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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두 권의 자서전으로

등록 2009-10-01 17:14

왼쪽부터 문동환 목사, 백기완 소장.
왼쪽부터 문동환 목사, 백기완 소장.




■ 문동환 목사 ‘떠돌이 목자의 노래’

온세상 떠돌이의 ‘깨달음’ 소망하며

평생을 진보 신학자로, 사회운동가로 살아온 문동환(88·사진) 목사가 회고록 <떠돌이 목자의 노래-문동환 자서전>(삼인)을 탈고했다. 책에는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과 기독 선교의 중심지이던 북간도 명동촌에서 나고 자란 어린 시절부터 1991년 4년간의 짧은 정치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가 통일운동을 이어가기까지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1960~80년대 반독재운동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한신대학을 함께 만든 이야기, 1976년 유신정권의 긴급조치를 비판한 3·1민주구국선언으로 인한 투옥과 옥중생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한국 현대사가 요구했던 시대적 화두의 한가운데에서 살아온 이의 자서전은 낱낱이 그대로 역사의 중요한 기록이다.


〈떠돌이 목자의 노래〉
〈떠돌이 목자의 노래〉
28일 서울 사직동 비탈진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수도교회. 젊은 시절 생명문화공동체를 꿈꾸며 목회자로 일했던 터전에서 문 목사를 만났다. 출판기념회를 위해 잠시 귀국한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곡진했던 삶의 순간들을 들려줬다. 18년 남짓 미국에 체류중인 그는 최근까지도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해외공동위원장으로 일했다.

“아버지(문재린 목사)가 돌아가시기 전에 ‘원산은 지났다, 아직 평양은 멀었니?’ 하셨어요. 마지막 말씀이 통일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었지요. 우리 형(문익환 목사)은 미친 듯이 북조선에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미국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고국에 와 있었지요.”

1921년 태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사가 되겠다’는 어릴 적 꿈을 가슴에 품었던 젊은이는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다 긴 방황을 하게 된다. “<요한복음>을 보면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갈 수 없다’란 구절이 있거든요. 인간의 아들이 어찌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 회의했어요. 7년 동안 방황했어요. 설교해 달라 하면 딱했지요. 스스로 예수의 신성을 못 믿는데요. 복음서 형성과정을 파고들면서 그 문제가 풀렸어요.”

고난과 믿음의 ‘자화상’ 한국현대사 중요 기록
이주노동자 문제 고민…“더불어 살려면 꼭 해결”


그는 그즈음 신학에서 교육으로 나아간다. “해방 직전에 간도 만보산이라는 곳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어요. 떠돌이 농민들이 사는 곳이었어요. 춥기가 이만저만 아니었죠. 아이들 얼굴이 언 감자 같았어요. 아이들 얼굴에 웃음이 피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도무지 웃지를 않아요. 그런데 석 달째, 한 아이가 방긋 웃어요. 돌아봤더니, 봄 민들레처럼 아이들이 웃고 있잖아요. 그 뒤론 아이들 변하는 게 놀라웠어요. 아픔에 가까이 가서 나를 주면, 거기서 뭔가 창출된다는 겁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같이했던 숱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회고록은 3·1민주구국선언으로 문익환·안병무 목사, 문정현 신부,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구속되어 서울구치소로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6·15 선언을 하는 걸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며 미친 듯이 춤을 추었어요.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 북조선이 살아야 우리도 사는 겁니다. 6·15가 그런 정신이라고 난 믿어요. 미국 내 동포들에게 이 정신을 알리고 확산시키고자 평화통일 전선에 힘을 보탰지요.”

그는 지금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로 말미암은 이주노동자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갈수록 뿌리뽑히고 가난해지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를 꿰뚫는 화두는 ‘떠돌이 신학’이다. ‘떠돌이’는 노동자·농민 등 민중 안에도 어쩌면 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노동자 가운데서도 비정규직이 밤낮 밀려나잖아요.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은 이주노동자 문제를 푸는 데서 나와요. 지금 온세계의 떠돌이들도 점점 소망이 없음을 알아가고 있어요. 때가 되면 집단적인 ‘각’(깨달음)이 생겨요. 집단적인 ‘각’은 집단적인 ‘단’(끊음)을 해요. 그것을 끊고 새것이 나와요. 역사는 그렇게 발전합니다.”

글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백기완 소장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예전 피 끓던 청춘들, 지금은 어디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발터 베냐민이 그랬다. “이야기꾼은 자기 삶의 심지를 이야기의 불꽃으로 완전히 연소시키는 사람이다.” 백기완(76·사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런 이야기꾼의 정의에 누구보다 꼭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는 ‘남한 땅 3대 구라’의 한 명으로 불릴 만큼 빼어난 이야기 솜씨를 자랑해왔는데, 그 공인받은 입심의 원천으로 사람들은 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인각된 그의 70여년 생애를 지목하곤 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겨레출판)는 삶이 곧 이야기였던 이야기꾼 백기완의 자전적 이야기집이다. 구월산 자락을 누비던 황해도 맨발소년이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일념에 무작정 상경한 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사회와 역사에 눈 뜨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를 거치며 통일·민중운동의 거목으로 성장하기까지 격정과 분노, 환희와 좌절의 나날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29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백 소장은 “날이 밝자마자 이슬처럼 사라질 운명의 책”이라고 멋쩍어했다.

“사실 쓰고 싶지 않다고 꽁무니를 뺐어. 나를 키운 건 밥도 아니고 글묵(책)도 아냐. 좌절과 절망이 나를 키운 거야. 그러다보니 몸뚱이가 어떻겠어? 온전치 못하고 한쪽으로 기우는 게 당연해. 이걸 글로 옮기려니 난들 편했겠어?”

그의 말대로 책에는 슬픔과 고통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명절에도 곡식이 없어 군불만 때던 어릴 적 이야기며, 남산 숲에 숨어 있다 등교하는 학생들 도시락을 뺏어 먹던 ‘눈물의 주먹’으로 불리던 10대 시절, ‘달동네’란 우리말을 지어 불렀다가 일본말 안 쓰는 빨갱이로 몰려 천장에 매달린 기가 막힌 사연 등이 그렇다. 시국사건으로 체포령이 떨어져 잠행하던 시절, 강원도 어촌의 수배자 전단지에서 큰딸(백원담 성공회대 교수)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굵은 눈물을 쏟은 사연 등에선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묻어난다. 장준하·문익환 등 유명을 달리한 지인들, 뒷날 대통령과 장관, 고위 정치인으로 행로가 갈린 옛 동지들과의 각별했던 인연 역시 시선을 붙든다.

좌절·고통의 인생역정 잊힌 우리말로 살려내
해방사상 정리 ‘절박감’…“죽기살기로 버텨”

고유명사를 제외하곤 모든 어휘를 순우리말로 풀어쓴 대목 또한 인상적인데, 그중에는 ‘맞대’(대답), ‘고칠데’(병원), ‘오랏꾼’(경찰) 처럼,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말들도 있지만 ‘랭이 날래 듬직’(민중해방 사상), ‘검뿔빼꼴’(제국주의)처럼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사용하지 않아 잊혀진 우리말을 찾아낸 것도 있지만, 신조어나 전문용어의 경우엔 백 소장이 직접 만든 것도 적지 않은 탓이다. “그늘에 가려지고 땅에 묻히고, 그런 무지랭이 말들이 엄청나게 많아. 우리말 사전이란 게 있지만 바닷가에서 모래 한 줌 쥔 것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어. 나는 그런 말들을 찾아내고, 없으면 빚어내려고 했어.”

근황을 묻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티는 중”이라고 했다. 눈뜨면 들려오는 소식이 못내 불편하고 못마땅하지만, 나이를 핑계 삼아 뒷방에 물러앉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글을 쓴다고 했다. 우리 옛이야기 안에 담긴 민중해방 사상의 뿌리를 남은 생애 동안 정리해둬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사실 우리처럼 옛날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흔치 않아. 신화, 전설, 설화 그런 거. 사랑방에 모여 나누던 이야기들. 나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릴 거 같단 말이지.”

그는 자신의 책을 지금의 10대나 대학생 세대들보다는 20~30년 전 거리를 함께 누비던 중·장년 세대가 읽어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들은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나 <장산곶매 이야기> 등의 책을 통해 ‘운동가 백기완’보다 ‘이야기꾼 백기완’을 먼저 만난 세대이기도 하다.

“그때 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내 ‘옥색치마’를 읽고 눈물 흘리던 젊은이들,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거야? 우리 이 책 읽고 같이 소리 내어 엉엉 울어보자 이거야.”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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