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독일 하일리겐담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 ② 왜 제국주의인가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오늘날 주권은 일국적 수준을 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구축되고 있다면서 제국주의론은 제국론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국주의론으로는 미국이 아프간 전쟁으로 빚더미에 몰리게 된 역설을 설명할 수 없다면서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강대한 용병국가로서 지구에 산재한 미군들뿐만 아니라 동맹국 군대들을 지구제국을 지키는 용병으로 결합함(이른바 ‘연합군’)으로써 군사적 헤게모니를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씨는 제국의 시대에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해방운동은 더는 유효한 투쟁전략이 아니며, 자본에 대항하는 다중들의 투쟁을 전지구적 수준으로 연결하는 연합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논지에 대해 이번주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반론을 펼친다. 정 교수는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이 현재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구성 주체라고 본다. 다수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 국민국가를 매개로 지정학적·군사적 경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을 침공한 것도 유럽과 러시아,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패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펼칠 예정이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하는 논쟁은 언뜻 보기에 매우 현학적인 논쟁인 것처럼 보인다. ‘주의’라는 말이 있거나 없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다르다는 말인가? 하지만 ‘제국’과 ‘제국주의’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한다면 이 논쟁은 오늘날 세계체제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선, ‘제국’(Empire)은 대문자로 시작되는 단수 고유명사인 데 반해, ‘제국주의’는 복수의 보통명사인 제국주의들(imperialisms)을 함축하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제국주의론은 그동안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는 미국·유럽연합·일본·러시아·중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그러한 강대국과 약소국의 지배-예속 관계가 주된 특징이라고 본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은 각 국민국가 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제국주의 국가와 피억압 민족의 첨예한 대립이 중층적 구조를 이룬다. 세계화 불구 국민국가·국민주권이
여전히 자본주의체제 핵심주체
전지구적 주권 출현은 불가능
자본들간의 경쟁이 다극화했을 뿐… 반면, 네그리와 하트, 조정환 등 제국론자들은 오늘날 세계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같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세계제국, 곧 일종의 세계국가 시대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론으로 보면, 사회의 모순 구조는 세계제국 혹은 ‘전지구적 주권’과 세계 ‘다중’의 대립 구도로 단순화된다. 물론 제국론은 이런 단순화된 대립 구도를 이른바 ‘왕정-귀족정-민주정’의 3층 구조의 비유로 보완하려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전체 구도를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이른바 ‘전지구적 주권’이며,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다. 제국론과는 반대로, 제국주의론은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구성 주체라고 본다. 국민국가와 국민주권의 소멸과 이른바 ‘전지구적 주권’의 출현은 제국론자들의 관념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구상이며,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의 변증법’ 때문에 현실화할 수 없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의 변증법’이 뜻하는 바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다수 자본들 간의 경쟁이 자본의 국제화와 경제적 차원의 경쟁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국가(‘자본의 국가화’)를 매개로 지정학적·군사적 경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체제의 위계적 구조와 불균등성은 더 강화된다. 제국주의론의 이런 기본 인식은 지난 세기에는 물론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세계대전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던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격렬한 경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라는 형태로 지속됐고, 1989~91년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에는 좀더 다극화한 제국주의들 간의 경쟁으로 격화하고 있다. 최근의 사례가 다름 아닌 2001년 9·11을 기화로 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및 점령과 이를 둘러싼 서유럽·러시아·중국 등과의 갈등이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부시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점령한 진정한 목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석유가 매장돼 있는 이라크에 미국의 경쟁자인 유럽과 러시아,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또,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 은닉을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것도 실은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 중동 지역과 함께 전략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른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지역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조정환은 미국의 이러한 행동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비용이 석유 확보 등에서 기대했던 경제적 이득을 초과하고, 이 때문에 미국의 재정적자가 악화돼, 미국이 경제적으로 더 취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그가 드는 이유이다. 조정환이 보기에 미국 군대는 ‘지구제국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다중들의 세금’으로 고용된 ‘전지구적 용병대’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의 두 논리, 곧 경제적 경쟁의 논리와 지정학적 경쟁의 논리(영국 역사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권력의 영토적 논리’라고 부른 것)가 서로 상대적 독자성을 지닌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자를 전자로 환원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아프간 침공은
서유럽·러시아·중국과의 갈등 탓
제 3세계 구별 사라진다는 주장도
세계적 불균등·양극화 현상과 모순 조정환의 주장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인정하는 마이클 하트 같은 원조 제국론자의 인식과도 상충된다. 하트는 2001년 이후 부시 정권의 제국주의적 행동은 9·11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로 말미암아, 지난 세기 말 이후, 특히 클린턴 정권 때부터 진행된 제국으로의 이행 궤도로부터 일시적으로 일탈한 것이고, 곧 제 궤도로 복귀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본다. 그러나, 9·11 이후 부시 정권에서 노골화된 제국주의적 거대 세계 전략은, 1992년 국방부의 〈국방계획지침〉과 1997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에서 보듯이, 이미 9·11 이전부터 준비되었으며, 일방주의적 제국주의보다 다자주의적 제국에 가깝다는 이유로 제국론자들이 선호하는 클린턴 정권에 의해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제국론자들은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다. 제국론은 ‘제3세계’라는 개념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한다. 제국의 시대에는 제1세계/제2세계/제3세계 같은 구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3세계는 제1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 중심에 게토와 슬럼으로 자리 잡았고, 제1세계는 제3세계에 이전되어 주식시장, 은행, 마천루 같은 형태로 되어, 이제 중심과 주변, 남과 북은 서로 가까이 접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북 분할이 소멸되고 있다는 제국론의 주장은 수많은 실증 연구들에서 확인되는 세계적 불균등 발전, 세계적 양극화라는 오늘날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제국론은 오늘날 세계에서는 국민국가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래서, 독립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거나 유지하려는 민족주의는 아무런 진보적 의의도 없으며, 제국의 경향을 거스르는 역사적 반동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점령에 대항하는 이라크인들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 문제가 여전히 현재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투쟁은 제국주의적 억압에 맞서 민족자결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므로 테러와 같은 잘못된 전술과 잘못된 정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투쟁을 제국주의 반대자들은 지지해야 한다. 제국주의, 미국 제국주의 또는 줄여 말해 ‘미제’라는 말은 1970년대만 하더라도 ‘빨갱이’의 ‘삐라’에서나 볼 수 있는 불온한 용어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늘날은 미국의 지배계급 중 핵심 집단인 네오콘 자신이 스스로 제국주의자임을 내놓고 자랑스럽게 자임한다. 자신이 제국주의라고 ‘커밍아웃’한 21세기 ‘벌거벗은 자본주의’에 다시 제국이라는 포스트모던한 옷을 입혀 주고, 이것이 제국주의에 비해 더 낫다며 변호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제국론은 진보의 담론으로서 자격을 상실한다. 정성진/경상대 교수
* 정성진 교수는 1957년생이며 현재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에 의거한 현대 한국경제 분석과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 구상 및 대안사회운동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 등이 있습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하는 논쟁은 언뜻 보기에 매우 현학적인 논쟁인 것처럼 보인다. ‘주의’라는 말이 있거나 없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다르다는 말인가? 하지만 ‘제국’과 ‘제국주의’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한다면 이 논쟁은 오늘날 세계체제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선, ‘제국’(Empire)은 대문자로 시작되는 단수 고유명사인 데 반해, ‘제국주의’는 복수의 보통명사인 제국주의들(imperialisms)을 함축하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제국주의론은 그동안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는 미국·유럽연합·일본·러시아·중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그러한 강대국과 약소국의 지배-예속 관계가 주된 특징이라고 본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은 각 국민국가 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제국주의 국가와 피억압 민족의 첨예한 대립이 중층적 구조를 이룬다. 세계화 불구 국민국가·국민주권이
여전히 자본주의체제 핵심주체
전지구적 주권 출현은 불가능
자본들간의 경쟁이 다극화했을 뿐… 반면, 네그리와 하트, 조정환 등 제국론자들은 오늘날 세계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같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세계제국, 곧 일종의 세계국가 시대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론으로 보면, 사회의 모순 구조는 세계제국 혹은 ‘전지구적 주권’과 세계 ‘다중’의 대립 구도로 단순화된다. 물론 제국론은 이런 단순화된 대립 구도를 이른바 ‘왕정-귀족정-민주정’의 3층 구조의 비유로 보완하려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전체 구도를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이른바 ‘전지구적 주권’이며,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다. 제국론과는 반대로, 제국주의론은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나 국민주권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구성 주체라고 본다. 국민국가와 국민주권의 소멸과 이른바 ‘전지구적 주권’의 출현은 제국론자들의 관념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구상이며,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의 변증법’ 때문에 현실화할 수 없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의 변증법’이 뜻하는 바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다수 자본들 간의 경쟁이 자본의 국제화와 경제적 차원의 경쟁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국가(‘자본의 국가화’)를 매개로 지정학적·군사적 경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체제의 위계적 구조와 불균등성은 더 강화된다. 제국주의론의 이런 기본 인식은 지난 세기에는 물론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세계대전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던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격렬한 경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라는 형태로 지속됐고, 1989~91년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에는 좀더 다극화한 제국주의들 간의 경쟁으로 격화하고 있다. 최근의 사례가 다름 아닌 2001년 9·11을 기화로 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및 점령과 이를 둘러싼 서유럽·러시아·중국 등과의 갈등이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부시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점령한 진정한 목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석유가 매장돼 있는 이라크에 미국의 경쟁자인 유럽과 러시아,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또,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 은닉을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것도 실은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 중동 지역과 함께 전략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른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지역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 등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조정환은 미국의 이러한 행동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비용이 석유 확보 등에서 기대했던 경제적 이득을 초과하고, 이 때문에 미국의 재정적자가 악화돼, 미국이 경제적으로 더 취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그가 드는 이유이다. 조정환이 보기에 미국 군대는 ‘지구제국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다중들의 세금’으로 고용된 ‘전지구적 용병대’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의 두 논리, 곧 경제적 경쟁의 논리와 지정학적 경쟁의 논리(영국 역사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권력의 영토적 논리’라고 부른 것)가 서로 상대적 독자성을 지닌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자를 전자로 환원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아프간 침공은
서유럽·러시아·중국과의 갈등 탓
제 3세계 구별 사라진다는 주장도
세계적 불균등·양극화 현상과 모순 조정환의 주장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인정하는 마이클 하트 같은 원조 제국론자의 인식과도 상충된다. 하트는 2001년 이후 부시 정권의 제국주의적 행동은 9·11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로 말미암아, 지난 세기 말 이후, 특히 클린턴 정권 때부터 진행된 제국으로의 이행 궤도로부터 일시적으로 일탈한 것이고, 곧 제 궤도로 복귀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본다. 그러나, 9·11 이후 부시 정권에서 노골화된 제국주의적 거대 세계 전략은, 1992년 국방부의 〈국방계획지침〉과 1997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에서 보듯이, 이미 9·11 이전부터 준비되었으며, 일방주의적 제국주의보다 다자주의적 제국에 가깝다는 이유로 제국론자들이 선호하는 클린턴 정권에 의해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제국론자들은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다. 제국론은 ‘제3세계’라는 개념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한다. 제국의 시대에는 제1세계/제2세계/제3세계 같은 구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3세계는 제1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 중심에 게토와 슬럼으로 자리 잡았고, 제1세계는 제3세계에 이전되어 주식시장, 은행, 마천루 같은 형태로 되어, 이제 중심과 주변, 남과 북은 서로 가까이 접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북 분할이 소멸되고 있다는 제국론의 주장은 수많은 실증 연구들에서 확인되는 세계적 불균등 발전, 세계적 양극화라는 오늘날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제국론은 오늘날 세계에서는 국민국가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래서, 독립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거나 유지하려는 민족주의는 아무런 진보적 의의도 없으며, 제국의 경향을 거스르는 역사적 반동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점령에 대항하는 이라크인들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 문제가 여전히 현재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투쟁은 제국주의적 억압에 맞서 민족자결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므로 테러와 같은 잘못된 전술과 잘못된 정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투쟁을 제국주의 반대자들은 지지해야 한다. 제국주의, 미국 제국주의 또는 줄여 말해 ‘미제’라는 말은 1970년대만 하더라도 ‘빨갱이’의 ‘삐라’에서나 볼 수 있는 불온한 용어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늘날은 미국의 지배계급 중 핵심 집단인 네오콘 자신이 스스로 제국주의자임을 내놓고 자랑스럽게 자임한다. 자신이 제국주의라고 ‘커밍아웃’한 21세기 ‘벌거벗은 자본주의’에 다시 제국이라는 포스트모던한 옷을 입혀 주고, 이것이 제국주의에 비해 더 낫다며 변호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제국론은 진보의 담론으로서 자격을 상실한다. 정성진/경상대 교수
정성진/경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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