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털남’ 김종배씨는 강인했다. 라디오에서,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 팟캐스트에서 촘촘한 논리를 이어가던 묵직한 저음이 공간을 채웠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이털남’ 김종배씨
독설, 아 그건 못해요
독설, 아 그건 못해요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도 정치 이야기만 하는 나라, 전국민이 시사평론가인 나라에서 가장 불쌍한 직업은 아마도 시사평론가일 겁니다. ‘심판’을 자임하지만 늘 ‘선수’로 의심받는 사람들이죠. 요즘 단연 주목받는 시사평론가는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이털남)의 김종배씨입니다. 그는 다들 끝난 것으로 생각했던 불법 민간인 사찰의 증거인멸 과정을 끈질기게 추적, 폭로함으로써 1인 매체가 갖는 차분하고도 무서운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를 출간한 이털남을 만나려고 홍대 앞의 개인 집필실을 찾았습니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은 ‘시사평론가는 뭘 먹고 사는가?’였습니다.
-최근 재미있게 보신 영화가 있나요?
“영화는 야밤에 텔레비전으로만 봐요. (한참 기억을 더듬다가) 무지 많이 보는데 왜 갑자기 생각이 안 나지? 주로 액션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웃음) 사실 놀 줄을 몰라요. 주말에도 항상 여기 나와서 글을 써요.”
-수염 기르는 게 남자들의 로망인데 보통은 가족의 반대로 못 하는데.
“기르는 게 아니라 안 깎는 겁니다. 대학 때부터 그랬어요. 어머니가 함께 사시는데 볼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시죠. 동네 창피하다고.(웃음)”
해망산 미군부대 청소원이었던 아버지
-매일 이털남을 진행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공중파처럼 생방송을 하면 근무시간이 일정할 텐데, 팟캐스트는 기술적으로 생방송이 어렵대요. 생방이 아니다 보니 출연자의 스케줄에 맞춰야 하고 시간대도 맘대로라 점심약속 잡기도 어렵죠. 저녁에는 거의 매일 글쓰기 강의가 있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힘들어요. 원래 술이 약한데다 좋아하지도 않아 다행이죠.”
-장진수 주무관을 독점 인터뷰하고 녹취록을 공개한 것이 이털남의 가장 빛나는 성과였죠. 어떻게 그를 알게 됐나요?
“2010년 가을 장진수씨 측과 처음 연락이 닿았는데 나중에 그쪽에서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접었어요. 당시는 엠비(MB) 정부가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라 장진수씨가 끝까지 갈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아니었죠. 돌이켜보면 장씨가 그때를 전후해서 관련자들과의 대화 녹음을 시작한 것 같아요. 올해 초 이털남을 시작한 지 한 달여 뒤에 제가 다시 연락해서 ‘당신이 정말 억울하고, 법적 해석을 다시 받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했죠. 마침 그때가 청와대 주선으로 경동나비엔에 장씨의 취업 알선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제가 조금 늦게 연락했으면 장씨는 거기 취업했을지 모르고 그러면 입을 열지 않았겠죠. 처음 만나 1시간쯤 얘기했는데 장씨가 팩트를 다 까지 않고 일부만 내놓는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이걸로는 한번 쟁점이 되고 끝이다. 모든 걸 다 깔 건지 덮을 건지를 정하라’고 하고는 일주일 동안 연락을 안 했죠. 일주일 후부터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었는데 기억도 희미하고 녹취록도 정리해야 해서 전체를 공개하는 데는 거의 40일이 걸렸어요. 어쨌든 저희가 공유한 건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었어요.”
언론·시사비평 20여년 수칙
“정파, 진영논리로 가지 않기”
정권 까고 톤 높이면 장사 돼도
확신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대단한 특종을 한 건데, 비결이 뭔가요? “일간지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시간을 다투는 특종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 지나면 남들도 다 알게 될 걸 먼저 터뜨리는 게 특종이 아니라, 내가 보도하지 않으면 묻혀버릴 걸 터뜨리는 게 특종이죠. 그런 점에서 특종은 발굴이고, 발굴을 이루는 힘은 집요함과 인내예요.” -이털남 듣다 보면 말도 굉장히 빠르고 상대방에 대한 반응도 큰 편입니다. “추임새가 좋나요?(웃음) 제가 충청도 출신인데도 말이 빨라요. 방송출연 많이 하던 시절에 어느 피디가 ‘진행자는 장구 치는 고수이고, 주인공은 출연자다. 가장 유능한 진행자는 출연자가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맞는 얘기죠. 이털남은 출연자의 얘기를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게 무엇보다 장점이에요.” -충남 대천에서 태어나셨죠?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부모님은 모두 초등학교도 안 다닌 무학이셨어요. 대천 시내에서 해수욕장으로 가다 보면 해망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미군부대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미군부대 조성할 때 인부로 일하시다가 청소원으로 눌러앉으셨죠. 우리 마을도 그 산에 있었는데 수도가 없어서 제가 물지게도 많이 지고 다녔어요. 그런데 카터 대통령 때 주한미군 철수 논란이 벌어지면서 미군부대가 철수를 했고 거기 일하던 사람들은 일거에 실업자가 됐어요. 그때 상당수가 서울로 떠났는데 아버지는 황소 같은 면이 있어서 남의 논도 소작하고 겨울이면 대천 특산물인 김 양식도 하면서 더 버티시다가 결국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모두 서울로 올라왔죠.” -미군부대 청소원 집 아들이 엔엘(NL) 운동권이 된 셈이군요? “영향이 없진 않았죠. 시골이니까 우리 집이 꽤 넓어서 미군들에게 세를 줬는데 한 미군이 저를 예뻐해서 미국으로 입양해 가 공부를 가르치겠으니 달라고 한 적도 있대요. 소풍 때도 김밥 싸간 적이 없고 늘 시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을 싸들고 다녔죠. 미군이 본토로 돌아갈 때 버림받은 누나들이 우는 걸 많이 봐서인지 미군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건 맞아요.” -어려운 형편인데도 대학 진학은 할 수 있었군요. “제가 3남1녀 중 셋째인데 남매 중 대학에 간 건 저밖에 없어요. 상고 나와서 바로 건설회사 경리로 취직한 누나가 서울에 자취하면서 동생 한명을 가르치겠다고 저와 동생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저를 끌어올렸죠. 그래서 저는 중2 때 먼저 서울에 올라왔고 대학에도 진학했어요. 동생은 제가 공부시켰어야 하는데 대학 때 데모하느라 바빠서 그러지를 못했죠. 공부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던 동생은 아예 학력고사를 보지도 않았어요.” -언론인이 되려고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한 건가요? “원래는 국문과 나와 교사로 일하며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소설이라면 예술 아니냐? 예술 하면 배곯는다던데’ 걱정하시더군요. 그 얘기 듣고 국문과를 포기하니 막상 갈 데가 없더라고요. 정외과로 가려고 했는데 친한 친구 둘이 자기들도 거기 쓴다고 저는 다른 과 쓰라는 거예요. 옆에 보니 신방과가 있길래 신방과를 썼죠. 걔들은 둘 다 떨어졌어요. 백퍼센트 실화예요.(웃음)” 누나 시집밑천으로 대학 가서 데모만 -대학에서는 학보사 편집장을 했죠? “선배 꾐에 빠져서 운동권 조직에 들어갔고, 학보사 하라고 해서 했죠. 그런데 심정적으로 엔엘하고는 안 맞았어요. 강철의 품성론을 보면서 숨 막혀 죽을 것 같았죠. 제가 품성 나쁘다고 욕도 많이 먹었거든요.(웃음) 대학 졸업하고 주사파하고는 연을 끊었습니다.” -집에서 말리지 않았나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일자무식인 부모님이지만 시대상황은 다 알고 계셨던 거죠. 가두시위에서 붙잡혔다가 훈방조치돼 집에 들어가니까 ‘몸이 축났으니 이거라도 먹어라’ 하시면서 불고기를 내놓으시더군요. 가끔 ‘앞에 서면 위험하니까 뒤에 서라’고는 하셨죠.” -집안도 어려운데 운동권 하면서 갈등은 없었나요? “누나가 시집가려고 적금 든 걸 깨서 대학 입학금을 내줬어요. 그 후에는 노가다, 알바, 웨이터 뛰면서 집에서는 10원 한 장 가져다 쓰지 않았죠. 한번은 학보사에 나오는 장학금 40만원을 선배들이 회의를 해서 형편 어려운 제게 주었는데도 여전히 15만원이 부족했어요. 집에 가서 얘기는 못 하겠고, 등록 못 하면 제적되는 마지막 날 학교 뒤 노고산에 홀로 올라가 소주 3병을 나발 불었죠. 주량이 1병인데 그날은 3병을 마셔도 취하지를 않더라고요. 그리고 돌아와 짐을 싸는데 도서관에서만 살던 동기 놈이 찾아와 하얀 봉투를 내밀었어요. 장학금 15만원을 받았는데 저를 주겠다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햇살이 쫙 비췄지만 덜컥 받을 수는 없잖아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용기가 없어서 데모 한번 못 가서 항상 미안했다, 특히 너한테. 우리 집은 등록금 걱정은 없으니 네가 쓰라’고 하더군요. 그때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대학 생활 접었죠.” 주변에서 정치 안하냐 물어오면
생각나는 대학 동창의 말
“두고보자, 데모경력 파나 안파나”
야인으로 살다 죽을 운명인지… 1988년 서강대 신방과를 졸업한 김종배는 89~90년 <기자협회보> 기자, 92년 민언련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활동가, 93~96년 전교조 산하 <우리교육> 기자, 97~2001년 <미디어오늘> 편집차장, 편집국장 등 주로 언론비평 분야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습니다. 2011년 5월 ‘외압에 의해’ 하차할 때까지 10년 반 동안 <문화방송>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작가와 뉴스브리핑 담당자로 이름을 날렸고,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각종 매체에도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꽤나 성공적으로 보이는 공식 경력 사이사이에, 운동 현장 투신, 소설 공부, 애니메이션 사업 등 적지 않은 실패 경험도 갖고 있습니다. 운영진과의 충돌로 회사를 그만둔 적도 있고, 가난과 부모님의 질병 때문에 새로운 진로를 모색한 것도 여러 번입니다. 미디어오늘 시절에는 김현철의 광화문팀 비리를 추적하던 중 녹내장에 망막박리까지 와서 대수술을 해야 했고, 그 여파로 지금도 양쪽 눈에 각각 20%, 40%의 시신경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92년 가을 계간지 <저널리즘>에 기고한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는 글이 98년의 ‘오보전시회’ 사건과 조선일보사의 명예훼손 고소로 이어지면서 2006년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10여년의 설화도 겪었습니다. 누구보다 자주 그만뒀지만 항상 언론으로 돌아온 걸 보면 그게 천직이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언론비평지에서 주로 기자생활을 했는데 그 경험을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아요. 제도언론 기자들이 부서나 출입처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면, 저는 언론판 전체를 넓게 봤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몰라도 언론비평지가 정파적이 되어서는 안 되죠. 데스크 할 때 후배들에게도 팩트만 가지고 가야지 진영논리로 가면 안 된다고 강조했어요. 한겨레라도 잘못하면 비판하라, 조중동이라도 잘했으면 칭찬하라 그랬죠.”
-동업자를 비판하는 작업이 힘들지 않았나요?
“동아일보 정치부장이 세풍자금 받은 걸 미디어오늘에서 기사화할 때는 상당한 풍파를 겪었어요. 뛰어난 기자로 존경받던 선배라서, 이름을 알 만한 진보적인 원로 언론인도 간접적으로 연락을 하고. 저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어요. 그때는 정말 괴로워서 낮술을 엄청 먹었어요. 그렇다고 덮으면 저널리즘 원칙에 어긋나는 거잖아요?”
‘진영’ 틈바구니에서 살기의 어려움
-이번 책도 보수와 진보를 함께 비판했던데, 요즘 그러면 책도 잘 안 팔릴 텐데요.
“이털남에서 새누리당 의원을 부르면 욕하는 댓글이 막 올라와요. 니네가 변했다는 둥 새누리당에 줄 섰냐는 둥. 그런 점에서 팟캐스트를 미디어 현상으로 봐야 할지, 정치 현상으로 봐야 할지는 아직 분명치 않아요. 팟캐스트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분들만 듣거든요. 독자층이 뚜렷해서 콘텐츠 전략 짜기는 상대적으로 수월해요.
톤을 올리고 새누리당과 이명박 정권 까는 아이템만 계속 가고 감정 자극할 독설을 조금 섞으면 장사가 될 수 있죠. 그런데 저는 그걸 못하겠어요. 거창한 논리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못하겠어요. 책도 잘 안 팔릴지 모르죠. 그래도 장사를 위해서만 살 수는 없잖아요. 진영논리에 귀의하는 건 쉬운데 진영의 틈바구니에서 사는 건 어렵다고 느껴요.”
-시선집중의 손석희 교수와는 오랜 세월 호흡이 잘 맞았나 봐요?
“손석희 선배는 자기 관리가 엄격하고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한번도 단둘이 술을 마신 적이 없어요. 흉금을 터놓은 적도 없고, 그분 표현대로라면 ‘데면데면’했죠. 가끔 농담 따먹기나 하는데 방송만 하면 이상하게 호흡이 맞았어요. 왜 그랬는지 설명하라면 못하겠어요.”
-그런데도 작년에 갑자기 잘렸죠?
“왜 자르는지 피디도 잘 몰랐어요. 나중에 들으니 이승복 사건으로 5년 전에 무죄 받은 것과 프레시안에 칼럼 쓰는 걸 위에서 문제 삼았더군요. 프레시안이 해적매체도 아닌데, 그저 성향이 맘에 안 든다는 거지.”
-우리 사회의 극한적 대립 속에서 까칠한 사람들만 발언하게 되는 면도 있지 않나요?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는 사람에게는 공개된 팩트 수준에서 판단을 내린 다음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의무가 있어요. 새로운 팩트가 발견되거나 잘못이 있으면 그건 또 인정을 해야죠. 그래야 교주가 안 생기거든요. 완벽한 진리는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닫기 시작하면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만 주도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죠. 자기 교조에 빠져서 똥고집 부리는 걸 경계하면서도 확신을 갖고 발언해야 해요.”
-주류 언론사가 못하는 특종을 많이 해냈는데, 비결이 있나요?
“특종은 단순히 발품을 팔아서 되는 게 아니라, 정보제공자의 이해관계와 그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환경이 맞아떨어져야 나오는 거예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취재원을 계속 만나고 관리하고 관계를 성숙시켜야 해요. 한가지만 파고들 수 있도록 언론사가 기자의 동선을 만들어줄 여유도 있어야죠. 기자 직업이 갈수록 직장인화하고 거기서 필연적으로 배태되는 관료주의가 특종을 막는다는 생각도 들어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사람이 자기 숟가락은 갖고 태어난다잖아요. 제 삶이 힘들기는 해도 불만은 없었어요. 부모를 원망해본 적도 없어요. 1학년 농활 가기 전에 <한국경제의 전개과정>으로 공부를 하는데 제 아버지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어요. 정말 황소같이 일했던 분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단 한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고, 도박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리 못사나, 이건 아버지 책임이 아니다 생각했어요.”
-시사평론가가 아니면 뭐가 됐을까요?
“제가 승부욕이 엄청나게 강해요. 만약 대기업이나 경쟁사회 가서 특유의 승부욕이 발동됐다면 어찌 됐을지 안 봐도 비디오예요.(웃음) 대학 때 7살 많은 동급생 형이 있었어요. 선술집에서 같이 술을 마시다가 그 형이 ‘니네가 데모하는 거는 다 좋은데 졸업하고 보자. 데모 경력을 파는지 안 파는지 지켜보겠다’고 해서 무지하게 싸웠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 형의 억양과 표정을 마음에 담고 살아요. 정치평론 하다 보니 주위에서 정치 안 하느냐고 하는데, 그때마다 그 형 얘기를 떠올려요. 평생 야인으로 살다가 죽는 게 제 운명인가 보다 생각해요. 빡빡한 인생이지만 전혀 후회는 없어요. 후회한다고 뭐가 나오나요?”
생계라는 눈앞의 현실과 싸우는 생활인이라는 점에서 시사평론가도 보통사람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비록 돈 버는 일에는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김종배는 세월의 힘을 이겨내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지켜냈습니다. 진영논리의 틈바구니에서 그가 잘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를 한권 더 주문했습니다.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정파, 진영논리로 가지 않기”
정권 까고 톤 높이면 장사 돼도
확신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대단한 특종을 한 건데, 비결이 뭔가요? “일간지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시간을 다투는 특종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 지나면 남들도 다 알게 될 걸 먼저 터뜨리는 게 특종이 아니라, 내가 보도하지 않으면 묻혀버릴 걸 터뜨리는 게 특종이죠. 그런 점에서 특종은 발굴이고, 발굴을 이루는 힘은 집요함과 인내예요.” -이털남 듣다 보면 말도 굉장히 빠르고 상대방에 대한 반응도 큰 편입니다. “추임새가 좋나요?(웃음) 제가 충청도 출신인데도 말이 빨라요. 방송출연 많이 하던 시절에 어느 피디가 ‘진행자는 장구 치는 고수이고, 주인공은 출연자다. 가장 유능한 진행자는 출연자가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맞는 얘기죠. 이털남은 출연자의 얘기를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게 무엇보다 장점이에요.” -충남 대천에서 태어나셨죠?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부모님은 모두 초등학교도 안 다닌 무학이셨어요. 대천 시내에서 해수욕장으로 가다 보면 해망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미군부대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미군부대 조성할 때 인부로 일하시다가 청소원으로 눌러앉으셨죠. 우리 마을도 그 산에 있었는데 수도가 없어서 제가 물지게도 많이 지고 다녔어요. 그런데 카터 대통령 때 주한미군 철수 논란이 벌어지면서 미군부대가 철수를 했고 거기 일하던 사람들은 일거에 실업자가 됐어요. 그때 상당수가 서울로 떠났는데 아버지는 황소 같은 면이 있어서 남의 논도 소작하고 겨울이면 대천 특산물인 김 양식도 하면서 더 버티시다가 결국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모두 서울로 올라왔죠.” -미군부대 청소원 집 아들이 엔엘(NL) 운동권이 된 셈이군요? “영향이 없진 않았죠. 시골이니까 우리 집이 꽤 넓어서 미군들에게 세를 줬는데 한 미군이 저를 예뻐해서 미국으로 입양해 가 공부를 가르치겠으니 달라고 한 적도 있대요. 소풍 때도 김밥 싸간 적이 없고 늘 시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을 싸들고 다녔죠. 미군이 본토로 돌아갈 때 버림받은 누나들이 우는 걸 많이 봐서인지 미군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건 맞아요.” -어려운 형편인데도 대학 진학은 할 수 있었군요. “제가 3남1녀 중 셋째인데 남매 중 대학에 간 건 저밖에 없어요. 상고 나와서 바로 건설회사 경리로 취직한 누나가 서울에 자취하면서 동생 한명을 가르치겠다고 저와 동생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저를 끌어올렸죠. 그래서 저는 중2 때 먼저 서울에 올라왔고 대학에도 진학했어요. 동생은 제가 공부시켰어야 하는데 대학 때 데모하느라 바빠서 그러지를 못했죠. 공부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던 동생은 아예 학력고사를 보지도 않았어요.” -언론인이 되려고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한 건가요? “원래는 국문과 나와 교사로 일하며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소설이라면 예술 아니냐? 예술 하면 배곯는다던데’ 걱정하시더군요. 그 얘기 듣고 국문과를 포기하니 막상 갈 데가 없더라고요. 정외과로 가려고 했는데 친한 친구 둘이 자기들도 거기 쓴다고 저는 다른 과 쓰라는 거예요. 옆에 보니 신방과가 있길래 신방과를 썼죠. 걔들은 둘 다 떨어졌어요. 백퍼센트 실화예요.(웃음)” 누나 시집밑천으로 대학 가서 데모만 -대학에서는 학보사 편집장을 했죠? “선배 꾐에 빠져서 운동권 조직에 들어갔고, 학보사 하라고 해서 했죠. 그런데 심정적으로 엔엘하고는 안 맞았어요. 강철의 품성론을 보면서 숨 막혀 죽을 것 같았죠. 제가 품성 나쁘다고 욕도 많이 먹었거든요.(웃음) 대학 졸업하고 주사파하고는 연을 끊었습니다.” -집에서 말리지 않았나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일자무식인 부모님이지만 시대상황은 다 알고 계셨던 거죠. 가두시위에서 붙잡혔다가 훈방조치돼 집에 들어가니까 ‘몸이 축났으니 이거라도 먹어라’ 하시면서 불고기를 내놓으시더군요. 가끔 ‘앞에 서면 위험하니까 뒤에 서라’고는 하셨죠.” -집안도 어려운데 운동권 하면서 갈등은 없었나요? “누나가 시집가려고 적금 든 걸 깨서 대학 입학금을 내줬어요. 그 후에는 노가다, 알바, 웨이터 뛰면서 집에서는 10원 한 장 가져다 쓰지 않았죠. 한번은 학보사에 나오는 장학금 40만원을 선배들이 회의를 해서 형편 어려운 제게 주었는데도 여전히 15만원이 부족했어요. 집에 가서 얘기는 못 하겠고, 등록 못 하면 제적되는 마지막 날 학교 뒤 노고산에 홀로 올라가 소주 3병을 나발 불었죠. 주량이 1병인데 그날은 3병을 마셔도 취하지를 않더라고요. 그리고 돌아와 짐을 싸는데 도서관에서만 살던 동기 놈이 찾아와 하얀 봉투를 내밀었어요. 장학금 15만원을 받았는데 저를 주겠다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햇살이 쫙 비췄지만 덜컥 받을 수는 없잖아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용기가 없어서 데모 한번 못 가서 항상 미안했다, 특히 너한테. 우리 집은 등록금 걱정은 없으니 네가 쓰라’고 하더군요. 그때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대학 생활 접었죠.” 주변에서 정치 안하냐 물어오면
생각나는 대학 동창의 말
“두고보자, 데모경력 파나 안파나”
야인으로 살다 죽을 운명인지… 1988년 서강대 신방과를 졸업한 김종배는 89~90년 <기자협회보> 기자, 92년 민언련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활동가, 93~96년 전교조 산하 <우리교육> 기자, 97~2001년 <미디어오늘> 편집차장, 편집국장 등 주로 언론비평 분야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습니다. 2011년 5월 ‘외압에 의해’ 하차할 때까지 10년 반 동안 <문화방송>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작가와 뉴스브리핑 담당자로 이름을 날렸고,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각종 매체에도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꽤나 성공적으로 보이는 공식 경력 사이사이에, 운동 현장 투신, 소설 공부, 애니메이션 사업 등 적지 않은 실패 경험도 갖고 있습니다. 운영진과의 충돌로 회사를 그만둔 적도 있고, 가난과 부모님의 질병 때문에 새로운 진로를 모색한 것도 여러 번입니다. 미디어오늘 시절에는 김현철의 광화문팀 비리를 추적하던 중 녹내장에 망막박리까지 와서 대수술을 해야 했고, 그 여파로 지금도 양쪽 눈에 각각 20%, 40%의 시신경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92년 가을 계간지 <저널리즘>에 기고한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는 글이 98년의 ‘오보전시회’ 사건과 조선일보사의 명예훼손 고소로 이어지면서 2006년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10여년의 설화도 겪었습니다. 누구보다 자주 그만뒀지만 항상 언론으로 돌아온 걸 보면 그게 천직이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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