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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새로운 역 맡으면 ‘새 인생’에 들뜨지

등록 2007-09-17 19:43수정 2007-09-17 23:46

배우 신구
배우 신구
중견배우의 ‘재발견’ 주도하는 배우 신구
한겨레가 만난 사람/

색깔 다른 연기로 안방극장 3곳을 종횡무진하는 신구씨(71). 연기 경력 45년의 70대 ‘실버 연기자’이지만 젊었을 때보다 더욱 바쁜 일정과 다양한 캐릭터로 전성기를 맞았다. 문화방송 일일 시트콤 〈김치, 치즈, 스마일〉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유쾌한 보수적 가장 ‘허당 신구’로, 에스비에스의 사극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노회한 노 내시로, 한국방송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에서는 근엄한 조정위원회 판사 역으로 지상파 3개 방송사와 시대를 넘나들며 서로 다른 역을 ‘신구표’로 넉넉하게 일궈가고 있다. 사이사이 시에프까지 찍느라 쉴 틈이 없다. 연예계에 갓 입문한 새내기들도 기본인 매니저 하나 없이 모든 일정을 스스로 관리하면서 약속시간에 칼 같이 나타난 그를 13일 여의도에서 만났다.

[신구 인터뷰] ‘전성기라고?’ 이 나이에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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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길 한번 눈 돌리지 않고 기나긴 세월을 달려왔으니 이제 연기의 달인이 되었을 법도 하건만 그는 지금도 연기에 목이 마르고 늘 허기지다. 새로운 역을 받을 때마다 새 인생에 들뜨면서 또 그만큼 그 인물을 연구하느라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새로운 역을 맡으면 그 인물의 성장과정과 학력, 경력, 친구관계 등 이 인물이 사회생활하는 데 필요하다고 상상할 수 있는 건 전부 나열해놓고 종합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러다보면 인물의 형태나 색깔이 떠오르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주 맡는 흔하디 흔한 아버지의 역할이라 하더라도 팔색조처럼 다양한 색깔로 펼쳐진다. 늘 마르지 않는 샘으로 폭넓은 연기를 과시하는 그 우물의 바닥은 어디일까? 달관한 표정의 “니들이 게 맛을 알아?”나 해맑은 치매노인의 “초코파이 줄까?” 그리고 법정에서의 “4주 후에 뵙겠습니다” 같은 시대의 유행어를 만들었지만 표정연기는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오로지 신구만의 몫이다.

‘신구’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아버지 역의 그를 떠올린다. 사실 그의 데뷔작도 아버지 역이다. 62년 연극 〈소〉로 데뷔했는데 극성맞은 아버지 역이었다.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서른살도 안 된 그가 처음 무대에 오른 배역이 멜로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바탕이 그러니까 애초에 포기했어. 배우로서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별로 불만이 없었어요.” 서른도 안 된 김수미씨가 〈전원일기〉에서 일용네를 맡아 한숨 쉬었다는 사실에 그는 “김수미씨는 젊고 예뻤으니 상처를 많이 받아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겼으니 아픔이 덜 했을지 몰라”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아버지 역도 재벌가나 번듯한 집안의 가장이 아니라 주변에서 낯익은 도시빈민이나 농촌 등 우리시대 서민의 아버지 몫을 떠안았다.


‘허당 신구’·내시·판사 방송3사 오가며 ‘팔색조’ 활약
26살 데뷔 때부터 ‘아버지’ 역 “멜로 주인공 애초에 포기했어”
시트콤서 ‘철없는 노인’ 계기
중견배우들 캐릭터 폭 넓혀 “연륜 존중해주는 풍토 됐으면”

아버지 역 못지않게 그를 각인시킨 또 다른 역은 악역이다. 티브이 드라마 데뷔작인 〈허생전〉 다음으로 한 〈야간비행〉에서 “지독한 악질” 간첩 역이었다. 그도 연기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악역으로 나온 연극 〈파우스트〉를 꼽는다. 여기서 그는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로 나왔다. 연출가 이윤택씨는 “신구씨야 말로 이 시대 최고의 메피스토텔레스”라는 말로 칭송한 바있다. 이에 대해 그는 “과찬이죠, 허허허”하고 멋쩍어 한다.

2년 전 시트콤 〈웬만해서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철딱서니 없는 노인네 역을 맡았는데 이 역은 틀안에 가두었던 그의 ‘진지모드’와 ‘무표정’을 한방에 날려보냈다. 이렇게 시트콤은 자칫 한물간 중년 연기자들에게 ‘병풍’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캐릭터로 주인공을 꿰차게 하는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었다. “배우들 안에 잠재돼 있지만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물을 만난 것”이었다며 그도 시트콤을 긍정평가한다. 그러나 시트콤이라고 해서 덧칠을 해 의도적으로 과장하면 시청자들이 식상할 수 있기에 감정 조절과 억제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드라마와 달리 상황은 유쾌하나 일 자체는 고된 작업임을 시사한다.

젊은 연기자들은 존경하는 선배로 신구씨를 많이 거론한다. 그는 “작업 끝나면 서로 만나지도 않는데, 뭘.”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젊은 연기자들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한류라는 게 예전이라고 없었겠어요?. 시대 상황이 달라진 것도 있지만 재능있는 젊은 친구들이 잘 해내니까 그런 흐름이 자리를 잡았다고 봐요.” 그래서 스타급 젊은 배우들에게 더 높은 대우를 해주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나이 든 연기자들의 경험이나 노하우는 나름대로 인정해 주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대선국면에 정당에서 입당 제의를 받은 적은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그런 적은 없어요. 전두환 정권 다음에 노태우씨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방송에서 지지 연설을 한 적은 있지요. 이종찬 등 내 고교 친구들(그는 경기고 출신이다)이 그쪽에 많았는데 요청이 왔어요. 문학 쪽은 김춘수 시인이 했고, 방송 쪽에서 내가 선발되었어요.” 그게 두고두고 꺼림칙한 것으로 남아 있다. 한국방송 전속에, 주변의 권유 등 거절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것이 섞여 한 일이기는 하나 방송 뒤 곳곳에서 뒷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뜨거운 맛을 보았기에 그의 의도와는 무관했지만 정치와는 더더욱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저녁 집에서 소주 1병을 마시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시에프 찍느라 새벽 1시에 귀가한 인터뷰 전 날도 여전했단다. 새벽 1시 소주 1병의 압박에 대해 그의 대답은 소박하다. “소주를 일단 따 놓으면 아까워서. 따 놓은 술은 맛이 없거든요. 허허허허.” 술이 취하면 그가 부르는 18번은 〈번지없는 주막〉이다.

그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음식은 냉면이다. 그것도 평양냉면 마니아이다. 이북 출신이어서가 아니다. 어렸을 때 왕십리 시장통에서 야채 장사를 하신 아버지의 영향이다. 그 때 부친이 자주 사준 명보극장 뒤의 냉면집 맛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강남의 한 냉면집만을 출입한다. 냉면 마니아들의 지존싸움에 그는 자신있게 이곳에 1표를 행사한다.

지금 쓰고 있는 ‘오랠 구’ 이름은 연극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 유치진 선생에게 받은 예명이다. 본명은 신순기다. 이름대로인지 일흔 넘어서도 현장을 지키는 ‘행복한 인생’이다. 그는 “무능하고 다른 재주가 없기 때문”이라지만 양재천을 하루 8킬로씩 걷는 그의 일상처럼 배우의 외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문현숙 미디어팀장 hyunsm@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영상 영상미디어팀 박수진 피디 jjinpd@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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