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자주권을 추구하기 위해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사절. 이상재(앞줄 왼쪽), 박정양(가운데)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고종 어떻게 볼까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⑥ 강상규씨의 재반론
고종은 개혁군주였나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지난 5주 동안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쪽 입장에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가장 명확한 목소리로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했다. 이어 강상규 박사가 고종의 개혁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그 개혁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외적 상황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한계가 더 크다는 점을 강조했고, 박노자 교수도 “고종이 조선을 단독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김 교수는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낮게 평가했다.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마지막 여섯 번째 논자로 고종의 개혁성을 긍정하는 쪽에 선 강상규 박사가 다시 등판해 견해를 밝혔다. 강 박사는 앞선 논자들의 고종 비판이 구조적·역사적 요인들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져선 안 되며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차원의 검토가 동반돼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주부터는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 슬라보예 지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논쟁이 벌어진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민심이 흉흉하다. 현 정부는 과연 ‘세계화’ 시대의 산적한 현안들을 대화와 타협, 그리고 온 국민이 동의할 만한 비전의 제시를 통해 지혜롭게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19세기 한반도 역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보다 훨씬 더 풀기 힘든 난제였다. 현재 한반도가 직면한 문제는 적어도 우리가 속한 문명세계 ‘내부’의 성격 변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인 반면, 19세기의 당면 과제는 ‘외부’의 이질적인 세계로부터의 충격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충격과 혼돈의 정도는 더욱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당대의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9세기를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고’, ‘한몸으로 두 인생을 겪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시대라고 진단했다.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고종이 살았던 시기에 심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패러다임(뜨거운 불)과 새로운 서양의 패러다임(차디찬 물)이 격렬하게 부딪쳤던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이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이처럼 고종 시대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어려운 만큼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손쉬운 것일 수 있었다. 그가 다름 아닌 망국의 군주라는 사실은 바로 그의 정치적 무능을 입증하는 명백한 자료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책임’론은 현실정치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다른 논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고종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틀림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유만 들어보자. 우선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고종에게 주어진 정치적 선택의 폭이 사실상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동화 속의 영웅이나 바보가 아닌 현실 정치가로서 고종을 고찰하려면, 그가 어떠한 현실 정치적인 제약 위에서 해법을 고민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들어가야 한다. 조선정치의 특징과 상황 고려 없이
고종에 대한 비판은 옳지 않아
지배층-피지배층·개화파-수구파 등
이분법적 사고로는 본질 접근 어려워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500여년의 강고한 전통을 지닌 조선정치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왕권, 군신관계, 정국운영방식은 물론, 19세기의 위정자들과 지식인의 사유방식의 특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전환기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 전통과의 단절된 해석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몰이해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군신간의 ‘상호의존적 긴장관계’와 공론(公論)에 의거한 역동적인 정치운영은 조선왕조 특유의 ‘견제와 균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500년을 지속하게 한 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적인 힘이 19세기 후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환의 시대에 오히려 변화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동하게 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이 시대 정치사가 비로소 온전히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이해 없이 죽음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것처럼, 조선의 생명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선의 사망에 관한 설명이란 공허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19세기를 둘러싼 논의가 지배세력 대 피지배 민중의 각축, 혹은 개화세력 대 수구세력의 갈등이라는 축 위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방식은 지배세력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간과되고 소위 지배세력을 싸잡아서 비판하는 방식에 머무를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 역시 거대하게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위정자, 지식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를 개화 혹은 수구라는 어느 한쪽에 끼워 맞춤으로써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에 대한 도식화된 논의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이분법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난번 글(4월25일치)을 통해, 고종이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있음에도 1880년대 들어 일련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주국가를 세우려고 서구열강과 외교관계를 맺어 나가게 된 경위들을 짚었다. 아울러 조선의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이 여러 차례 반대에 부딪혔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개혁을 원하던 개화세력의 정변으로 사실상 조선은 자기 손에 의한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정책의 속도와 범위, 방법과 아울러 개혁의 주도세력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민씨 세력’ 혹은 ‘개화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어정쩡한 개혁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면 조선 개화사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당분간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엇박자의 연속
군신간 공론 따르던 정치운영마저
개화 발목잡고 외세 위협 불러
고종의 선택 균형적 성찰 필요 미국 외교관의 통역관으로서 조선 왕실의 근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문명개화의 꿈을 키워가던 청년 윤치호는 갑신정변 전후의 정황을 자신의 일기(음력 1884년 12월30일자)에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조정에는 나라를 지탱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백성에게는 떨쳐 일어서려는 기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밝은 지혜를 가진 군주가 여러 나라의 문명과 기술을 살피려 노력함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바라는 바를 조금씩 이루게 되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옥균 등의 과격한 행위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청국의 억압은 과거의 배가 되었다. 개화를 일컫는 자는 나라의 적으로 간주되며 개화에 관한 논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간신배들이 밖으로 청의 세력을 끼고 군주를 위협하며 나라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실로 통탄스럽다.” 이 시대 정치사는 끊임없는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소통에 입각한 절충과 조정의 시도는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외세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선택 폭은 더욱 좁아져 갔다. 한반도의 정치가 국제관계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종을 둘러싼 19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전환기적 상황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정치 공간에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국내외의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음을 절감할 수 있다. 따라서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정치가가 개화를 지향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성숙한 ‘개화의 주인’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종의 정치적 선택과 실패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극적인 엇박자에 대한 역사적 함의가 균형 있게 성찰될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조선정치사가 다루는 내용들은 우리의 의식과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의 미래로 남아 있을 의미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와 사상사입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민심이 흉흉하다. 현 정부는 과연 ‘세계화’ 시대의 산적한 현안들을 대화와 타협, 그리고 온 국민이 동의할 만한 비전의 제시를 통해 지혜롭게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19세기 한반도 역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보다 훨씬 더 풀기 힘든 난제였다. 현재 한반도가 직면한 문제는 적어도 우리가 속한 문명세계 ‘내부’의 성격 변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인 반면, 19세기의 당면 과제는 ‘외부’의 이질적인 세계로부터의 충격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충격과 혼돈의 정도는 더욱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당대의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9세기를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고’, ‘한몸으로 두 인생을 겪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시대라고 진단했다.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고종이 살았던 시기에 심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패러다임(뜨거운 불)과 새로운 서양의 패러다임(차디찬 물)이 격렬하게 부딪쳤던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이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이처럼 고종 시대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어려운 만큼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손쉬운 것일 수 있었다. 그가 다름 아닌 망국의 군주라는 사실은 바로 그의 정치적 무능을 입증하는 명백한 자료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책임’론은 현실정치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다른 논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고종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틀림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유만 들어보자. 우선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고종에게 주어진 정치적 선택의 폭이 사실상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동화 속의 영웅이나 바보가 아닌 현실 정치가로서 고종을 고찰하려면, 그가 어떠한 현실 정치적인 제약 위에서 해법을 고민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들어가야 한다. 조선정치의 특징과 상황 고려 없이
고종에 대한 비판은 옳지 않아
지배층-피지배층·개화파-수구파 등
이분법적 사고로는 본질 접근 어려워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500여년의 강고한 전통을 지닌 조선정치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왕권, 군신관계, 정국운영방식은 물론, 19세기의 위정자들과 지식인의 사유방식의 특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전환기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 전통과의 단절된 해석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몰이해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군신간의 ‘상호의존적 긴장관계’와 공론(公論)에 의거한 역동적인 정치운영은 조선왕조 특유의 ‘견제와 균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500년을 지속하게 한 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적인 힘이 19세기 후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환의 시대에 오히려 변화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동하게 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이 시대 정치사가 비로소 온전히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이해 없이 죽음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것처럼, 조선의 생명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선의 사망에 관한 설명이란 공허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19세기를 둘러싼 논의가 지배세력 대 피지배 민중의 각축, 혹은 개화세력 대 수구세력의 갈등이라는 축 위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방식은 지배세력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간과되고 소위 지배세력을 싸잡아서 비판하는 방식에 머무를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 역시 거대하게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위정자, 지식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를 개화 혹은 수구라는 어느 한쪽에 끼워 맞춤으로써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에 대한 도식화된 논의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이분법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난번 글(4월25일치)을 통해, 고종이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있음에도 1880년대 들어 일련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주국가를 세우려고 서구열강과 외교관계를 맺어 나가게 된 경위들을 짚었다. 아울러 조선의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이 여러 차례 반대에 부딪혔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개혁을 원하던 개화세력의 정변으로 사실상 조선은 자기 손에 의한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정책의 속도와 범위, 방법과 아울러 개혁의 주도세력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민씨 세력’ 혹은 ‘개화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어정쩡한 개혁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면 조선 개화사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당분간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엇박자의 연속
군신간 공론 따르던 정치운영마저
개화 발목잡고 외세 위협 불러
고종의 선택 균형적 성찰 필요 미국 외교관의 통역관으로서 조선 왕실의 근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문명개화의 꿈을 키워가던 청년 윤치호는 갑신정변 전후의 정황을 자신의 일기(음력 1884년 12월30일자)에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조정에는 나라를 지탱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백성에게는 떨쳐 일어서려는 기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밝은 지혜를 가진 군주가 여러 나라의 문명과 기술을 살피려 노력함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바라는 바를 조금씩 이루게 되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옥균 등의 과격한 행위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청국의 억압은 과거의 배가 되었다. 개화를 일컫는 자는 나라의 적으로 간주되며 개화에 관한 논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간신배들이 밖으로 청의 세력을 끼고 군주를 위협하며 나라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실로 통탄스럽다.” 이 시대 정치사는 끊임없는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소통에 입각한 절충과 조정의 시도는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외세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선택 폭은 더욱 좁아져 갔다. 한반도의 정치가 국제관계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종을 둘러싼 19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전환기적 상황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정치 공간에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국내외의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음을 절감할 수 있다. 따라서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정치가가 개화를 지향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성숙한 ‘개화의 주인’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강상규씨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와 사상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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