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출범한 이명박 대통령(왼쪽) 정부 성격을 ‘신보수’라고 규정하는 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 체제와의 차별성에 그 근거를 둔다. 하지만 고세훈 교수는 박정희 체제가 ‘보수’의 가치와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새 정부에 붙이는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불필요한 수식어는 왜곡 우려
지난주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새 정권의 성격을 ‘신보수’로 규정했다. 조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개발과 성장주의라는 동질적 측면이 있음도 지적했다.
조 교수는 또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봤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닌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한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이런 견해에 대해 고세훈 교수는 ‘보수가 의미하는 바’에 근거해 반론을 폈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전제하거나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에 보수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박 정권은 보수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도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고 교수는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다며, 새 정부를 신보수라고 일컫는 것은 진보정권으로 일컫는 것만큼 잘못된 규정이라고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놓고 지식계가 소란하다. 세월의 변화와 연속성을 모두 담아내려니 성격 규정에 수식어가 복잡하게 달린다. 나름대로 서술적 의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류가 지나치게 세분화되면, 분류의 이론적 의의는 사라지고, 우선 너무 복잡해서 대중적 전달력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조희연 교수의 ‘한국형’ 신보수가 있다면, 중국형·터키형·이탈리아형 신보수가 없으란 법 없다. 그러다 보면 왜 분류를 하는지, 그런 분류작업이 학문적·실천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렇다고 현 정부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역사적 담론들, 예컨대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등을 수식어 없이 갖다 대기도 껄끄럽다. 무릇 이념이나 개념들은 특정의 상황적 맥락과 역사적 경험에서 태동하고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범한 정권에 대해 성격 규정을 서두르는 것 또한 걸린다. 그러나 시도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식이든 분류는 필요하고, 어차피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할 테니까. 그럼에도 현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국형’이란 수사가 주는 부담감도 문제지만, 그것이 이미 역사성을 내재한 보수주의 혹은 신보수주의의 개념적 근간에 조금이라도 닿아 있으려면, ‘한국형’이란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일정한 형용 모순이거나 혼선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대외적으론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국가의 자율성을 일정하게 전제하거나 추구하며, 대내적으론 유기체적 일체성을 역시 전제하거나 추구한다. 보수주의가 어떤 계급적 혹은 계층적 체제로 귀결했는지는 그 다음 문제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 개념과 불가분
개인 의무·책임 중시하고 복지 기여해
‘박정희 체제=구보수’라 말하지만
되레 공동체 허물고 새 기득권층 형성 이 점은 오늘날 신보수가 아무리 시장자유주의를 전면에 내건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장 공격적인 신자유주의가 왕왕 가장 국가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데서 볼 수 있다. 당연히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시장이나 시민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한 개념이다. 오히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를 원자화된 개인들로 분해하는 시장체제보다는 관계적 의무와 책임을 중시한다. 사실 보수주의 자체가 중세적 질서에 대한 일정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소유하다’(own)란 영어단어가 ‘빚진다’(owe)라는 중세적 어원을 가진다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중세 계층간의 쌍무적 책무의식에서 연원한다는 점은 보수주의의 공동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수주의가 사민주의 못지않게 서유럽 복지국가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국가복지는 취약하더라도 민간복지 혹은 자선의 전통이 굳건한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선진국에 시장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듯이 보여도, 그 배후엔 구보수적 토대가 엄연하다. 이러한 연속성은 시장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는 과정이 늘 심각한 내적 갈등을 동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예컨대 영국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벤저민 디즈레일리 이래 모리스 해럴드 맥밀런에 이르는 전통적 보수주의는 한때 에드워드 히스나 마거릿 대처의 신보수적 정치에 의해 뒷전에 밀리기도 했지만, 최근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대처주의가 당대적 힘으로 입증되려면 이른바 웨츠(wets)로 일컫던 구보수 진영과의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보수’ 아닌 ‘청산’할 유산들만 떠안은
새 정권에 ‘신보수’란 수식어는 잘못
‘한국형’이란 말도 역사성 없이 혼선 불러
되레 역사에 무임승차하는 빌미 줄 뿐 우리의 신보수주의는 과거 박정희 체제를 보수체제로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러나 박정희체제는 기실 어떤 적극적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그 동기·과정·결과가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국가자율성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서유럽 보수주의와는 정반대로 대외적 의존을 근간으로 한 대내적 (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이었다. 우리 국가의 대외적 자율성은 오로지 북한을 상대로만 기능해 왔다. 대내적으로도 국가는 수탈의 도구로 인식되었으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반복지 의식 저변에는 반국가·반정치 의식이 깔려 있다.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오히려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미 와해된 공동체적 조건에다 신자유주의를 대세인 양 수용하면서 개인 중심의 극단적 혈연주의, 때론 가족조차 팽개치는 (이혼율, 해외입양률, 유아방기율, 낙태율, 출산율 등에서 나타난) 극단적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상태에 와 있다. 요행과 불로소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정직한 노동과 노동자를 천시하고, ‘못사는’ 외국인노동자와 연변의 동족이나 북한을 경멸하는 저급한 의식상태가 거기에서 멀지 않다. 요컨대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는 것이다. 신보수나 신자유는 모두 중세라는 장구한 세월에다,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근대적 경험과 정치적 실험들이 농축된 역사적 개념들이다. 이 정권에는 신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조차 과분하고 민망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실용주의란 것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원칙이 전제되지 않는 유용성 혹은 현실과의 거리 조율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건가. 우리의 실용주의도 실상은 성장주의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기에 터잡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정치에 관한 한,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것은 내 이념, 내 이해관계가 마침내 지배적으로 됐다고 흡족해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무릇, 음치가 합창단에 앉으면, 테너나 바리톤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동적으로 테너가 되고, 바리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음치를 합창석에 앉히지 말라. 음치를 벗어나게 하려면 먼저 음치임을 자각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렇다 치고, 이 정권에 신보수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수식어가 어떻든 그것을 진보정권으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규정이다. 장관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 투철한 국가의식은 애초에 언감생심이었고, 기형적인 한국적 시장체제에서 ‘성공한’ 몽롱한 얼굴들뿐, 진지하고 당당한 시장주의자의 모습조차 거기엔 없었다. 그리하여 현 정부가 자신의 별명을 그냥 ‘이명박 정부’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어떤 점에선 백번 옳고 또 잘한 일이다.
예명으로 언론이 갖다 붙인 고소영, 강부자 정부면 충분하다. 너무 냉소적이고 안이한가? 그래도 나는 이 정권에 신보수의 치장을 해 줌으로써 지레 면죄부를 주고, 그것이 역사에 무임승차하도록 빌미를 주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
고세훈/고려대 교수
고세훈 교수는 1955년생으로 미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 국가복지사상의 역사,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영국노동당사>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페이비언 사회주의>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놓고 지식계가 소란하다. 세월의 변화와 연속성을 모두 담아내려니 성격 규정에 수식어가 복잡하게 달린다. 나름대로 서술적 의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류가 지나치게 세분화되면, 분류의 이론적 의의는 사라지고, 우선 너무 복잡해서 대중적 전달력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조희연 교수의 ‘한국형’ 신보수가 있다면, 중국형·터키형·이탈리아형 신보수가 없으란 법 없다. 그러다 보면 왜 분류를 하는지, 그런 분류작업이 학문적·실천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렇다고 현 정부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역사적 담론들, 예컨대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등을 수식어 없이 갖다 대기도 껄끄럽다. 무릇 이념이나 개념들은 특정의 상황적 맥락과 역사적 경험에서 태동하고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범한 정권에 대해 성격 규정을 서두르는 것 또한 걸린다. 그러나 시도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식이든 분류는 필요하고, 어차피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할 테니까. 그럼에도 현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국형’이란 수사가 주는 부담감도 문제지만, 그것이 이미 역사성을 내재한 보수주의 혹은 신보수주의의 개념적 근간에 조금이라도 닿아 있으려면, ‘한국형’이란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일정한 형용 모순이거나 혼선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대외적으론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국가의 자율성을 일정하게 전제하거나 추구하며, 대내적으론 유기체적 일체성을 역시 전제하거나 추구한다. 보수주의가 어떤 계급적 혹은 계층적 체제로 귀결했는지는 그 다음 문제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 개념과 불가분
개인 의무·책임 중시하고 복지 기여해
‘박정희 체제=구보수’라 말하지만
되레 공동체 허물고 새 기득권층 형성 이 점은 오늘날 신보수가 아무리 시장자유주의를 전면에 내건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장 공격적인 신자유주의가 왕왕 가장 국가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데서 볼 수 있다. 당연히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시장이나 시민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한 개념이다. 오히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를 원자화된 개인들로 분해하는 시장체제보다는 관계적 의무와 책임을 중시한다. 사실 보수주의 자체가 중세적 질서에 대한 일정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소유하다’(own)란 영어단어가 ‘빚진다’(owe)라는 중세적 어원을 가진다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중세 계층간의 쌍무적 책무의식에서 연원한다는 점은 보수주의의 공동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수주의가 사민주의 못지않게 서유럽 복지국가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국가복지는 취약하더라도 민간복지 혹은 자선의 전통이 굳건한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선진국에 시장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듯이 보여도, 그 배후엔 구보수적 토대가 엄연하다. 이러한 연속성은 시장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는 과정이 늘 심각한 내적 갈등을 동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예컨대 영국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벤저민 디즈레일리 이래 모리스 해럴드 맥밀런에 이르는 전통적 보수주의는 한때 에드워드 히스나 마거릿 대처의 신보수적 정치에 의해 뒷전에 밀리기도 했지만, 최근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대처주의가 당대적 힘으로 입증되려면 이른바 웨츠(wets)로 일컫던 구보수 진영과의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보수’ 아닌 ‘청산’할 유산들만 떠안은
새 정권에 ‘신보수’란 수식어는 잘못
‘한국형’이란 말도 역사성 없이 혼선 불러
되레 역사에 무임승차하는 빌미 줄 뿐 우리의 신보수주의는 과거 박정희 체제를 보수체제로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러나 박정희체제는 기실 어떤 적극적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그 동기·과정·결과가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국가자율성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서유럽 보수주의와는 정반대로 대외적 의존을 근간으로 한 대내적 (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이었다. 우리 국가의 대외적 자율성은 오로지 북한을 상대로만 기능해 왔다. 대내적으로도 국가는 수탈의 도구로 인식되었으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반복지 의식 저변에는 반국가·반정치 의식이 깔려 있다.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오히려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미 와해된 공동체적 조건에다 신자유주의를 대세인 양 수용하면서 개인 중심의 극단적 혈연주의, 때론 가족조차 팽개치는 (이혼율, 해외입양률, 유아방기율, 낙태율, 출산율 등에서 나타난) 극단적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상태에 와 있다. 요행과 불로소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정직한 노동과 노동자를 천시하고, ‘못사는’ 외국인노동자와 연변의 동족이나 북한을 경멸하는 저급한 의식상태가 거기에서 멀지 않다. 요컨대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는 것이다. 신보수나 신자유는 모두 중세라는 장구한 세월에다,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근대적 경험과 정치적 실험들이 농축된 역사적 개념들이다. 이 정권에는 신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조차 과분하고 민망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실용주의란 것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원칙이 전제되지 않는 유용성 혹은 현실과의 거리 조율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건가. 우리의 실용주의도 실상은 성장주의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기에 터잡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정치에 관한 한,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것은 내 이념, 내 이해관계가 마침내 지배적으로 됐다고 흡족해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무릇, 음치가 합창단에 앉으면, 테너나 바리톤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동적으로 테너가 되고, 바리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음치를 합창석에 앉히지 말라. 음치를 벗어나게 하려면 먼저 음치임을 자각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렇다 치고, 이 정권에 신보수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수식어가 어떻든 그것을 진보정권으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규정이다. 장관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 투철한 국가의식은 애초에 언감생심이었고, 기형적인 한국적 시장체제에서 ‘성공한’ 몽롱한 얼굴들뿐, 진지하고 당당한 시장주의자의 모습조차 거기엔 없었다. 그리하여 현 정부가 자신의 별명을 그냥 ‘이명박 정부’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어떤 점에선 백번 옳고 또 잘한 일이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
고세훈 교수는 1955년생으로 미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 국가복지사상의 역사,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영국노동당사>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페이비언 사회주의>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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