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첫 단독 공연 ‘금강산가극단 무용단’ 강수내 공훈배우
서울서 첫 단독 공연 ‘금강산가극단 무용단’ 강수내 공훈배우
“공연은 만족은 없습니다마는 마음은 정말 기쁘고 감개무량합니다. 우리가 준비가 덜 되어가지고 제대로 못했는데 관객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따뜻히 맞이해 주셨기 때문에 정말 자연스럽게 긴장도 안하고 공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3인무 <하나>를 마지막으로 22일 금강산가극단(단장 리용수) 무용단의 첫 공연이 끝난 뒤 책임 안무가이자 공훈배우인 강수내(46) 무용부장은 몹시 상기된 얼굴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렇게 무용단이 자기 고향이며 통일을 바라는 이남 땅에 와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이 꿈만 같다”고 털어놓았다.
재일무용가 처음으로 북한 ‘2.16예술상’
안무가 전향 뒤 14년만에 직접 무대 서
“북한 무용으 ㄴ민족적 특색 살린 주체무용”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산하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이 지난 22일부터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조선무용 50년, 북녘의 명무’라는 행사로 첫 내한 단독공연을 가졌다. 이날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은 1부에서 전설무용인 <금강선녀>를 비롯해 <샘물터에서> <사과풍년> 등 북한의 대표적인 무용들과 2부에서 <꽃등놀이> <사랑의 바지저고리> 등 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들을 선보였다. 강수내 무용부장도 이날 공연에서 자신이 안무한 <설죽화>와 <고려삼신불춤>을 선보였으며, 10여년 만에 무대에 복귀해 독무 <도라지>를 추어 환호를 받았다. 그가 1991년 북한의 최고 전문예술인경연대회인 ‘2.16예술상’ 개인경연에 참가해 재일동포 무용가로는 처음으로 입상해 북한무용계를 감짝 놀라게 했던 작품이다. 재일동포 3세인 그는 1979년 금강산가극단에 입단해 무용배우로 활동했으며, 1994년부터 안무가의 길을 걸으며 <고려 삼신불춤> <명월춤> <설죽화> <아리랑> <농악> 등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의 주요작품들을 발표해왔다. “그동안 춤을 안추다가 추려니까 죽어났습니다. 뼉다구가 다 굳어져가지고 가족들과 친척, 아이들에게 많이 근심 끼치면서 준비했습니다, 몸을 세워가지고 젊은 배우들의 발을 당기지 않게 공연하게 되어서 아마 인생의 추억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재일동포사회에서는 10살부터 조선학교에서 소조생활(서클활동)을 시작하는데 남학생들은 축구가, 여학생들은 조선무용이 가장 인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중학교 1학년 딸도 무용을 배우고 있으며, 내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들은 축구에 빠져있다고 귀띰했다. 그는 재일동포 여학생들이라면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에 입단하는 것이 꿈이지만 선발기준이 몹시 까다롭다고 밝혔다. “인물과 체격, 기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 됨됨, 각오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는가, 또 무용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하는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옛날부터 통일되면 통일마당에서 우리 함께 춤추자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올 수 있는 오늘 순간 순간이 정말 통일을 위한 길 위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선조들이 남겨놓은 아직 발굴되지 못한 많고 많은 유산을 이남의 선생님 어르신들과 이북의 스승님들과 함께 발굴해서 세계에 떨칠 수 있는 그런 조선춤을 창조하고, 그 속에 제가 한몫낄 수 있다면 욕심이 있습니다.” 금강산가극단은 22~23일 공연과 24일 특별 초대공연 후 26일 출국할 예정이다.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안무가 전향 뒤 14년만에 직접 무대 서
“북한 무용으 ㄴ민족적 특색 살린 주체무용”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산하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이 지난 22일부터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조선무용 50년, 북녘의 명무’라는 행사로 첫 내한 단독공연을 가졌다. 이날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은 1부에서 전설무용인 <금강선녀>를 비롯해 <샘물터에서> <사과풍년> 등 북한의 대표적인 무용들과 2부에서 <꽃등놀이> <사랑의 바지저고리> 등 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들을 선보였다. 강수내 무용부장도 이날 공연에서 자신이 안무한 <설죽화>와 <고려삼신불춤>을 선보였으며, 10여년 만에 무대에 복귀해 독무 <도라지>를 추어 환호를 받았다. 그가 1991년 북한의 최고 전문예술인경연대회인 ‘2.16예술상’ 개인경연에 참가해 재일동포 무용가로는 처음으로 입상해 북한무용계를 감짝 놀라게 했던 작품이다. 재일동포 3세인 그는 1979년 금강산가극단에 입단해 무용배우로 활동했으며, 1994년부터 안무가의 길을 걸으며 <고려 삼신불춤> <명월춤> <설죽화> <아리랑> <농악> 등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의 주요작품들을 발표해왔다. “그동안 춤을 안추다가 추려니까 죽어났습니다. 뼉다구가 다 굳어져가지고 가족들과 친척, 아이들에게 많이 근심 끼치면서 준비했습니다, 몸을 세워가지고 젊은 배우들의 발을 당기지 않게 공연하게 되어서 아마 인생의 추억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재일동포사회에서는 10살부터 조선학교에서 소조생활(서클활동)을 시작하는데 남학생들은 축구가, 여학생들은 조선무용이 가장 인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중학교 1학년 딸도 무용을 배우고 있으며, 내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들은 축구에 빠져있다고 귀띰했다. 그는 재일동포 여학생들이라면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에 입단하는 것이 꿈이지만 선발기준이 몹시 까다롭다고 밝혔다. “인물과 체격, 기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 됨됨, 각오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는가, 또 무용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하는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옛날부터 통일되면 통일마당에서 우리 함께 춤추자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올 수 있는 오늘 순간 순간이 정말 통일을 위한 길 위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선조들이 남겨놓은 아직 발굴되지 못한 많고 많은 유산을 이남의 선생님 어르신들과 이북의 스승님들과 함께 발굴해서 세계에 떨칠 수 있는 그런 조선춤을 창조하고, 그 속에 제가 한몫낄 수 있다면 욕심이 있습니다.” 금강산가극단은 22~23일 공연과 24일 특별 초대공연 후 26일 출국할 예정이다.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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