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저녁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은 자기 자랑을 피하는 대신 상담과 교육에서 느끼는 보람을 한참 이야기했다. <의자놀이>와 관계된 마음고생을 많이 겪은 그는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진지하고 신중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공지영 선생의 인터뷰를 정리하며,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의 인터뷰도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월8일 <한겨레>에 그런 생각을 전달했고, 다행히 그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토요판 에디터가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10월18일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하 학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터뷰에 응할지를 고민했던 그가 자리에 앉으면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녹취를 담당하는 기자의 비정규직 여부였습니다. 정규직이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소문대로 그는 원칙에 충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공회대학에는 언제 자리를 잡으셨죠?
“3학기째예요. 노동대학장이 한동안 공석이었다고 하더라고요. 2011년 3월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을 그만두고 바로 제안을 받았는데, 당시는 성공회대 비정규직 조교들이 해고돼서 1인시위와 집회를 할 때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는 성공회대에 못 간다. 우스운 일 같겠지만 나같이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원칙이다’라면서 못 갔죠. 다음 학기에 문제가 해결되었다면서 오라고 하더라고요. 노동대학은 4년제 대학이 아니라 평생학습 개념의 교육기관이고, 저도 학장을 하려니까 초빙교수로 발령을 받았을 뿐, 비정규직입니다.”
80년대 운동조직 내부투쟁 땐
저와 갈등을 빚던 활동가가
음료수를 줘도 의심할 정도였죠
‘혹시 설사약 넣지 않았나’ 해서…
지금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어요 노동상담은 고전적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계속 생겨요
내가 이 서류를 붙들고 밤새우면
저 노동자가 밥을 먹는다는 게
제겐 구원의 끈이나 마찬가지죠 만약 그 트위트가 없었다면…
-트위터에서 ‘생불’로 불리시더군요. 원래 별명인가요? “트위터에서 <의자놀이>와 관련해서 제가 쓴 글이 정말 별로 없거든요. 그걸 보고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에요. 흔히 스스로 ‘잉여’라는 사람들이 제 주장에 많이 동조하는 편인데, ‘생불’이나 ‘사리 생기겠다’ 같은 말은 그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죠.” -의자놀이 논란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공지영 작가 인터뷰를 보니까, 이번 ‘소란’의 팩트는 하종강 이름을 빼먹었다는 것 하나뿐이다라고 얘기했더군요. 팩트가 하나 더 있어요. 왜 이선옥 작가 글이 포함된 하종강 글만 유독 공 작가가 쓴 글처럼 보이게 처리했느냐고 이유를 묻자, 공 작가가 트위터에서 우리를 ‘겉으로는 위선을 떨고 다니는, 내면으로는 온갖 명예욕과 영웅심 그리고 시기심에 사로잡힌, 남의 헌신을 믿지 않는, 한 번도 진심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규정한 거죠. 그게 더 중요한 팩트예요. 만약 그 트위트가 없었다면 이메일을 공개할 일도 없었을 거고, 거기서 그냥 끝이었어요. 시기심, 명예욕, 그리고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제가 살아온 인생 전체가 부정되는 거잖아요. 저의 첫 이메일은 ‘왜 그렇게 했냐?’고 궁금하다고 물어보는 차원이었어요. 표절, 저작권, 전량회수, 폐기, 사과 같은 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선옥 작가의 글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메일 표현에는 비난의 뉘앙스도 있었던 것 아닌가요? “이선옥 작가의 존재를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 한 것은 우리 짐작인 거죠.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직까지 답은 못 들었고요. 공 작가가 쌍용차와 관련한 책을 쓰겠다고 했을 때 언론 인터뷰 과정에서 ‘사태를 알수록 적의 실체가 없는 유령과의 싸움’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잘못하면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는 의견이었지요. 그래서 5월에 이선옥 작가가 ‘그렇지 않다’고 <프레시안>에 글을 썼는데, 만약 공 작가가 그 글을 읽었다면 좀 아프게 느꼈을 거예요. 공 작가의 시각에 대해 우려를 표한 이 작가의 그 글이 제가 보기에는 임팩트가 강했거든요. 그래서 그 글을 읽었는지, 읽었으면 이선옥 작가를 기억하는지, 이 작가가 쓴 글이 <의자놀이>를 쓸 때 반영이 되었는지 궁금했죠. 그리고 희망식당에서 이선옥 작가가 공지영 작가를 인터뷰한 적도 있어요. 그 글을 쓰고 인터뷰도 한 사람이 이선옥 작가라는 걸 공지영 작가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 질문을 이메일에 적었던 거죠. 그걸 이메일로 격식 있게 정리하다 보니, 간결하게 표현된 면이 있죠. 우리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이메일이 상대방을 분노하게 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어요. 공지영 작가가 사람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키워드가 질투였다는 것을 제가 알았다면 좀더 조심했을 거예요. 우리는 공지영 작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시기심과 명예욕 때문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보는 그 생각이 틀렸다. 그 생각을 고쳐 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문제에 비해 논란이 너무 커진 것 아닌가요? “애초에 이선옥 작가의 글을 제가 칼럼에 인용해서 생긴 문제여서 제가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그걸 ‘원죄가 있다’고 표현한 거죠, <의자놀이> 책이 10만권 팔렸는데, 그 책에 자기 글이 섞여 들어간 이 작가가 책을 내면 사람들은 ‘이선옥이 공지영의 글을 베껴 썼다’고 오해할 것 아니겠어요? 벌써 트위터에는 우리가 쓴 글이 공지영 작가 글이라고 추천돼 돌아다니고 있어요. 글 쓰는 사람에게는 치명적 피해죠. 이선옥 작가가 쌍용차 노동자들 때문에 많이 참은 거예요. 쌍용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니었으면 이선옥 작가는 좀더 선명하게 자기주장을 했을 겁니다. 출판사 쪽에서 ‘10만권 팔아서 쌍차에 4억 주고 싶다. 다른 욕심 없다’고 했고 그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에 최대한 말을 참고 있는 상황에서 한겨레 인터뷰가 팍 터진 거죠.” -‘내 인생은 의자놀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 같다’는 표현도 쓰셨죠. 트위터에서는 하종강, 이선옥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도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시는 이유는 뭔가요? “우리도 욕 많이 먹었어요, ‘당신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쌍용차 22명의 목숨보다 중요하냐?’부터 원색적인 쌍욕까지. 의자놀이 논란 이후에 우리가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앞에 한 번도 못 갔거든요.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된 거죠. 저는 쌍용차에 그렇게 자주 간 사람이 아니지만, 이선옥 작가는 자주 갔던 사람이거든요. 이 작가와 저는 의자놀이 논란 뒤, 콘서트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떠난 깊은 밤에 딱 한 번 대한문 앞에 갔었어요. 그게 이 일이 있기 이전과 이후의 가장 큰 차이죠.” ‘하종강이 프락치’라는 그때 그 모함
의자놀이 논란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인격에서 가장 자신 있다고 믿었던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비판당하는 이상한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종강은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추운 시기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는 30년 전 겪었던 비슷한 경험을 다시 떠올렸다고 합니다. “80년대 운동조직에서는 치열한 내부투쟁이 있었잖아요. 저하고 갈등을 빚던 활동가가 발제하는 저에게 음료수를 갖다주는데, ‘이걸 마셔야 하나? 혹시 설사약 같은 걸 넣은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저도 토론하다 보면 정말 설사약 같은 걸 먹이고 싶은 상대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저는 몰랐는데, ‘하종강이 프락치라는 소문이 있는데 근거가 있는 얘기냐?’고 묻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의도적 모함이었죠. 후배들은 전면전이라면서 총력을 동원해서 한번 붙어보자고 했지만, 제가 말렸어요. ‘내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내가 활동을 오래 계속하면 이 오해는 언젠가는 풀린다.’ 제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좀 그런 편이었어요. 그 여파로 제 주변에는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정보기관의 요직에 있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냥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이번 일에서 그때와 비슷한 억울함을 느끼시는군요? “네, 그 생각을 했죠. 노동운동을 하다 보면, 철학이 바뀌어서, 흔히 말해 변절해서 운동을 떠난 사람들보다는 동료들에게 받은 상처를 이기지 못해서 떠난 사람이 훨씬 많아요. 그래서 후배 활동가들에게도 ‘언젠가 상처를 받게 될 텐데 그때 꼭 이겨내야 오래 활동할 수 있다’고 얘기해요.” 1955년 인천에서 태어난 하종강은 목사가 되기로 서원하고 방학 때면 한탄강 근처 수도원에 들어가 살다시피 하는 특이한 고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기 중에는 밤새 쓴 글을 제물포고 문예반 선후배, 친구들과 돌려 읽고 서로 비판하면서 시인과 소설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74년 인하대 응용물리학과에 입학하면서 눈뜨게 된 어두운 사회 현실은 그를 목사도,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운동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이 많지 않았던 학교 형편 때문에 그는 입학한 그해 11월에 벌써 ‘동을 떠야(시위를 주동해야)’ 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뒤 인천 기독교 도시산업선교회에 참여한 그는 80년 9월 김동완 목사가 해고노동자들을 상대로 진행하던 성경공부 내용을 기록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뜹니다. “20명 정도가 모여서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떠오르는 생각을 나누는 방식이었는데, 매번 모임 때마다 충격을 받았어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얘기를 읽고 어떤 노동자가 이런 경험을 나눴어요.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잡혀가는 과정에서 안경이 깨졌는데, 유치장 옆방에 있던 사람이 ‘저 사람에게 안경을 줘라. 너네가 연행하다가 깨뜨리지 않았느냐’고 요구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는 거죠.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얘기였어요. 자신에게 손해되지 않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남을 돕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다라는 나눔이었죠. 이런 성경공부를 열 몇 번 했어요. 깨달음도 많았고, 인간적으로도 노동자들과 친해졌죠.” 81년 5월 경찰에 붙잡힌 하종강은 사흘 동안 통닭구이, 비녀꽂이 등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당한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불어 붙잡혀 왔지만, 자기도 누군가의 이름을 불어야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야만의 세월이었습니다. 다행히 실형 선고를 받지 않고 풀려난 그는 본격적으로 노동 상담과 교육에 뛰어들었고, 곧 “인천지역에서 구속되거나 해고되면 하종강부터 만나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주변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88년부터는 한울합동법률사무소의 한쪽 구석에 상담실을 개설했고, 이 공간은 94년 한울노동문제연구소로 발전해 2011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가 ‘조직사업’이 아니라 상담과 교육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88년 12월까지도 조직사업에 관여했어요. 그러나 저는 조직사업을 감당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했어요. 조직을 책임지려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올바른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내부의 적을 척결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해요. 조직 활동가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성실함이 그것이거든요. 저는 그게 힘들더라고요. 나쁘게 표현하면 고난의 선택은 피하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한 거죠.” -정파 간 갈등에서 비켜나고 싶었던 거군요? “시골 농공단지 작은 노동조합에서도 조직 내 갈등이 생겨요. 노동자들이 노조 활동을 시작해 일정 단계에 이르면 대부분 ‘노동운동이 이런 것인 줄 몰랐습니다’라고 얘기하죠.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그걸 이기면 계속 하는 거고, 못 이기면 나처럼 되는 거다.’ 제가 조직의 중심에 있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이에요. 민주노총에도 민주노동당에도 직함을 가진 적이 없죠. 조직에서 힘든 일을 감당하며 책임지는 게, 저처럼 상담하고 교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다만 제가 그걸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후배들에게 말했어요. 상담과 교육을 선택했다는 것은 운동권에서조차 출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조직사업을 계속 요구받으면 나는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상담과 교육은) 그래도 운동 주변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조직 노동운동, 인정할 건 인정해주자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대신에 민주노총, 한국노총 모두와 함께 사업하는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계시죠? “제가 진보신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민주노동당과 껄끄러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양쪽 사업을 다 합니다. 이선옥 작가 같은 사람은 최대공약수를 추구하는 제 방식을 좀 비판적으로 보는 편이에요. 제가 이른바 멘토라는 사람들하고 공동 저자로 책을 내면, ‘이런 계급성 없는 사람들과 왜 섞이냐?’고 하죠.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저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련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운동을 떠난 이후에도 노동운동에 남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직사업은 조직이 무너지면 굉장히 허무해지거든요. 그런데 상담은 고전적인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주변에 계속 생겨요. ‘내가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밤을 새우면 저 노동자가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들이 계속 있다는 게 저에게는 구원의 끈이나 마찬가지였어요.” 하종강은 자기 삶을 “대단하고 특별할 게 없는 일인데, 그저 남들보다 오래 했을 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자기 자랑을 피하는 대신, 상담과 교육에서 느끼는 보람을 한참 이야기했습니다. 인터뷰하던 날 낮에도 생협 활동가들을 만났는데, 우연히 옆자리에서 식사를 한 여성이 12년 전 영등포지역 제과회사에서 소모임 활동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여주는 홈페이지(www.hadream.com)에는 12년 전에 바로 그분과 함께 활동하며 적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활동했던 사람들은 그냥 살지 않아요. 12년 뒤에도 아이 엄마가 된 가정주부로 생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거죠. 옛날에 썼던 글들을 찾아서 함께 읽으면서 오늘 막 웃었어요. 의자놀이 ‘소란’이 있어도 이런 걸 생각하면서 이길 수 있는 거죠.” -해고노동자들을 돕겠다는 리버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사실 이 대립 구도는 <의자놀이>와 관계있는 것은 아니에요. 연대하는 시민들과 좌파 운동권 사이의 진영논리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요, 그럼에도 굳이 말한다면, ‘너희가 공지영처럼 쌍차에 4억을 줄 수 있냐’고 비난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1년쯤 전까지 쌍용차 노조에 지원한 금액이 제가 아는 것만도 40억원이 넘었으니까 지금은 훨씬 더 많을 거예요. 이건 희망버스가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조직 노동운동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그런 역할을 인정하고 더 잘하도록 도와줘야 해요. 그리고 지난번 총선에서 독자후보로 출마한 어떤 노동자가 인터뷰하면서 ‘민주당 후보가 참여정부 때 노동자들에게 잘못한 게 있었다고 한마디만 해도 나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의자놀이>에서도, 쌍차 문제를 다룬 동영상에서도 참여정부의 책임은 거의 지적하지 않아요. 한국의 리버럴들에게 연대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연대해줘서 고마운데 그런 면도 같이 생각해 달라는 거죠.”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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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갈등을 빚던 활동가가
음료수를 줘도 의심할 정도였죠
‘혹시 설사약 넣지 않았나’ 해서…
지금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어요 노동상담은 고전적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계속 생겨요
내가 이 서류를 붙들고 밤새우면
저 노동자가 밥을 먹는다는 게
제겐 구원의 끈이나 마찬가지죠 만약 그 트위트가 없었다면…
-트위터에서 ‘생불’로 불리시더군요. 원래 별명인가요? “트위터에서 <의자놀이>와 관련해서 제가 쓴 글이 정말 별로 없거든요. 그걸 보고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에요. 흔히 스스로 ‘잉여’라는 사람들이 제 주장에 많이 동조하는 편인데, ‘생불’이나 ‘사리 생기겠다’ 같은 말은 그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죠.” -의자놀이 논란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공지영 작가 인터뷰를 보니까, 이번 ‘소란’의 팩트는 하종강 이름을 빼먹었다는 것 하나뿐이다라고 얘기했더군요. 팩트가 하나 더 있어요. 왜 이선옥 작가 글이 포함된 하종강 글만 유독 공 작가가 쓴 글처럼 보이게 처리했느냐고 이유를 묻자, 공 작가가 트위터에서 우리를 ‘겉으로는 위선을 떨고 다니는, 내면으로는 온갖 명예욕과 영웅심 그리고 시기심에 사로잡힌, 남의 헌신을 믿지 않는, 한 번도 진심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규정한 거죠. 그게 더 중요한 팩트예요. 만약 그 트위트가 없었다면 이메일을 공개할 일도 없었을 거고, 거기서 그냥 끝이었어요. 시기심, 명예욕, 그리고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제가 살아온 인생 전체가 부정되는 거잖아요. 저의 첫 이메일은 ‘왜 그렇게 했냐?’고 궁금하다고 물어보는 차원이었어요. 표절, 저작권, 전량회수, 폐기, 사과 같은 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선옥 작가의 글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메일 표현에는 비난의 뉘앙스도 있었던 것 아닌가요? “이선옥 작가의 존재를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 한 것은 우리 짐작인 거죠.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직까지 답은 못 들었고요. 공 작가가 쌍용차와 관련한 책을 쓰겠다고 했을 때 언론 인터뷰 과정에서 ‘사태를 알수록 적의 실체가 없는 유령과의 싸움’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잘못하면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는 의견이었지요. 그래서 5월에 이선옥 작가가 ‘그렇지 않다’고 <프레시안>에 글을 썼는데, 만약 공 작가가 그 글을 읽었다면 좀 아프게 느꼈을 거예요. 공 작가의 시각에 대해 우려를 표한 이 작가의 그 글이 제가 보기에는 임팩트가 강했거든요. 그래서 그 글을 읽었는지, 읽었으면 이선옥 작가를 기억하는지, 이 작가가 쓴 글이 <의자놀이>를 쓸 때 반영이 되었는지 궁금했죠. 그리고 희망식당에서 이선옥 작가가 공지영 작가를 인터뷰한 적도 있어요. 그 글을 쓰고 인터뷰도 한 사람이 이선옥 작가라는 걸 공지영 작가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 질문을 이메일에 적었던 거죠. 그걸 이메일로 격식 있게 정리하다 보니, 간결하게 표현된 면이 있죠. 우리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이메일이 상대방을 분노하게 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어요. 공지영 작가가 사람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키워드가 질투였다는 것을 제가 알았다면 좀더 조심했을 거예요. 우리는 공지영 작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시기심과 명예욕 때문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보는 그 생각이 틀렸다. 그 생각을 고쳐 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문제에 비해 논란이 너무 커진 것 아닌가요? “애초에 이선옥 작가의 글을 제가 칼럼에 인용해서 생긴 문제여서 제가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그걸 ‘원죄가 있다’고 표현한 거죠, <의자놀이> 책이 10만권 팔렸는데, 그 책에 자기 글이 섞여 들어간 이 작가가 책을 내면 사람들은 ‘이선옥이 공지영의 글을 베껴 썼다’고 오해할 것 아니겠어요? 벌써 트위터에는 우리가 쓴 글이 공지영 작가 글이라고 추천돼 돌아다니고 있어요. 글 쓰는 사람에게는 치명적 피해죠. 이선옥 작가가 쌍용차 노동자들 때문에 많이 참은 거예요. 쌍용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니었으면 이선옥 작가는 좀더 선명하게 자기주장을 했을 겁니다. 출판사 쪽에서 ‘10만권 팔아서 쌍차에 4억 주고 싶다. 다른 욕심 없다’고 했고 그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에 최대한 말을 참고 있는 상황에서 한겨레 인터뷰가 팍 터진 거죠.” -‘내 인생은 의자놀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 같다’는 표현도 쓰셨죠. 트위터에서는 하종강, 이선옥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도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시는 이유는 뭔가요? “우리도 욕 많이 먹었어요, ‘당신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쌍용차 22명의 목숨보다 중요하냐?’부터 원색적인 쌍욕까지. 의자놀이 논란 이후에 우리가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앞에 한 번도 못 갔거든요.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된 거죠. 저는 쌍용차에 그렇게 자주 간 사람이 아니지만, 이선옥 작가는 자주 갔던 사람이거든요. 이 작가와 저는 의자놀이 논란 뒤, 콘서트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떠난 깊은 밤에 딱 한 번 대한문 앞에 갔었어요. 그게 이 일이 있기 이전과 이후의 가장 큰 차이죠.” ‘하종강이 프락치’라는 그때 그 모함
의자놀이 논란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인격에서 가장 자신 있다고 믿었던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비판당하는 이상한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종강은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추운 시기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는 30년 전 겪었던 비슷한 경험을 다시 떠올렸다고 합니다. “80년대 운동조직에서는 치열한 내부투쟁이 있었잖아요. 저하고 갈등을 빚던 활동가가 발제하는 저에게 음료수를 갖다주는데, ‘이걸 마셔야 하나? 혹시 설사약 같은 걸 넣은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저도 토론하다 보면 정말 설사약 같은 걸 먹이고 싶은 상대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저는 몰랐는데, ‘하종강이 프락치라는 소문이 있는데 근거가 있는 얘기냐?’고 묻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의도적 모함이었죠. 후배들은 전면전이라면서 총력을 동원해서 한번 붙어보자고 했지만, 제가 말렸어요. ‘내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내가 활동을 오래 계속하면 이 오해는 언젠가는 풀린다.’ 제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좀 그런 편이었어요. 그 여파로 제 주변에는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정보기관의 요직에 있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냥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이번 일에서 그때와 비슷한 억울함을 느끼시는군요? “네, 그 생각을 했죠. 노동운동을 하다 보면, 철학이 바뀌어서, 흔히 말해 변절해서 운동을 떠난 사람들보다는 동료들에게 받은 상처를 이기지 못해서 떠난 사람이 훨씬 많아요. 그래서 후배 활동가들에게도 ‘언젠가 상처를 받게 될 텐데 그때 꼭 이겨내야 오래 활동할 수 있다’고 얘기해요.” 1955년 인천에서 태어난 하종강은 목사가 되기로 서원하고 방학 때면 한탄강 근처 수도원에 들어가 살다시피 하는 특이한 고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기 중에는 밤새 쓴 글을 제물포고 문예반 선후배, 친구들과 돌려 읽고 서로 비판하면서 시인과 소설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74년 인하대 응용물리학과에 입학하면서 눈뜨게 된 어두운 사회 현실은 그를 목사도,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운동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이 많지 않았던 학교 형편 때문에 그는 입학한 그해 11월에 벌써 ‘동을 떠야(시위를 주동해야)’ 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뒤 인천 기독교 도시산업선교회에 참여한 그는 80년 9월 김동완 목사가 해고노동자들을 상대로 진행하던 성경공부 내용을 기록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뜹니다. “20명 정도가 모여서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떠오르는 생각을 나누는 방식이었는데, 매번 모임 때마다 충격을 받았어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얘기를 읽고 어떤 노동자가 이런 경험을 나눴어요.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잡혀가는 과정에서 안경이 깨졌는데, 유치장 옆방에 있던 사람이 ‘저 사람에게 안경을 줘라. 너네가 연행하다가 깨뜨리지 않았느냐’고 요구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는 거죠.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얘기였어요. 자신에게 손해되지 않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남을 돕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다라는 나눔이었죠. 이런 성경공부를 열 몇 번 했어요. 깨달음도 많았고, 인간적으로도 노동자들과 친해졌죠.” 81년 5월 경찰에 붙잡힌 하종강은 사흘 동안 통닭구이, 비녀꽂이 등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당한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불어 붙잡혀 왔지만, 자기도 누군가의 이름을 불어야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야만의 세월이었습니다. 다행히 실형 선고를 받지 않고 풀려난 그는 본격적으로 노동 상담과 교육에 뛰어들었고, 곧 “인천지역에서 구속되거나 해고되면 하종강부터 만나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주변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88년부터는 한울합동법률사무소의 한쪽 구석에 상담실을 개설했고, 이 공간은 94년 한울노동문제연구소로 발전해 2011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가 ‘조직사업’이 아니라 상담과 교육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88년 12월까지도 조직사업에 관여했어요. 그러나 저는 조직사업을 감당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했어요. 조직을 책임지려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올바른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내부의 적을 척결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해요. 조직 활동가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성실함이 그것이거든요. 저는 그게 힘들더라고요. 나쁘게 표현하면 고난의 선택은 피하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한 거죠.” -정파 간 갈등에서 비켜나고 싶었던 거군요? “시골 농공단지 작은 노동조합에서도 조직 내 갈등이 생겨요. 노동자들이 노조 활동을 시작해 일정 단계에 이르면 대부분 ‘노동운동이 이런 것인 줄 몰랐습니다’라고 얘기하죠.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그걸 이기면 계속 하는 거고, 못 이기면 나처럼 되는 거다.’ 제가 조직의 중심에 있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이에요. 민주노총에도 민주노동당에도 직함을 가진 적이 없죠. 조직에서 힘든 일을 감당하며 책임지는 게, 저처럼 상담하고 교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다만 제가 그걸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후배들에게 말했어요. 상담과 교육을 선택했다는 것은 운동권에서조차 출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조직사업을 계속 요구받으면 나는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상담과 교육은) 그래도 운동 주변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2009년 경찰의 쌍용차 노동자 진압 장면이 80년 광주에서와 똑같다며 강의 자료를 보여주고 있는 하씨.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대신에 민주노총, 한국노총 모두와 함께 사업하는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계시죠? “제가 진보신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민주노동당과 껄끄러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양쪽 사업을 다 합니다. 이선옥 작가 같은 사람은 최대공약수를 추구하는 제 방식을 좀 비판적으로 보는 편이에요. 제가 이른바 멘토라는 사람들하고 공동 저자로 책을 내면, ‘이런 계급성 없는 사람들과 왜 섞이냐?’고 하죠.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저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련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운동을 떠난 이후에도 노동운동에 남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직사업은 조직이 무너지면 굉장히 허무해지거든요. 그런데 상담은 고전적인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주변에 계속 생겨요. ‘내가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밤을 새우면 저 노동자가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들이 계속 있다는 게 저에게는 구원의 끈이나 마찬가지였어요.” 하종강은 자기 삶을 “대단하고 특별할 게 없는 일인데, 그저 남들보다 오래 했을 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자기 자랑을 피하는 대신, 상담과 교육에서 느끼는 보람을 한참 이야기했습니다. 인터뷰하던 날 낮에도 생협 활동가들을 만났는데, 우연히 옆자리에서 식사를 한 여성이 12년 전 영등포지역 제과회사에서 소모임 활동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여주는 홈페이지(www.hadream.com)에는 12년 전에 바로 그분과 함께 활동하며 적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활동했던 사람들은 그냥 살지 않아요. 12년 뒤에도 아이 엄마가 된 가정주부로 생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거죠. 옛날에 썼던 글들을 찾아서 함께 읽으면서 오늘 막 웃었어요. 의자놀이 ‘소란’이 있어도 이런 걸 생각하면서 이길 수 있는 거죠.” -해고노동자들을 돕겠다는 리버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사실 이 대립 구도는 <의자놀이>와 관계있는 것은 아니에요. 연대하는 시민들과 좌파 운동권 사이의 진영논리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요, 그럼에도 굳이 말한다면, ‘너희가 공지영처럼 쌍차에 4억을 줄 수 있냐’고 비난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1년쯤 전까지 쌍용차 노조에 지원한 금액이 제가 아는 것만도 40억원이 넘었으니까 지금은 훨씬 더 많을 거예요. 이건 희망버스가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조직 노동운동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그런 역할을 인정하고 더 잘하도록 도와줘야 해요. 그리고 지난번 총선에서 독자후보로 출마한 어떤 노동자가 인터뷰하면서 ‘민주당 후보가 참여정부 때 노동자들에게 잘못한 게 있었다고 한마디만 해도 나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의자놀이>에서도, 쌍차 문제를 다룬 동영상에서도 참여정부의 책임은 거의 지적하지 않아요. 한국의 리버럴들에게 연대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연대해줘서 고마운데 그런 면도 같이 생각해 달라는 거죠.”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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