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더 문> 가운데 태권도와 현대무용의 어울림이 돋보이는 ‘붉은 막대 춤’ 대목의 연습 장면. 21명의 배우 전원이 무대에 올라 붉은 대나무 막대를 쥔 채 일사분란하게 뿜어내는 춤사위는 이 작품의 알짜다. 사진 경기도문화의전당 제공
태권소년·소녀의 모험기
실전같은 연습 환자 속출
“영웅 통해 환상 주고파” 들풀 사이 여린 ‘마루치’ ‘아라치’를 품은 7개의 알이 비척댄다. 이내 어둑한 달빛의 기운으로 알에 금이 간다. <스노우 쇼>로 지구촌 관객을 사로잡았던 러시아 연출가, 빅토르 크라메르가 태권도를 소재로 해 세계적 상품을 노리며 만들고 있는 무언신체극 <더 문>의 들머리다. 13개의 에피소드가 비서사적으로 이어지면서 가녀린 태권소년, 소녀 7명이 역경과 다투어 하룻새 영웅으로 거듭난다. 지난 15일 수원의 경기도문화의전당 저녁 6시 연습현장. 전당은 그때부터가 대목이다. 【저녁 18:00】= 주인공 일곱 가운데 홍일점인 윤미정(19)이 가로로 누운 채 일어날 줄 몰랐다. ‘소녀의 싸움’(8번째 대목)을 연습한 뒤였다. 겨우 3분52초. 돌려차기, 발차기 따위로 풍랑 일듯 오르내리며 사내 9명을 물리친다. 빠르고 강한 퍼쿠션의 배경음악 때문이라도 윤미정은 멈출 수 없어 보였다. 출연자 가운데 막내인데 태권도가 2단이다. 1주일 전 이 대목에서 발목을 다쳐 응급실에 다녀왔다. 그 말고도 환자가 많다. 태권도로 만들어진 아크로배틱한 멋, 시적인 아름다움이 그냥 나오지 않았다. 【밤 21:40】= 크라메르가 지친 배우들을 불현듯 채근한다. ‘축제의 북’ 에피소드부터 ‘거울에 비친 자아’를 한목에 시연하자는 것. 영웅이 자아를 발견하는, 알짬 중 알짬이다. 거침없이 내모는 북소리에 맞춰 2명의 영웅이 팔과 발로 48개의 북을 치는 대목이나 21명 배우 전원이 붉은 막대를 들고서 리드미컬하고 일사분란하게 그려내는 춤사위는 아름답고 강하다. 소리와 몸짓은 힘, 자유, 흥 따위의 또 다른 말이 된다. 의상도 조명도 갖추지 않았었다. 몸과 군데군데 파인 음악만 있었다. 시연이 끝난 밤 10시25분, 가슴에서 북소리가 난다. 【지난 4월】= 태권도는 극의 소재이며 대목을 잇는 정신이다. 이날 만난 크라메르는 “태권도는 꿈과 신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며 “영웅의 모험, 전설의 시대를 통해 현대인으로 하여금 자아의 독립과 힘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한다”고 설명했다. 태권도 영웅 외 무용수 10명, 배우 4명이 출연한다. 대략 13:1의 경쟁률을 뚫은 이들이다. 주인공 7명은 모두 태권도 유단자다. 도합 20단. 하지만 이젠 유단자, 무용수를 따로 가름할 수 없을 만큼 배우들의 태권도는 춤, 춤은 태권도를 닮아 있다. 그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4월 초부터 하루 12시간 연습하며 들어간 밥값만 600만원. 연습에 앞서 모두들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크라메르는 ‘독불장군’이다. 공연지원팀은 그가 지날 때마다 “크라메르 태풍”이 휩쓸고 갔다고 지청구 댄다. 자기가 구상한 무대를 철저히 관철시키기 때문이다. 한국 음악 시디만 100여개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음악은 다분히 대륙적이고 강한 비트 위주로 엮여 있다. 이에 크라메르는 “에피소드가 필요로 하는 분위기와 감정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계무대를 노리는 이의 셈이다.
5시간 엉덩이를 붙이고서 작품의 3/4을 지켜봤다. 이것만으로도 수원을 오가는 길이 아깝지 않다. 10억원을 들여 경기도문화의전당이 위촉했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20~25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에서 28~29일 관객을 만난다. (031)230-3200.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경기도문화의전당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