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싸움
태초에 말싸움이 있었다
‘사망유희’ 토론이 불지른 리얼타임 말싸움의 계절
누리꾼은 놀이로 승화하며 서사도 만들어
방송 관계자들이 밝힌 토론 프로그램 경쟁자 합 맞추고
같은 편 짝 묶는 방식, 대선 후보들의 ‘말빨’ 분석 어떤 상징도 말보다 뜨거울 순 없다. 뜻과 감정을 전하는 수단으로 음성만큼 생생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경계가 대면 접촉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던 시절, 커뮤니케이션의 최고 덕목은 진실성이었다. 사람들은 왜곡·기만이 가능한 글과 달리 말은 진실한 날것을 눈앞에 현전시킨다고 믿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이 간결한 진술은 오랜 기간 글에 대한 말의 우월성을 증언하는 신의 보증서로 통했다. 말이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영역은 ‘이성과 문자의 시대’인 근대를 통과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정치가 대표적이다. 이는 현대의 민주정치가 인민의 열정과 열정이 부딪치는, 제도화된 갈등의 영역이란 사실과 결부돼 있다. 다양한 집단의 이해와 열정이 집중적으로 분출되는 선거 국면엔 여지없이 ‘말의 전쟁’이 펼쳐졌다. 공직 후보자 상호 간, 또는 논객과 전문가들이 가세해 벌이는 실시간 정치토론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도 높은 말들의 쟁투장이었다. 온라인 문자 공방 < 리얼타임 말싸움 정치의 계절이 무르익은 탓일까. 한동안 시들했던 시사토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100분 토론>(MBC)이나 <심야토론>(KBS) 같은, 전통적인 지상파 토론 프로그램뿐만이 아니다. 최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달군 것은 진보 논객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변희재 <주간 미디어워치> 대표 등 다수의 보수 논객과 연이어 벌이기로 한 ‘사망유희 토론’이었다. 민형사 소송까지 갔던 두 사람의 구원(舊怨)을 잘 알고 있는 네티즌과 트위터 이용자들은 일정과 엔트리가 확정되기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였고, SNS상에는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한 웹포스터와 홍보 동영상이 인기리에 유포됐다.
토론이 마련된 직접적인 계기는 10월 말 진 교수가 ‘아이비리그 유학생’을 자처하는 한 보수 네티즌과 북방한계선(NLL)·정수장학회를 주제로 벌인 실시간 화상 토론이었다. 트위터상에서 진 교수와 간헐적 공방을 주고받으며 자신감을 충전한 이 네티즌은 무모하게도 대전료 100만원을 걸고 실시간 맞짱 토론을 진 교수에게 제안해 성사시켰는데, 결과는 예상대로 진 교수의 일방적 승리였다. 이 토론은 사람들이 한동안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일깨웠다. 말과 말이 격돌하는 ‘리얼타임 토론’과 단문의 메시지가 시차를 두고 오가는 ‘온라인 문자 공방’은 게임의 문법과 참가자에게 요구되는 능력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동안 잊고 있던 ‘리얼타임 말싸움’의 박진감과 뚜렷한 승패 구도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디지털 기술의 승리가 가져다준 매체 환경의 변화로 다양한 볼거리·즐길거리가 일상에 넘쳐남에도 대중은 왜 말이 오가는 실시간 토론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말한다. “단편적인 트위터 공방이 채워주지 못하는, 논리적 논쟁에 대한 갈증이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치고받는 두 사람이 현실에서 맞붙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두고 속물적 호기심이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토론 프로그램에 내장된 ‘경쟁성’과 ‘오락성’을 꼽는다. “가장 큰 건 재미다. 토론에서 승패가 명확히 갈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강의 우열은 드러난다. 정치가 사안인 만큼 호감을 느끼는 진영에 감정이입이 되고, 가시화된 우열에 따라 성취감이나 패배감을 갖게 되니 긴장과 박진감이 강하지 않겠나.”
반면 미디어 전문가들은 인터넷 게시판과 뉴스 댓글, SNS에서 이뤄지는 콘텐츠의 2차 유통 과정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원용진 서강대 교수의 분석이다. “인터넷이나 SNS와 연결되며 ‘경쟁적 게임’이란 콘텐츠 성격에 ‘놀이’가 가미된다. 댓글놀이, 말놀이다. 이 과정에서 수용자들은 원래의 토론 공간이 제공하지 못한 개념이나 정보를 주고받으며 전혀 새로운 정치적 의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시청자가 토론을 복기하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영웅’ ‘열사’ ‘○○동 ×선생’ 같은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엮이기도 하는데, 그 결과 애초 토론의 내용이나 승패와는 상관없는 정치적 서사가 탄생하기도 한다.
김진과 전원책, 잘못된 만남
그렇다면 정치인들 가운데 토론을 잘하는 논객은 누굴까. ‘업계’에선 홍종학·이혜훈·최재천·김종훈·유승민·박영선·이용섭 의원과 유시민·원희룡 전 의원을 꼽는 이가 많다. 현경보 SBS 시사토론팀장(부장)은 경제학 박사인 홍종학 민주통합당 의원을 꼽았다. “많이 알고, 입장 분명하고, 정리 잘돼 있고, 전달력이 좋아야 한다”는 현 부장의 기준에 맞는 인물이다. 한나라당 원내대변인을 맡았던 정옥임 전 의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예전에 다른 사람이 하기로 했던 세종시 토론을 갑자기 맡게 됐다. 토론 잘하는 것은 원래 알았는데 외교통일이 전문이지 세종시는 아니었다. 사전에 세종시를 직접 다녀오더라. 철저히 준비를 했으니 토론도 잘 진행됐다.”
TV토론 패널 구성에도 요령이 있다. 정치 분야에는 “진중권·전원책을 일단 앉혀놓는다.”(현경보 팀장) 명확한 대립 구도가 생기고 주거니 받거니 공수의 궁합도 맞기 때문이다. 패널의 인지도가 높아 대중의 관심은 절로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현 팀장은 “두 사람은 진영 논리를 대변하기 때문에 토론에서 전혀 물러서지 않는다. 신뢰도 낮은 여론조사 자료를 인용하고도 그걸 끝까지 지키는 식이다. 전 변호사는 상대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 정도로 고함을 치는 것도 흠”이라고 했다.
같은 편을 묶는 데도 원칙이 있다. 예컨대 전원책 변호사와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가장 인기 있는 보수 논객이지만,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 토론 프로그램 관계자는 “2 대 2 토론 패널을 구성할 때 일반적으로 이론가 2명에 이데올로그 2명으로 구성한다.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뒤에서 받쳐줘야 한다. 전 변호사와 김 위원은 둘 다 이데올로그다. 그들 옆에는 누군가 이론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폭탄끼리 만나서 함께 터지면 토론이 안 되니, 원폭이 아닌 원전 정도로 만들어주는 ‘감속제’ 역할을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 5월 KBS <심야토론>에서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룬 적이 있다. 전 변호사의 “김정일·김정은 개새끼” 발언이 나온 것이 이때였다.
그렇다면 토론을 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KBS <심야토론>을 연출하는 공용철 PD는 유연한 스타일에 가산점을 준다. “토론을 하는 이유는 결국 상대방이 아닌 시청자와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자기 입장만 완고하게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겸손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이 토론을 잘한다.” 김기현 새누리당 의원이 이런 기준을 따르면서도 자기 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최재천 민주당 의원은 싸움을 잘하고 방송사들도 선호하지만 자기 진영이 아닌, 생각이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너무 점잖은 사람들만 나오면 토론이 안 되고 재미도 없다. 직설적인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놓으면 전자가 더 신뢰감을 주고 토론도 잘한다.”
단점 보완 시급, 박·문·안
200~300명의 패널을 확보하고 매주 주제별로 ‘돌려막기’를 하지만, 새로운 얼굴에 대한 욕구도 분명하다. 케이블 TV에서 활동하다 공중파 토론 프로그램으로 진출해 맹활약 중인 논객으로는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이 꼽힌다. 이 소장은 “복싱이 아니라 장기자랑을 한다는 생각으로 토론에 임한다”고 했다. 토론은 상대방을 두들겨 쓰러뜨리는 복싱보다,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를 보여주고 평가받는 장기자랑에 가깝다는 것이다. “패널 좌석에 앉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백지 위에 ‘스마일’이란 영어 단어를 쓰는 거다. 상대 논리가 아무리 빈틈이 많아도 논박하고 공격하려는 욕심을 눌러야 한다.”
후보등록일이 다가오자 TV 토론을 준비하는 유력 대선주자 진영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박빙의 지지율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TV 토론은 부동층 유권자의 선택에 유력한 참고 지표가 돼 막판 판세를 결정적으로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점은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가운데 누구도 인상적인 토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장 다급한 쪽은 안철수 후보 진영 같다. 당장 후보등록일(11월25~26일) 이전에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를 위한 양자 토론에 나서야 한다. 전국을 돌며 강연과 토크쇼를 진행한 경험이 풍부하다고 하지만 공격과 방어, 시청자를 상대로 한 설득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TV 토론과는 긴장과 난이도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캠프에선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춘추관장을 지낸 유민영 대변인이 토론 준비를 총괄하고 있다. 캠프 쪽은 안 후보의 대중적 화술과 현안에 대한 학습 능력 등에 기대를 걸고 있다.
문재인 후보 쪽은 논리력과 국정 이해도를 강점으로 꼽는다. 율사 출신이라 논변이 정교하고, 청와대 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내 정책 이해도가 다른 후보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이다. 토론팀을 총괄하는 김현미 민주당 의원은 “‘토론의 달인’으로 불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논리적이고 진실해 보이는 강점은 있다. 관건은 후보의 생각을 얼마나 친숙한 화법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느냐에 달렸다”고 했다. 문 후보 진영은 MBC 뉴스 앵커를 지낸 신경민 의원을 포함한 10여 명 안팎으로 토론팀을 꾸렸다.
박근혜 후보 쪽은 이정현 공보단장과 대우그룹 공보대변인을 지낸 백기승 공보위원이 토론팀을 이끌고 있다. 백 위원은 “방송토론 경험이 많은 의원급과 실무자를 중심으로 팀을 꾸리려고 한다. 현재로선 중앙선관위가 주최하는 행사를 중심으로 토론회에 참석한다는 계획만 서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의 토론 동영상에 대해선 “다분히 의도성을 갖고 편집된 것이다. 그 뒤로 관훈토론 4번, 방송기자클럽토론에 6번이나 나가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 박 후보가 토론에 서툴다는 것은 낭설”이라고 했다. 캠프는 안정감과 진실된 이미지를 박 후보의 장점으로 내세운다.
기다리고 고대하는 메인 이벤트
SNS상에서 11월 최고의 시사 이벤트로 떠오른 진중권-보수 논객 릴레이 토론은 생각지 못한 연쇄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좀처럼 이슈화의 계기를 찾지 못하던 대선 후보자 TV 토론이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20∼30대에게조차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트위터에선 후보자 간 토론을 촉구하는 멘션이 줄을 잇는다. “다가오는 대선의 최대 이벤트를 정당들·안철수도 아니고 진중권·변희재가 만들어주는구나. 대선주자들은 반성하고 빨리 TV 토론 시작해라.”(@generalred) “왜 진짜 TV 토론 안 하는 거야. 진중권 토론 본 후로 안 보던 <100분 토론>도 보고 시사토론도 보고 그러는데, 왜 메인 이벤트 안 해?”(@bacbin)
후보자 토론. 일단 날짜부터 잡고 보자. 아무리 박진감 넘쳐도, 논객끼리 치고받는 대리전은 그래봐야 ‘세미파이널’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특검, ‘MB는 불법 증여’ ‘아들은 조세포탈’ 결론
■ 청와대 “특검 결론 못받아들여” 노골적 불만
■ [한인섭 칼럼] 대통령의 염치
■ 알지도 못하는 ‘왕재산’ 들먹이며 소환하고 계좌 뒤지고
■ ‘사망유희’ 토론이 불지른 ‘말의 전쟁’
■ 죽음도 가르지 못하는 홍어의 처절한 사랑
■ [화보] 책임져야 사랑이다
누리꾼은 놀이로 승화하며 서사도 만들어
방송 관계자들이 밝힌 토론 프로그램 경쟁자 합 맞추고
같은 편 짝 묶는 방식, 대선 후보들의 ‘말빨’ 분석 어떤 상징도 말보다 뜨거울 순 없다. 뜻과 감정을 전하는 수단으로 음성만큼 생생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경계가 대면 접촉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던 시절, 커뮤니케이션의 최고 덕목은 진실성이었다. 사람들은 왜곡·기만이 가능한 글과 달리 말은 진실한 날것을 눈앞에 현전시킨다고 믿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이 간결한 진술은 오랜 기간 글에 대한 말의 우월성을 증언하는 신의 보증서로 통했다. 말이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영역은 ‘이성과 문자의 시대’인 근대를 통과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정치가 대표적이다. 이는 현대의 민주정치가 인민의 열정과 열정이 부딪치는, 제도화된 갈등의 영역이란 사실과 결부돼 있다. 다양한 집단의 이해와 열정이 집중적으로 분출되는 선거 국면엔 여지없이 ‘말의 전쟁’이 펼쳐졌다. 공직 후보자 상호 간, 또는 논객과 전문가들이 가세해 벌이는 실시간 정치토론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도 높은 말들의 쟁투장이었다. 온라인 문자 공방 < 리얼타임 말싸움 정치의 계절이 무르익은 탓일까. 한동안 시들했던 시사토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100분 토론>(MBC)이나 <심야토론>(KBS) 같은, 전통적인 지상파 토론 프로그램뿐만이 아니다. 최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달군 것은 진보 논객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변희재 <주간 미디어워치> 대표 등 다수의 보수 논객과 연이어 벌이기로 한 ‘사망유희 토론’이었다. 민형사 소송까지 갔던 두 사람의 구원(舊怨)을 잘 알고 있는 네티즌과 트위터 이용자들은 일정과 엔트리가 확정되기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였고, SNS상에는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한 웹포스터와 홍보 동영상이 인기리에 유포됐다.
온라인 문자 공방이 아닌 현실의 말싸움에서 진중권에 대적할 고수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중권과 우파 논객들이 벌이게 될 ‘사망유희 토론’을 패러디한 웹포스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논리와 콘텐츠, 순발력과 레토릭을 두루 갖춘 탁월한 논객이었다. 이들에 필적할 만한 논객 정치인이 나올 수 있을까. 한겨레 자료 사진
■ 특검, ‘MB는 불법 증여’ ‘아들은 조세포탈’ 결론
■ 청와대 “특검 결론 못받아들여” 노골적 불만
■ [한인섭 칼럼] 대통령의 염치
■ 알지도 못하는 ‘왕재산’ 들먹이며 소환하고 계좌 뒤지고
■ ‘사망유희’ 토론이 불지른 ‘말의 전쟁’
■ 죽음도 가르지 못하는 홍어의 처절한 사랑
■ [화보] 책임져야 사랑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