를 가슴에 품을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미술사 연구를 장르사에서 시대사로 시각이동을 해 보라, 동아시아 미술사 전체 속에서 우리 미술사를 읽어라 , 전성기가 아닌 변혁기 미술의 도전과 저항의 미학에 주목하라, 한국미술사의 사각지대를 찾아 드러내라, 실제 작품을 보고 말하라, 등을 조언으로 덧붙였다.
그는 문화재청장 재직 때 독도에 조계종 암자를 세우고, 경주 황룡사를 레이저 홀로그램으로 복원하려 했는데 이루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독도의 실효지배를 확실히 해주는 것은 독도경비대보다 암자다. 독도에 암자를 지어 스님이 상주하게 하자는 안을 자관 당시 총무원장과 협의했고 승효상의 설계도까지 나와 있었다.”
숭례문 부실 복원으로 청장이 물러난 문화재청 문제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조직 차원의 문제라며 “국민소득 500달러 시대에 만든 문화재보호법을 2만달러 시대에 적용하려니 안 되는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숭례문 화재가 세상에 경고한 것은 문화재청 지청을 하루빨리 만들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국보와 보물들을 지자체가 아니라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해야 한다. 문화재 복원도 공개입찰이 만능이 아니다. 담합이 성행하는 입찰이 공정한 것도 아니다. 최고의 질을 갖춘 이에게 수의계약하는 것이 오히려 책임과 질을 보장하는 경우도 있다. 가격경쟁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 ‘(복원비로) 1억을 책정했으니 누가 잘하나 뽑아보자’는 식으로 가야 한다.”
그는 정년퇴임 뒤에도 명지대 석좌교수로 남아, 자신이 수집한 2만여권의 책들이 들어찬 연구실을 중심으로 교수활동을 계속한다. “집사람이, 정년인데 물러나지도 않으면서 무슨 퇴임기념이라고 하느냐며. 차라리 정년시작 기념이라고 하라더라.”
학교에서 월급은 안 나온다. “대신 창비, 눌원문화재단 등 나와 인연이 있는 문화재단 몇 곳에서 향후 최소 5년간은 연구실을 사용하면서 강의할 수 있도록 십시일반으로 ‘유홍준 석좌교수 기금’을 만들어줬다.”
글 한승동 기자sdhan@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