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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철학하는 첼리스트, 한국엔 없는 이유

등록 2009-06-26 19:15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한 학기에 과목당 20권 이상의 책을 숙독하도록 요구한다.”

안타깝게도 국내의 얘기가 아니라 미국 대학의 풍경이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겪은 일이다. 그녀에 따르면, 미국 대학의 인문학 전공자는 하루 최소 5시간 이상 독서를 해야 하며 “이 과정을 거쳐 학생은 이 세계의 어떤 문제와 논점에 대해서도 종합적 위치에서 자신만의 ‘조감도’를 갖게 된다”고 썼다.

2005년 3월에 어느 신문에 기고한 내용인데 장한나는 당시 하버드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철학과에 다니는 첼리스트? 국내의 예술 교육 풍토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문화 선진국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돈후한 지휘를 들려준 카를 뵘은 법학 박사였고 활달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철학 전공자이며 무대 위의 제사장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취리히 공대 출신이다. 장한나에게 뛰어난 음악가가 되기 위해 인문학을 전공하라고 권유한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는 의학 박사이자 문학, 인류학,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문사철’이었다. 철학과 학생 장한나는 차이콥스키 곡을 연습할 때 항상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을 읽었다.

우리의 예술 교육이 지나치게 ‘실기’ 중심이고 그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숱한 폐단이 있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린 학생들은 틀에 박힌 입시곡이나 석고 데생을 반복해야 했고 실기시험의 ‘특수성’에 따른 입시 부정도 해마다 되풀이되어왔다. 이 지독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홍익대 미대는 실기시험을 치르지 않는 ‘근원적 처방’까지 모색한 바 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도 “장르 해체는 비단 연극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유인촌, 연기를 가르치다> 세종서적)이라고 언급했으며 지난해 4월에는 대학생들과 <오델로>를 관람한 후 “책을 무조건 많이 봐야 한다. 철학 등 인문학적 사고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한예종 사태’에서 유 장관이 그동안의 생각이나 발언과는 전혀 다른 정치를 과감히 밀어붙이는 게 놀랍고도 기이한데, 아무튼 걱정되는 것은 혹시 장래 예술가를 꿈꾸는 아이들이 ‘기술 연마’에만 몰두하지 않을까, 바로 그 점이다.


유 장관은 자신의 책 서문에서 자기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연극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스타니슬랍스키, 브레히트, 미셸 생드니, 피터 브룩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극과 다른 예술 그리고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관습의 칸막이를 과감히 철거했다는 점이다.

‘뷔페 뒤 노르 극장’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문화를 넘나들며 충격의 실험을 보여준 피터 브룩은 물론이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스타니슬랍스키와 브레히트도 당대의 고루한 관습, 그러니까 인접 장르와의 교섭이나 당대 현실과의 대화를 거부하거나 포기했던 지루하고 남루한 관습에 맞서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그들은 저 20세기 초반에 학제와 장르의 벽을 허무는 ‘통섭’의 선구자들이었다. 브레히트가 의대생이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지엽적이다.

유 장관이 서문에서 언급한 생드니 역시 런던시어터스튜디오 등을 설립하고 가르치면서 “강력한 고전 전통과 끊임없이 형성되는 현대 리얼리즘 사이를 지속적으로 오가는 것, 테크닉이 진실을 방해하거나 창발성을 지배하지 않게끔 하는 것, 그러면서도 고도의 테크닉으로 진실을 연극으로 표현해내는 것”에 집중했던 선구자다. 유 장관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이들이 오늘의 ‘한예종 사태’에 대해 충고한다면 뭐라고 할까.

씁쓸한 농담 한마디. 국제적인 음악 콩쿠르에서는 외국 심사위원들이 한국의 젊은 연주자를 보고 두 번 놀란다고 한다. 한 번은 경천동지할 고도의 기교 때문에. 그리고 또 한 번은 과제곡 말고는 제대로 연주할 게 없는 기이한 불균형 때문에.

나는 지금 ‘한예종 사태’에 관여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혹시라도 장래 예술가를 꿈꾸는 청소년들이 예술 정책의 최고 수장이나 영향력이 큰 일부 언론 보도 때문에 ‘실기에만 집중해도 되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까, 그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고른다.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골트문트는 욕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세상으로 나가 온갖 혼돈과 고통을 겪는다. 나르치스는 엄격한 규율 속에서 조화로운 질서를 모색하여 수도원장이 된다. 고통과 방황의 예술적 삶과 견실한 이성의 신학적 삶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듯하지만, 본디부터 하나였던 두 영혼은 결국 서로를 의지하며 아름답게 교직된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다양한 ‘예술’이 높은 차원에서 ‘종합’되는 풍경 위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방황하고 의미 있는 실험에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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