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가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착취 구조를 고발할 의도로 그린 1933년 벽화 <현대 산업>. 정성진 교수는 자본주의를 뛰어 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코뮨주의’ 대안 맞나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④ 고전적 코뮤니즘과 접목해야
지난 세 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가 논쟁을 펼쳤다.
고 대표는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더는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봤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을 위한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독점만 강화할 것이라고도 했다. 심 교수는 고 대표 주장은 동질성 대 이질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지난 주, 조 강사는 코뮤니즘은 “자본 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이라면서 이는 “다중이나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했다.
정성진 교수는 코뮤니즘 담론의 난점으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뛴 데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의 ‘탈주’는 자본주의 영토를 더욱 넓힐 것이라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다음 주에는 논쟁의 새 주제인 ‘이명박 정부의 성격,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코뮨주의 혹은 코뮤니즘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코뮤니즘은 이전에는 ‘공산주의’라고 번역했던 ‘communism’이라는 영어 단어를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이며, 코뮨주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코뮨’(commune)의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표기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뮤니즘 담론은 고병권과 이진경이 주로 주장하는데, 자율주의자 조정환과 생태적 문화사회론자 심광현도 이를 부분적으로 공유한다. 고병권에 따르면, 코뮤니즘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노력”으로서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되며, 실제로는 공동체주의로 구체화된다. 반면, 조정환은 코뮤니즘을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로 정의하고, 이는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 곧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의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개념 복원이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이미지 쇄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 재건 길 마련한 것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유행은 옛 소련의 몰락 이후 득세했던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TINA)이나 ‘역사의 종언’이 퇴조하고 자본주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갈망이 증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코뮤니즘 담론은 그 동안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 사민주의가 억압·왜곡해 온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그 동안 국유화, 명령경제, 수용소군도의 음울한 세계로 그려졌던 코뮤니즘을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과 이진경)으로, 혹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기쁨”(네그리와 하트)으로 환골탈태한 것은 코뮤니즘 담론의 주요한 공헌이다.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의 실현을 “먼 미래”의 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달성해야 할 과제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최근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진보진영의 개량화 경향에 제동을 걸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을 재건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으로서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을 그 뿌리인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차이와 난점이 드러난다. 우선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이 현재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미래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없다. 코뮤니즘의 잠재태가 자본주의 안에서도 “자본관계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서 형성·발전된다는 말은 맞다. 또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을 지향하는 운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코뮨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안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반복한 것이다. 코뮤니즘 담론에서 새로운 점은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 이행의 주객관적 조건의 실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실의 지배적 체제로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 뛴 데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위한 주객관적 조건이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지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체제는 코뮤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지배적인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문제는 회피될 수 없다. 코뮤니즘 담론은 이행의 문제 자체를 부정하고,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의 도정에서 정면 돌파해야 할 장애물들인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와 억압적 국가권력을 모두 회피하거나 무력한 것 혹은 무해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들이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에 봉사한다. 단지 “탈주”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국가와 자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중투쟁의 거대한 고양 없이 “비국가적 비시장적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체제와 억압적 국가권력은 해체될 수 없다. 자본과 국가를 배경으로 한 시장의 논리,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 자체가 코뮨주의의 “잠재태의 현실화”에 근본적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이 이미 실재한다는 건 비약
자본주의 지배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비국가·비시장적 네트워크 실현 힘들어
대중투쟁 통해 자본주의 경계 넘어서야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대중들이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을 갖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러한 대중의 갈망을 뭔가 문제 있는 “증상”이라고 탓하거나 무시하고, 이를 모종의 대안 공동체 실험들로 대신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대중들의 이와 같은 갈망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구명하고, 대중의 갈망과 분노, 투쟁과 결합하여, 이를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코뮨주의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조직노동운동처럼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한 운동이나 “복지국가에 대한 갈망”을 “복고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 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대중들이 국가에서든 자본에서든 “자격이나, 소속,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 판매에 성공할 때이다. 극소수 자산가를 제외한 대중은 이와 같은 노동력 상품의 판매에 실패할 경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에 의존하거나, 소상품생산자(자영업자)가 되는 도리 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은 이러한 선택지 중 노동력 상품 판매와 복지국가를 거부하므로, 결국 남는 대안은 소상품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의 주변부에 기생하는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브로델이나 아리기처럼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시장의 논리는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로 발전하여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이 애호하는 “비시장적 네트워크”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 자체가 거부되고 폐지되지 않는 한, 고립된 주변적 공동체들 간의 연계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이 탈주하고 난 다음 생겨난 국가와 자본의 빈 자리는 다시 시장에 의해 채워질 것이며, 그 결과 자본주의 영토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퇴각하거나 시장으로 대체되기는커녕, 상품화의 확대와 경쟁력의 강화, 착취의 강화에 봉사하는 국가로서 그 역할이 다시 정의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본주의 국가 분쇄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역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이 진정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 동안 멀리했던 자신의 뿌리와 다시 접목할 필요가 있다.
정성진 경성대 교수·경제학
정성진 교수는 1957년생이며 현재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에 의거한 현대 한국경제 분석과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 구상 및 대안사회운동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 등이 있습니다.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코뮨주의 혹은 코뮤니즘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코뮤니즘은 이전에는 ‘공산주의’라고 번역했던 ‘communism’이라는 영어 단어를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이며, 코뮨주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코뮨’(commune)의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표기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뮤니즘 담론은 고병권과 이진경이 주로 주장하는데, 자율주의자 조정환과 생태적 문화사회론자 심광현도 이를 부분적으로 공유한다. 고병권에 따르면, 코뮤니즘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노력”으로서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되며, 실제로는 공동체주의로 구체화된다. 반면, 조정환은 코뮤니즘을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로 정의하고, 이는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 곧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의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개념 복원이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이미지 쇄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 재건 길 마련한 것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유행은 옛 소련의 몰락 이후 득세했던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TINA)이나 ‘역사의 종언’이 퇴조하고 자본주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갈망이 증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코뮤니즘 담론은 그 동안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 사민주의가 억압·왜곡해 온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그 동안 국유화, 명령경제, 수용소군도의 음울한 세계로 그려졌던 코뮤니즘을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과 이진경)으로, 혹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기쁨”(네그리와 하트)으로 환골탈태한 것은 코뮤니즘 담론의 주요한 공헌이다.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의 실현을 “먼 미래”의 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달성해야 할 과제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최근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진보진영의 개량화 경향에 제동을 걸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을 재건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으로서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을 그 뿌리인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차이와 난점이 드러난다. 우선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이 현재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미래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없다. 코뮤니즘의 잠재태가 자본주의 안에서도 “자본관계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서 형성·발전된다는 말은 맞다. 또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을 지향하는 운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코뮨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안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반복한 것이다. 코뮤니즘 담론에서 새로운 점은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 이행의 주객관적 조건의 실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실의 지배적 체제로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 뛴 데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위한 주객관적 조건이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지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체제는 코뮤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지배적인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문제는 회피될 수 없다. 코뮤니즘 담론은 이행의 문제 자체를 부정하고,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의 도정에서 정면 돌파해야 할 장애물들인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와 억압적 국가권력을 모두 회피하거나 무력한 것 혹은 무해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들이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에 봉사한다. 단지 “탈주”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국가와 자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중투쟁의 거대한 고양 없이 “비국가적 비시장적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체제와 억압적 국가권력은 해체될 수 없다. 자본과 국가를 배경으로 한 시장의 논리,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 자체가 코뮨주의의 “잠재태의 현실화”에 근본적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이 이미 실재한다는 건 비약
자본주의 지배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비국가·비시장적 네트워크 실현 힘들어
대중투쟁 통해 자본주의 경계 넘어서야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대중들이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을 갖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러한 대중의 갈망을 뭔가 문제 있는 “증상”이라고 탓하거나 무시하고, 이를 모종의 대안 공동체 실험들로 대신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대중들의 이와 같은 갈망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구명하고, 대중의 갈망과 분노, 투쟁과 결합하여, 이를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코뮨주의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조직노동운동처럼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한 운동이나 “복지국가에 대한 갈망”을 “복고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 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대중들이 국가에서든 자본에서든 “자격이나, 소속,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 판매에 성공할 때이다. 극소수 자산가를 제외한 대중은 이와 같은 노동력 상품의 판매에 실패할 경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에 의존하거나, 소상품생산자(자영업자)가 되는 도리 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은 이러한 선택지 중 노동력 상품 판매와 복지국가를 거부하므로, 결국 남는 대안은 소상품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의 주변부에 기생하는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브로델이나 아리기처럼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시장의 논리는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로 발전하여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이 애호하는 “비시장적 네트워크”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 자체가 거부되고 폐지되지 않는 한, 고립된 주변적 공동체들 간의 연계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이 탈주하고 난 다음 생겨난 국가와 자본의 빈 자리는 다시 시장에 의해 채워질 것이며, 그 결과 자본주의 영토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정성진 경상대 교수
정성진 교수는 1957년생이며 현재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에 의거한 현대 한국경제 분석과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 구상 및 대안사회운동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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