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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칼기 피격과 스승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등록 2013-01-11 20:38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캠퍼스 자신의 연구실에서 만난 김대진 교수. 온몸으로 음계를 표현하는 음악가답게 그의 표정은 다양하고 풍부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캠퍼스 자신의 연구실에서 만난 김대진 교수. 온몸으로 음계를 표현하는 음악가답게 그의 표정은 다양하고 풍부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피아니스트, 김대진 한예종 교수

랑랑(1994년), 손열음(2000년), 김선욱(2004년), 문지영(2012년) 등을 배출한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는 피아노 영재들의 소문난 등용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순수 국내파인 세 명의 한국인 우승자는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음악원 김대진 교수의 제자들입니다. 김 교수 자신도 1973년 열한살의 나이로 국립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예원학교, 서울예고를 다니는 동안 이화, 경향, 중앙, 동아 등 국내 음악 콩쿠르를 휩쓸었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서울대 음대 2학년이던 82년 줄리아드 음대로 유학을 떠난 그는 85년 로베르 카자드쥐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세계적인 교향악단들과 협연을 계속하는 한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연구로 줄리아드에서 흔치 않은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94년 맨해튼 음대 예비학교 교수로 일하던 그가 갓 개교한 한예종 교수로 귀국한 것은 당시로는 상당히 이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누구보다 자주 무대에 서면서도 늘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전천후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고, 제자를 키워 지속적으로 국제무대에 내보냈으며, ‘김대진 렉처 콘서트’ 등 클래식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기획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005년에는 지휘자로 데뷔하여 2008년부터 수원시향의 상임지휘자도 맡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키우는 데 일찍이 헌신한 뛰어난 스승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서울 서초동 한예종의 연구실을 찾았습니다. 교습을 위한 두 대의 피아노가 나란히 놓인 연구실은 생각보다 좁고 추웠습니다. 옆방의 노래와 악기 소리도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노스웨스트를 끊고 가셨다가
대한항공으로 바꿔 일찍 귀국하다
사고당한 서울대 음대 오정주 교수
제자의 콩쿠르 준비 때문이었어요
교육자의 열정이 뭔지 깨달았죠
선생님 뒤를 잇겠다 생각했어요

불쑥불쑥 튀는 애들을 보면
잔디깎기 기계처럼 깎아냈어요
국제 콩쿠르에서 안 틀리고
입상은 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지구상에 딱 한명
‘오리지널’로 키우진 못했어요

한국 아이들, 무대 올라서면 살기 느껴져

-12월14일 고양 아람누리에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베토벤 교향곡 5번 지휘하시는 걸 봤습니다. 손열음, 김선욱 등 제자들과 눈길을 주고받으며 지휘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는 평이 많던데, 그날 피아니스트 이진상과의 연주도 역시 좋더군요.

“협연자를 편안하게 해주고,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내는 건 지휘자의 기본이에요. 협연자와 교감하지 못할 거면 지휘할 이유가 없죠.”

-베토벤 교향곡 5번은 웬만한 클래식 애호가라면 전곡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라 지휘자에게도 부담이 클 텐데요.

“사실 엄청난 부담이죠. 그래서 그 곡으로 음반도 내고 연주도 여러 번 하면서 자신감을 쌓아왔어요. 연주자나 교향악단마다 그릇의 크기는 다 다르지만, 수원시향의 그릇을 우리가 노력해서 채웠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 있는 연주가 만들어지거든요. 그 진심과 열정이 전달될 때 감동이 있는 거죠.”

-고양 아람누리에 모인 청중의 반응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집중도가 굉장히 높더군요.

“청중의 전반적인 수준도 올랐지만 그날 관객이 더 특별했던 것 같아요. 정말 음악이 듣고 싶어 온 분들인 걸 저도 느꼈거든요. 저는 연주 시작하기 전에 걸어 나가면서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껴요. 걸어 나갈 때 연주자는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살짝 뜨고, 청중은 반대로 연주자를 누른다 싶게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가 최상이에요. 우리나라 연주회는 번잡스럽게 약간 떠 있는 느낌일 때가 많거든요. 그날처럼 무게 있는 분위기에 나가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죠.”

-제자들 연주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 연주회와 겹칠 때 빼고는 다 가려고 노력해요. 저에게 큰 도움이 되니까요. 연습실에서 6개월을 가르친 것보다, 실제 연주회 한 번을 보면서 애의 성향을 더 많이 파악할 수 있거든요. 연습실은 의식의 세계지만, 무대는 무의식의 세계예요. 놀랄 때 ‘아이고’라고 외치는 것을 ‘엄마야’로 바꾼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교육이 성공했는지를 알려면 실질적으로 애를 깜짝 놀라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연습실은 의식의 세계라 교육의 결과를 확인할 방법이 없고, 무대에 올라야 평소에 내가 주문한 것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할 수 있죠. 의식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다 입력시켜, 무의식의 세계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교육이에요.”

-상당히 무서운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아마도.(웃음) 그런데 지난 9월 영국의 리즈 콩쿠르 심사에 갔다가 가르침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국제 콩쿠르 심사를 처음 하는 게 아닌데, 그 전에 못 보던 걸 이번에 보게 되었거든요. 한국 애들과 유럽 애들의 차이가 눈에 확 들어온 거예요. 우리 애들이 무대에 올라오면 일단 무서워요. 어둡고 긴장되어 있는데 거의 살기가 느껴질 정도예요. 안 틀려서 입상해야겠다는 의지가 그만큼 강해요. 그런 애들을 보면 심사위원도 긴장이 돼요. 듣는 사람도 (몸을 바짝 세우고 앞을 무섭게 쳐다보며) 이렇게 딱 경직이 되기 마련이죠. 저도 그렇게 경직된 상태로 듣다가 ‘가만있어 봐. 왜 이러는 거지?’ 고민을 하게 됐어요. 유럽 애들은 기능적으로는 우리보다 떨어지지만, 어쨌든 자기 이야기를 하거든요. 무대 위에서 즐기며 연주하니까 듣는 사람도 편안하게 거기에 빨려 들어가며 감상을 할 수 있어요. 축구도 똑같더라고요. 축구공을 보면 무서운 코치만 생각나는 우리 애들과 축구공을 놀이로 생각하는 남미 애들의 차이랄까.”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과거에 저는 불쑥불쑥 튀어나온 특징 있는 애들을 보면 마치 잔디를 깎듯이 그 울퉁불퉁한 부분을 깎아냈어요. 시간도 오래 안 걸렸어요. 6개월이면 완벽하게 깎아서 객관적인 부분만 남길 수 있었죠. 걔네들이 국제 콩쿠르 나가서 실수 없이 상도 타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애들에게 자신만의 얼굴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잘 모르겠더군요. 후회가 밀려왔어요. 이 아이는 지구상에 딱 한 명이에요. 그 한 명이 자기 느낌을 표출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게 진짜거든요. 오리지널! 남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거죠. 그걸 끌어내는 게 교육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든 튀지 않는 게 중요한 나라잖아요.”

-잔디 기계가 깎기 전에 잔디가 스스로 자기를 깎기도 하죠.

“정확한 표현이에요. 흔히 말하는 정석 코스, 즉 예원, 예고 나온 애들의 피아노 치는 게 다 흡사한 이유가 거기 있어요. 우리는 남과 다를까 걱정하고, 외국 애들은 남과 같아질까 걱정하죠. 물론 그림이 되려면 일단 액자 안에 들어가야 해요. 남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성이라는 틀을 갖춰야 하죠. 그러나 액자 안에 들어가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 아니라, 난생처음 본 그림이라는 느낌을 줘야 해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액자 만드는 방법만 가르친 게 아닌지 반성하고 있어요.”

김대진의 인생 타임라인 (※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대진의 인생 타임라인 (※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9살 때 뇌막염은 피아니스트 인생의 출발

-과거의 방법으로도 손열음, 김선욱 같은 훌륭한 연주자를 키워내셨잖아요.

“물론 저도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니까 ‘그래도 네가 잘못만 한 건 아니야. 네 학생 중에는 누구도 있고 누구도 있잖아?’라고 자문하죠. 하지만 걔네들은 어딜 가도 성공했을 애들이에요. 원래부터 개성이 있었죠. 외국 애들은 액자에 안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고 우리 애들은 아주 견고한 액자만 만드는데, 걔들은 그 두 가지를 다 갖춘 특별한 경우였어요. 저는 그 특별한 애들이 너무 옆으로 빠지거나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방향을 제시해줬을 뿐이에요.”

-결국 타고난 게 중요한 건가요?

“타고난 것만 중요한 건 아니고요. 예를 들면 제 학생 중에 페달을 너무너무 못 쓰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4년 내내 제가 페달 밟기만 가르쳤어요. 졸업 연주 하루 전날 바로 이 자리에서 레슨을 하는데 결국 다 고쳐진 걸 보고, 제가 일기에 썼어요. ‘다 고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훌륭한 선생이다!’ 그리고 졸업연주회에 갔는데 걔가 신입생 때보다도 더 나빠진 상태로 연주를 하더군요. 원점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간 거예요. 그날 밤 ‘아, 나 같은 사람이 누구를 가르쳐도 되는가?’ 회의가 밀려들었어요. 그런데 몇 년 후 걔한데 이메일이 왔는데 ‘유학 와서 제가 페달이 안 좋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렇게 적혀 있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김 교수님께서 내내 지적했던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가르친 것은 걔한테 하나도 입력이 안 된 거예요.(웃음) 뭘 가르친다는 게 의미가 없고, 자기 스스로 깨닫는 순간이 와야 하는 거죠. 굳이 얘기하자면 그걸 깨닫게 해주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게 선생이고요. 인내를 갖고 더 긴 시간 바라봐야 하는 거죠.”

김대진은 그저 “은행원의 아들”이라고 밝히지만 그의 아버지는 국민은행 전무를 거쳐 상업은행장을 지낸 분입니다. 외할머니는 유관순과 함께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총재를 지냈습니다. 한때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었던 아버지 덕분에 집에는 수천 장의 클래식 레코드가 굴러다녔습니다. 아홉살 때 뇌막염에 걸려 학교를 못 가게 된 김대진이 피아노를 장난감 삼아 노는 걸 본 외할머니가 찬송가 치는 법을 알려준 것이 피아니스트 인생의 출발이었습니다. 피아노 시작은 남보다 훨씬 늦었지만, 아버지의 레코드로 이미 충분한 음악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테크닉을 따라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중2 때부터는 같은 동네에 살던 서울대 음대 오정주 교수 집에 가서 밤마다 레슨을 받고 통금 호루라기가 들리면 집으로 뛰어오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김대진은 오정주의 아들”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일반인과 상당히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지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한참 잘나가던 그가 자기 정체성을 ‘선생’으로 규정하게 된 것도 오 교수 때문이었습니다.

“1983년 오정주 선생님이 미국을 다녀오는 길에 대한항공기 피격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죠. 비행기표를 끊으러 가실 때 저도 따라갔기 때문에 잘 알아요. 노스웨스트를 끊고 가셨다가 대한항공으로 바꾸어 며칠 일찍 귀국하다가 사고를 당하셨거든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순전히 제 짐작이지만, 며칠 일찍 들어오면 당신 제자가 콩쿠르 준비하는 걸 한 번 더 들어주실 수 있었어요. 그것 말고는 비싼 돈 주고 표를 바꿀 이유가 없었거든요. 선생님의 죽음을 보고 교육자의 열정이 뭔지 깨달았죠. 선생님 연구실의 유품도 제가 정리했어요. 그때부터 선생님의 뒤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생의 큰 전환이었죠.”

-한예종을 선택한 이유는?

“미국에서 교수를 하던 중 서울대 교수 공채를 보고 당연히 제 갈 길이라 생각하고 두 번 지원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죠. 두 번째 떨어지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이강숙 선생님께 인사 전화를 드렸는데, 바로 만나자고 하시더군요. 찾아뵈니 ‘당장 마음을 정하면 (한예종 교수로) 뽑아주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라’고 하셨어요. 뭔가에 홀렸다고 할까요, 그 자리에서 그냥 ‘알겠습니다’ 해버렸어요.”

-해외 음악인으로 국내 교향악단과 협연하며 받던 개런티와 귀국 후 받는 개런티가 너무 달라서 놀랐다고 하던데요.

“똑같은 사람인데 귀국하자마자 거의 3분의 1로 깎이더군요.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내 음악인에게 발전의 계기가 찾아왔어요.

외환위기로 외국 음악인들을 불러올 수 없게 되면서 저희가 전부 대타를 뛰게 됐거든요. 그때부터 봇물 터지듯이 국내 음악인들의 새로운 기획이 시작됐어요. 무언의 공감이 있었던 거죠. 그 전까지는 국내에서 단 두 명이라도 함께 모여 기획연주를 의논한 적이 없는데, 그때부터 좋은 기획이 이루어지고 청중들도 ‘돈 주고 가서 들을 만하다, 싸고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피아노 하면 한국! 이상한 애국심의 정체는?

-유학파로서 순수 국내파 양성에 헌신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1980년대에는 ‘피아노 하면 모스크바’였어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때부터 저는 ‘피아노 하면 한국’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나 생각했어요. 국내파를 키울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유학 오게 만들겠다는 꿈을 꿨죠. 실제로 지금은 일본에서 비행기 타고 저에게 개인 레슨 받으러 오는 학생들이 생겼어요.”

-뒤늦게 지휘자로 데뷔한 이유는 뭔가요?

“지휘자를 꿈꾼 적은 없지만, 우리 음악계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있었어요. 국내파보다 유학파가 우대를 받는 것도 문제지만, 연주자를 꿈꾸며 유학을 마친 그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도 문제거든요. 일자리가 없으니 대개 레슨을 하는 교육자가 되는데, 일자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교향악단에는 들어오지 않아요. 연주자를 꿈꾸던 사람이 교향악단에 들어오는 건 한마디로 창피하다는 거죠. 대우도 워낙 열악하고요. 그런데 해외는 베를린필이든, 뉴욕필이든 거기 들어가면 주변 사람들이 국제 콩쿠르 1등 한 것만큼 축하해 줘요. 우수한 연주자가 교향악단에 들어와 교향악단의 기량이 향상되면 청중도 모이기 마련이죠.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훌륭한 교향악단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자원을 갖춘 나라인데, 그런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않았어요.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수원시향에서 지휘자 제안을 받았죠. 처음에는 피아노 협연을 하자는 줄 알았는데, 교향곡을 정하라기에 전화를 잘못 받은 줄 알았어요.(웃음) 그런데 시장님 만나고 마음이 움직여서 지휘자를 맡게 됐죠. 수원시향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 인구에 회자되고 이제는 줄리아드 졸업생이 들어올 정도가 된 데 보람을 느껴요. 지금도 지휘자로서 야망은 없고, 대한민국이 음악 강국이 되는 기본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을 뿐이에요.”

-삶의 바탕에 깔린 이상한 애국심은 어디서 나온 거죠, 외할머니?

“설명은 못하겠어요. 그냥 원래 그래요.(웃음)”

-살면서 가장 따뜻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학생들이 잘됐을 때죠. 콩쿠르 우승할 때도 좋지만, 학생이 자기 벽을 뚫고 한 단계 도약하는 걸 볼 때마다 제가 느끼는 순수한 감동이 있어요. 그게 저의 존재 이유고요.”

‘슈퍼 엘리트’에 속하는 그의 가문과 경력 때문에 인터뷰를 하기 전에 솔직히 잠깐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분야든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특히 ‘가르침’에 대한 김대진의 최근 깨달음은 비수처럼 팍팍 제 가슴에 꽂혔습니다.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오리지널을 키우지 못하고 액자 만드는 법만 가르치는 것은 비단 음악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항을 상징하던 이른바 ‘386세대’가 어느덧 ‘다음 세대를 키우지 않는 꼰대들’로 비판받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운동권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김대진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좀 다른 차원의 애국심과 후진 양성의 열정이 어쩌면 386세대를 위한 가장 훌륭한 알리바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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