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다는 자부를 하니까, 제가 생각하는 기준대로 가치를 부여해주고 싶어요.” 지난 16일에 만난 신대철씨는 후배들과 대중 사이에 놓이는 다리 구실을 하고 싶어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시나위’ 기타리스트 신대철
‘시나위’ 기타리스트 신대철
지난 7월7일 <탑밴드 2>의 16강에 진출한 밴드들한테는 김경호, 김도균, 신대철, 유영석, 네 심사위원 중에서 한 사람을 코치로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라면 피했을 코치는 신대철씨였습니다. 무서운 인상에다가 주관까지 강해 자기 색깔만을 강요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선수’들은 달랐습니다. 절반 가까운 팀이 그를 선택했고, 아예 “신대철이 아니면 기권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두운 건 나한테 배우면 돼요.” 마성이 느껴지는 그의 한마디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장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대중음악을 배척하며 청년기를 보낸 저의 문화적 토양이 너무나 척박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인터뷰 약속을 잡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벼락치기로 그의 삶과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방송 체질 아닌데도 ‘탑밴드’에 출연한 이유
1967년 신중현의 아들로 태어나 86년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타이틀로 시나위 1집을 내면서 이 땅에 본격적인 헤비메탈을 소개한 천재 미소년 신대철. 그는 처음부터 록의 전설이었습니다. 임재범, 김종서, 서태지가 시나위를 거쳐 또다른 전설로 성장한 것도 벌써 20년 전의 일입니다. 저와 동갑이지만 그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인터뷰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대표로 있는 서울 논현동 지하의 ‘에코브리드’ 스튜디오에서 먼저 사진을 찍은 뒤 길 건너 카페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흡연을 위해 자리잡은 야외 테이블은 자동차 소음으로 무척 시끄러웠습니다.
-요즘도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시나요?
“그러진 않고요. 음악은 원래 음기(陰氣)가 많아서 밤에 잘된다고는 하죠. 어둠이 좀 있어야 차분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음악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니잖아요. (음악 하는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죠.(웃음)”
-최근에 재미있게 본 영화나 책이 있나요, 즐기는 취미라도?
“<스티브 잡스> 자서전은 재밌었어요.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음악에 대한 생각도 설득력이 있었어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예술적 소양이 깊은가 보다 생각했죠. 온라인 게임, 바둑 등 좋아하는 취미가 많았는데, 시간이 한정된 상황에서 취미는 사치인 것 같아 요즘은 되도록 본업에 충실하려고 해요.”
-오디션 프로그램을 반대할 것 같은 이미지인데, 탑밴드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후배들을 위해서였죠. 대중음악계가 오랜 기간 아이돌 위주로 너무 한쪽에 치우쳐 있었잖아요. 거대 기획사에서 오디션 보고 어렸을 때부터 노래, 춤, 어학을 가르쳐서 기획상품처럼 말 잘 듣는 연예인을 키워내는 방식. 그게 꼭 나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아요. 밴드 음악은 자연발생적이죠. 비틀스도 그렇고, 레드 제플린도 그렇고 그냥 동네 친구들이거든요. ‘너 기타 잘 치지? 노래는 내가 할게!’ 하고 뭉쳐서 화음을 만들며 밑바닥부터 함께 성장하는 방식. 탑밴드는 그런 밴드들을 부각시키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서 이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96년 한국방송 <빅쇼>의 제목이 아예 ‘시나위 방송선언’이었을 정도로 과거에는 방송 출연을 잘 안하셨죠?
“대중적인 성공보다는 음악적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80년대 중반만 해도 사전검열, 방송심의 등 엄청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것도 싫었고요. 영혼의 자유가 중요한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방송을 해야 하나 생각했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방송이 원하는 게 있잖아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망가져주는 것. 그것도 하기 싫고.(웃음)”
-작년 10월에는 <놀러와>에도 나갔는데, 방송 출연의 균형점을 어디서 찾으세요?
“좋아서 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가진 정체성을 해치지 않는다면 괜찮은 정도?”
-탑밴드에서 선생님만의 심사 기준은 뭔가요?
“밴드는 음악에 대한 생각과 성장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한목소리 하나의 하모니를 내는 건데, 그걸 얼마만큼 창의적으로 표현하는가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하모니와 창의성. 이 친구들이 앞으로 굉장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데 우리가 몰라서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매번 굉장히 신중해져요.”
막상 얼굴을 맞댄 신대철은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수줍은 소년 같았습니다. 초조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오래 고민하다 띄엄띄엄 나온 답변은 대개 “하하하하하” 하는 크고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소음 때문에 녹취가 어렵다”고 하소연하자 그 뒤부터는 차가 지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목소리를 높여주었습니다. 화장지 세 통을 강매하는 할머니에게는 서슴없이 지갑을 열었습니다. 은근히 귀여운 캐릭터였습니다.
-신중현씨는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집에 들어가면 못 보던 아기가 하나씩 누워 있는 식이었다”고 회고하던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당사자로서 어떤 생각이 드나요?
“훌륭한 아버지는 아닌 거죠.(큰 웃음)”
-아버지가 사이키델릭에 심취해서 대마초를 하다가 75년 12월에 감옥을 가죠. 초등학교 3학년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저씨들이 집에 와서 집안 전체를 테이핑하며 훑더라고요. 대마초를 찾는 거였죠. 처음에는 뭐하는 건지, 경찰인지도 모르다가, 옆구리에 총을 찬 걸 보고는 경찰관인 줄 알았어요. 제가 ‘아저씨, 진짜 총 맞아요?’라고 물었던 기억이 나요. 얼마 후에 언론을 통해 발표되고 난리가 났죠. 굉장한 충격이었어요.”
-친구들에게 놀림도 받았겠네요.
“친구들에게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너희 아버지, 신중현이라매?’였어요.(웃음) 그래서 내성적이 된 것 같아요. 그때는 내성적인 정도가 아니라 말 한마디를 안 했으니까. 굉장히 어려웠죠. 어렸을 때는 ‘튀지 말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릴 때 제일 싫었던 말은
“너희 아버지가 신중현이라며?”
지금도 부담스러워요
내 기타는 잘해봐야 본전치기 앨범 내고 반응 좋다 싶으면
보컬 떠나고, 팀 깨지고
그땐 인내와 대화를 몰랐죠
나이 들면서나 생기는 거죠 서태지한테 담배심부름 시킨 유일한 사람 -그런데도 음악을 한 게 의외입니다. “그게 아이러니인데, 아버지가 감옥에 다녀오신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계속 집에만 계셨어요. 그 전에는 얼굴도 제대로 뵙지 못했거든요. 그때 아버지께 ‘기타 좀 가르쳐 주세요’ 그랬죠. 그게 음악 하게 된 계기예요. 새옹지마라고.(웃음)” -어린 나이인데 집안의 변화를 실감했나요? “큰 집에서 살다가 월세로 옮기고, 악기는 전당포에 잡히고, 어머니는 장롱의 자개 붙이는 일을 하셨어요. 저도 옆에서 도와드렸죠.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장남은 알잖아요, 장남은 알아요.” -늘 아버지와 함께 거론되는 게 부담스럽지 않나요? “당연히 부담스럽죠. 잘해봐야 본전치기. 그래도 동생들(신윤철, 신석철)보다는 낫죠. 저는 ‘신중현의 아들’이지만, 동생은 ‘신중현 아들에다가 신대철 동생’이기까지.(웃음) 미안한 생각이 들죠. 그래도 음악적으로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달랐다고 생각해요. 동생들도 그럴 거예요.” 신대철은 열살 때 이미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Stairway to Heaven)을 완벽하게 소화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김태원, 김도균과 함께 3대 기타리스트로 출연한 <놀러와>를 보면, 20대 때부터 끊임없이 신대철을 의식한 김태원씨와는 달리, 신대철은 다른 사람을 별로 경쟁자로 생각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19세기 옥스퍼드에 진학한 영국 귀족이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공부해 겨우 그 자리에 이른 사람을 살짝 내려다보는 것 같은 여유도 보입니다. 공기처럼 누리는 특권과 천재 소년의 피곤한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신해철이 하더라고요. 비유도 거의 같아요. 글쎄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웃음) 어렸을 때 친구들, 후배들 얘기를 요즘 들어보면 그때는 자기들이 아무리 해도 저를 따라올 수 없었대요. 어쩌면 당연하죠. 저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조건이었고 고급 정보를 많이 알았으니 아무래도 조금 빨랐겠죠. 하지만 어렸을 때 아무리 대단한 걸 해내도 결국 늙으면 비슷하더라고요.(웃음)” -국내 록 음악을 개척하고 선구적 음반을 냈다는 자부심이 있죠? “최초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전문 장르음악을 발표하는 길을 텄다고 얘기할 수는 있겠죠.” -전두환 정권 아래서 음악 하기란 어땠나요? “가사를 타이핑해서 심의위원회에 보내면 조금만 삐딱해도 ‘불가’가 나와요. 그러면 아예 음반에 싣지도 못하는 시절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죠.” -흔히 록은 저항에 기반한다고 하는데, 막상 록을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권위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 모순이 많죠. 핑크 플로이드의 ‘머니’는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자신들은 그 노래로 엄청난 부자가 됐잖아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도 비슷하죠. 저는 어릴 때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았어요. 69년 우드스탁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미국 국가 연주한 걸 보면 폭격 소리와 함께 전쟁의 참상을 표현해요.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던진 거죠. 그걸 보고 이게 록이구나 생각했어요. 인위적으로 ‘나 칼 있어’ 인상 쓰는 게 아니라, 지미 헨드릭스 같은 내공이 쌓이면서 남의 우러름을 받으면 그게 카리스마겠죠.(웃음)” -시나위가 앨범을 내고 기지개를 펴려고만 하면 보컬이 떠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92년 임재범, 김종서의 솔로 성공을 보고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텐데. “기획사도, 체계적인 관리도 없던 시절이죠. 매니저 혼자 운전도 하고 공연장 정리도 했으니까요. 20대 초반 젊은이들끼리 ‘야, 나가!’ ‘나 안해!’ ‘하지 마!’ 하다가 깨지는 분위기였어요. 형제보다 더 친한 친구들끼리 매일 동고동락하며 열심히 했는데 돈은 못 버니 당연히 앞날을 생각하며 다른 배를 탈 수 있는 거죠. 그때는 어렸으니까. 참을성은 나이 먹으면서 생기는 거죠.(웃음)” -서태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더니 “우리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심부름 안 시킨다”고 떠났다는 얘기는 유명하던데요? “대한민국에서 서태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사람은 저밖에 없죠.(웃음) 왜 그만두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담배 심부름이 싫다고 직접 말했어요. 저도 알았다고 했죠.” -김종서씨와는 84년에 헤어졌다가 87~90년 다시 작업했고, 또 갈라섰습니다. 굉장한 애증관계인데요. “밖에서 보기엔 치고받고 싸웠나 보다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스무살 언저리의 애들이었으니 인내, 배려는 없고 타협을 모르잖아요. 그렇게 헤어졌다가도 ‘이번 건 그 친구가 하면 좋겠는데?’ 그러면 또 같이하고 그랬어요. 바닥이 좁으니까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방법은 나이 들면서 배우는 거죠.”
잊혀진 아이돌 스타의 진짜 비극은…
-록의 전성기는 왜 그렇게 빨리 끝났을까요. 보컬들이 너무 빨리 돈과 명성을 추구한 건 아닐까요?
“그분들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고요. 발라드와 록으로 가는 길이 좀 달랐던 거죠. 저는 너무 외골수였고, 그분들은 대중이 원하는 걸 던져줄 줄 알았던.”
-멤버들이 떠난 이후 90년대 초반의 힘든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나요?
“입에 풀칠을 해야 했죠. 몇 년 동안 세션 일을 하면서 돈도 꽤 벌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차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제가 세션 한 음악을 들었죠. 제가 한 건 분명한데 언제 어디서 누구랑 한 건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연주도 되게 성의 없이 날림으로 한 티가 나고. 그걸 듣고 ‘이 길은 아니다’ 싶어서 그날로 그만뒀어요. 배고파도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
-90년대 중반에 재결성한 시나위도 보컬인 김바다가 떠나면서 다시 와해됐죠?
“오랫동안 나름 한길을 걸었는데 난관에 부닥치면서 내 능력으로 안 되는 일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죠.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해외 시장을 노크해보자는 꿈이 있었는데 번번이 좌절됐거든요. 일본계 회사들의 제안이 있을 때마다 성사 직전에 시나위가 깨졌으니까요. 세번 정도. 지금처럼 한류 분위기가 있기 전이었죠. 그러나 지금도 전세계를 대상으로 음악을 해야지 로컬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은 계속 해요. 나름대로 호연지기죠.”
-친구들처럼 대중이 원하는 걸 할걸, 후회하지는 않나요?
“저는 예전부터 폼 재는 게 좋았어요.(웃음) 대중이 원치 않더라도 기존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 제시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고.”
-탑밴드 출연자라면 모를까 대중은 그런 문법을 모르지 않나요?
“그래서 제 역할이 필요한 거죠. 밴드의 훌륭한 점이 있는데 대중은 모를 수 있잖아요. 그들의 가치를 부여하고, 대중에게 소개하는 일종의 다리 역할.”
-시나위 9집이 나온 지 벌써 6년인데 이제 해체된 건가요?
“제 인생과 함께 온 것이니 놓을 수는 없죠. 기회만 된다면 다시 하고 싶어요.”
-공연 끝나면 여자들이 줄을 서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풉, 웃으며) 그런 시기가 없었다고는 말 못하죠. 외국 밴드들한테 왜 음악 하느냐고 물으면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가 80퍼센트는 된다잖아요. 그런데 인생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건 불과 몇 년이거든요. 인기는 순간이에요. 그 이후의 과정이 더 힘들죠. 음반 새로 내고 나름 광고한다고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우연히 만난 후배가 난데없이 ‘형은 요즘 뭐해?’ 하고 물을 때 정말 괴로워요.(웃음) 인기 없을 때 어떻게 살 것이냐,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해요.”
-어떻게 살아야죠?
“나 꿀리는 것 없다는 자존감이 있어야죠. 연예인들이 인기를 먹고 사니까 인기 떨어지면 조급한 마음에 별짓을 다 하거든요. 잊혀진 아이돌 스타가 제작자 찾아와 울면서 저 좀 써주세요 부탁하는 것도 봤어요. 중심을 못 잡으면 그런 경우에 좌절하죠. 거기에 대비해서 음악적 성취에 집착했던 것 같기도 해요.(웃음) 중요한 건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요새 잘 못 나가는 것 알잖아?’ 하고 쉽게 받아들이면 되죠.”
까칠하게 “예, 아니오”만 하거나 수틀려 중간에 나갈까봐 미리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습니다. 그 얘기를 하자 신대철 자신도 “10년 전이라면 그랬을 거예요”라며 웃었습니다. 잦은 부침을 어렵게 극복해온 수줍고 질긴 중년의 여유와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가 나이 들면서 배웠다는 인내, 배려, 대화, 타협 같은 단어도 참 좋았습니다. 신대철뿐 아니라 우리 세대 전체가, 아버지의 유산과 부채에서 독립하고자 투쟁하던 시간을 어느새 한참 지나, 다음 세대를 위한 다리 노릇을 할 때가 되었다는, 조금은 서글픈 진실을 깨닫게 해준 인터뷰였습니다. 훌쩍 다가온 가을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나주 초등생 아버지 눈물 “정말 착한 아이…”
■ “김대중과의 화해가 죽음을 불러왔어”
■ 애플은 왜 자꾸 도둑맞았다는 걸까요?
■ 하버드 대학, 125명 집단 부정행위 ‘충격’
■ “문재인 굳히기냐 결선투표냐” 1일이 고비
■ 개와 고양이는 정말 앙숙일까
■ [화보] 우산의 수난시대
“너희 아버지가 신중현이라며?”
지금도 부담스러워요
내 기타는 잘해봐야 본전치기 앨범 내고 반응 좋다 싶으면
보컬 떠나고, 팀 깨지고
그땐 인내와 대화를 몰랐죠
나이 들면서나 생기는 거죠 서태지한테 담배심부름 시킨 유일한 사람 -그런데도 음악을 한 게 의외입니다. “그게 아이러니인데, 아버지가 감옥에 다녀오신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계속 집에만 계셨어요. 그 전에는 얼굴도 제대로 뵙지 못했거든요. 그때 아버지께 ‘기타 좀 가르쳐 주세요’ 그랬죠. 그게 음악 하게 된 계기예요. 새옹지마라고.(웃음)” -어린 나이인데 집안의 변화를 실감했나요? “큰 집에서 살다가 월세로 옮기고, 악기는 전당포에 잡히고, 어머니는 장롱의 자개 붙이는 일을 하셨어요. 저도 옆에서 도와드렸죠.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장남은 알잖아요, 장남은 알아요.” -늘 아버지와 함께 거론되는 게 부담스럽지 않나요? “당연히 부담스럽죠. 잘해봐야 본전치기. 그래도 동생들(신윤철, 신석철)보다는 낫죠. 저는 ‘신중현의 아들’이지만, 동생은 ‘신중현 아들에다가 신대철 동생’이기까지.(웃음) 미안한 생각이 들죠. 그래도 음악적으로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달랐다고 생각해요. 동생들도 그럴 거예요.” 신대철은 열살 때 이미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Stairway to Heaven)을 완벽하게 소화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김태원, 김도균과 함께 3대 기타리스트로 출연한 <놀러와>를 보면, 20대 때부터 끊임없이 신대철을 의식한 김태원씨와는 달리, 신대철은 다른 사람을 별로 경쟁자로 생각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19세기 옥스퍼드에 진학한 영국 귀족이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공부해 겨우 그 자리에 이른 사람을 살짝 내려다보는 것 같은 여유도 보입니다. 공기처럼 누리는 특권과 천재 소년의 피곤한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신해철이 하더라고요. 비유도 거의 같아요. 글쎄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웃음) 어렸을 때 친구들, 후배들 얘기를 요즘 들어보면 그때는 자기들이 아무리 해도 저를 따라올 수 없었대요. 어쩌면 당연하죠. 저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조건이었고 고급 정보를 많이 알았으니 아무래도 조금 빨랐겠죠. 하지만 어렸을 때 아무리 대단한 걸 해내도 결국 늙으면 비슷하더라고요.(웃음)” -국내 록 음악을 개척하고 선구적 음반을 냈다는 자부심이 있죠? “최초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전문 장르음악을 발표하는 길을 텄다고 얘기할 수는 있겠죠.” -전두환 정권 아래서 음악 하기란 어땠나요? “가사를 타이핑해서 심의위원회에 보내면 조금만 삐딱해도 ‘불가’가 나와요. 그러면 아예 음반에 싣지도 못하는 시절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죠.” -흔히 록은 저항에 기반한다고 하는데, 막상 록을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권위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 모순이 많죠. 핑크 플로이드의 ‘머니’는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자신들은 그 노래로 엄청난 부자가 됐잖아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도 비슷하죠. 저는 어릴 때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았어요. 69년 우드스탁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미국 국가 연주한 걸 보면 폭격 소리와 함께 전쟁의 참상을 표현해요.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던진 거죠. 그걸 보고 이게 록이구나 생각했어요. 인위적으로 ‘나 칼 있어’ 인상 쓰는 게 아니라, 지미 헨드릭스 같은 내공이 쌓이면서 남의 우러름을 받으면 그게 카리스마겠죠.(웃음)” -시나위가 앨범을 내고 기지개를 펴려고만 하면 보컬이 떠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92년 임재범, 김종서의 솔로 성공을 보고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텐데. “기획사도, 체계적인 관리도 없던 시절이죠. 매니저 혼자 운전도 하고 공연장 정리도 했으니까요. 20대 초반 젊은이들끼리 ‘야, 나가!’ ‘나 안해!’ ‘하지 마!’ 하다가 깨지는 분위기였어요. 형제보다 더 친한 친구들끼리 매일 동고동락하며 열심히 했는데 돈은 못 버니 당연히 앞날을 생각하며 다른 배를 탈 수 있는 거죠. 그때는 어렸으니까. 참을성은 나이 먹으면서 생기는 거죠.(웃음)” -서태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더니 “우리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심부름 안 시킨다”고 떠났다는 얘기는 유명하던데요? “대한민국에서 서태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사람은 저밖에 없죠.(웃음) 왜 그만두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담배 심부름이 싫다고 직접 말했어요. 저도 알았다고 했죠.” -김종서씨와는 84년에 헤어졌다가 87~90년 다시 작업했고, 또 갈라섰습니다. 굉장한 애증관계인데요. “밖에서 보기엔 치고받고 싸웠나 보다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스무살 언저리의 애들이었으니 인내, 배려는 없고 타협을 모르잖아요. 그렇게 헤어졌다가도 ‘이번 건 그 친구가 하면 좋겠는데?’ 그러면 또 같이하고 그랬어요. 바닥이 좁으니까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방법은 나이 들면서 배우는 거죠.”
신대철씨
■ 나주 초등생 아버지 눈물 “정말 착한 아이…”
■ “김대중과의 화해가 죽음을 불러왔어”
■ 애플은 왜 자꾸 도둑맞았다는 걸까요?
■ 하버드 대학, 125명 집단 부정행위 ‘충격’
■ “문재인 굳히기냐 결선투표냐” 1일이 고비
■ 개와 고양이는 정말 앙숙일까
■ [화보] 우산의 수난시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