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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낡은 수사에 가려진 진실

등록 2009-05-22 21:48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모든 수사는 빈곤하고 부족하다. ‘말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수사는 대상의 일면을 적절한 범위로 드러낼 뿐, 그것을 온전히 다 말해주지는 못한다. 예컨대 ‘왼발의 달인’이란 표현이 있다. 왕년의 국가대표 하석주 선수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라이언 긱스 같은 선수들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한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이라도 왼발을 능숙하게 쓰는 선수가 있으면 어김없이 ‘왼발의 달인’이 된다. 왼발잡이 축구선수치고 ‘왼발의 달인’이 아닌 선수가 없는 경우가 되었다. ‘왼발의 달인’이란 표현은 낡아버렸다.

이러한 수사는 어떤 인물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더 풍부한 정보와 지식이 원만하고 일상적인 학습으로 제공되지 않을 때에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 위에 내려앉은 뿌연 먼지가 될 뿐이다.

서양음악의 예를 들어보자.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아버지’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중세의 겨울’에 대하여 좀더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양반이다. 세부 사항과 관련없이 바흐가 음악이라는 이름의 실험실에서 오선지의 인과율을 확립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음악의 어머니’란 표현도 있다. 누구나 어김없이 ‘헨델’을 떠올린다. 일단 남성 음악가 헨델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형용모순의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비하여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바흐는 아버지고 헨델은 어머니다. 은연중에 한 수 아래 낮춰 부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수사다.

‘악성’ 베토벤, ‘가곡의 왕’ 슈베르트, ‘피아노의 시인’ 쇼팽 같은 진부한 표현이 거의 반세기 이상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음악 문화, 혹은 범위를 조금 좁혀, 우리의 음악 교육이 ‘낭만적 감정의 투사’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낭만적(혹은 애상적) 감정 투사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를 ‘갈등과 고통에 휩싸여 평생 번민과 시련을 앓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친’ 예술가라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 ‘시련 속에도 불멸의 음악을 빚어냈다’는 식의 예식장 밑반찬 같은 말을 얹으면서 말이다.

‘음악의 신동’? 그렇다. 모차르트다. 그런데 음악사에 이름 석자 남긴 사람치고 신동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긴 모차르트는 8살 때 1번 교향곡(k.16)을 작곡하고 9살 때 연탄용 소나타(k.19d)와 모테트 <신은 우리들의 피난처> 등을 작곡했으니 여느 신동보다는 한 수 위의 신동인지도 모른다.

그가 ‘신동’이란 말을 듣게 된 것은 비단 그가 타고난 천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시대가 ‘신동 신드롬’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근대 중산층 시민 사회가 형성되면서 아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학습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 시대를 그는 살았다. 근대 초기의 유럽 대도시에는 ‘조기 교육’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똑똑한 아이는 도시 중산층의 관심을 받았고 종교 권력이나 세속 권력의 사랑까지 받을 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유럽의 대도시를 돌아다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심각한 내상을 입으며 성장했다. 요즘 우리 교육계의 ‘신동’들처럼 모차르트 역시 이런 열풍 때문에 심신이 괴로웠고 따라서 그런 표현을 누구보다 싫어했을 것이다.


‘지구는 거대하게 회전하는 쇼핑몰이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필립 솔레르스의 <모차르트 평전>(효형출판)은 모차르트를 ‘신동’이라는 낡아빠진 우물에서 건져낸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문학동네>에서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읽는다. 폴 맥가는 <모차르트-혁명의 서곡>(책갈피)에서 6살 때 뮌헨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요제프 3세 앞에서 연주했던 모차르트가 어떻게 그 세계를 벗어나 계몽과 이성의 한 시대를 살아냈는가를 말해준다. 브람스도 그렇고 차이콥스키도 그렇다. 이러한 수사와 이미지는 그들이 살았던 혁명과 반혁명,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파고를 떠올려주지 못한다. 진부한 표현과 낡은 이미지는 음악가들을 그 시대의 복판에서 서 있지 못했던 심약하고 더러는 성질이 괴팍한 인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모처럼 맘먹고 그들의 음악을 들을 때에도 신경질적이고 비참한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시련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시련의 절반 이상은 당대성의 깊은 그늘이었음을, 이러한 낡은 수사는 조금도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슈베르트를 ‘가곡의 왕’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가 살았던 반혁명의 메테르니히 통치에 따른 비더마이어 문화가 강요한 평화를 전혀 떠올릴 수 없다. 예술 교육과 교양 문화, 새롭게 쓰고 가르쳐야 할 때인 것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에 이어 이번주부터 문화평론가 정윤수씨의 ‘문화 가로지르기’가 ‘김태권의 에라스뮈스와 친구들’과 함께 격주로 연재됩니다. 예술·문학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곱씹어볼 주제를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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