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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계에 손가락 다친 루시드폴, 두 번째 ‘앰비언트’ 너머엔

등록 2023-12-19 15:50수정 2023-12-20 02:50

앨범 ‘빙-위드’ 발표
앰비언트 앨범을 발표한 루시드폴. 안테나 제공
앰비언트 앨범을 발표한 루시드폴. 안테나 제공

아뿔싸! 왼손 약지가 동력분무기 벨트에 끼어 부러지고 말았다. 2018년 여름, 귤밭에 농약을 치려던 차였다. 수술은 잘 됐어도 마음은 어지러웠다. ‘기타를 칠 수 있을까?’ 당장 한달 뒤 공연부터 취소해야만 했다. 2014년 제주도로 귀농한 이후 귤 농사와 음악을 병행해오던 그였다.

“수술받고 재활하는데, 심란했어요. 미래가 불안해지니 기존의 어쿠스틱 음악을 못 듣겠더라고요. 그래서 힙합, 네오솔, 트렌디한 팝 등 안 듣던 음악을 듣기 시작했죠. 그러던 중 유독 다가온 음악이 있었어요.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친해지기 어려웠던 앰비언트였어요.”

지난 7일 서울 정동 덕수궁 뒤편에 자리한 갤러리 스페이스 소포라에서 만난 루시드폴이 말했다. 앰비언트는 최소한의 음을 길게 늘어뜨려 만든 전자음악으로, 공감각적이고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

앰비언트 앨범을 발표한 루시드폴. 안테나 제공
앰비언트 앨범을 발표한 루시드폴. 안테나 제공

“어느 순간 앰비언트 음악이 스피커나 이어폰에서 직접 다가오는 게 아니라 주위에 흩어지는 게 느껴졌어요. 마치 향초처럼요. 소리의 질감과 공간감,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흐름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듣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기타를 못 치니 컴퓨터 마우스로 음악 작업을 해야 했는데, 앰비언트가 딱이었다. 생전 안 쓰던 컴퓨터 프로그램을 깔고 소리의 흐름을 파고들었다. 연구하고 만드는 건 생명공학 박사 출신인 그의 특기였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원치 않았던 부상이 나를 가두던 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고 그는 떠올렸다.

반려견 보현의 소리를 이용해 만든 9집 ‘너와 나’(2019)에 앰비언트를 몇곡 넣어봤다. 이후 첫 본격 앰비언트 앨범 ‘댄싱 위드 워터’(2021)를 발표했다. 물에서 얻은 영감과 진귤나무가 보내는 전기 신호음이 음악이 됐다. 그리고 지난 12일 두번째 앰비언트 앨범 ‘빙-위드’를 내놨다. 그는 “딱히 어떤 서사나 메시지를 담으려 하지 않고 그저 최근 만든 5곡을 모았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앨범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루시드폴의 앰비언트 앨범 ‘빙-위드’ 표지. 안테나 제공
루시드폴의 앰비언트 앨범 ‘빙-위드’ 표지. 안테나 제공

첫 곡 ‘마인드미러’는 여덟 마디 모티프가 반복되면서 아주 조금씩 음높이가 변해간다. 인간이 나눈 음과 음 사이를 자유롭게 훑는다. 그는 “남자(M)와 여자(F) 사이 다양한 성정체성(L·G·B·T·Q·I·A…)의 사람들처럼 세상의 숱한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에 대한 음악적 연대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1942년 연주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샘플링해 8배로 늘어뜨리고 해체·재조립한 ‘Aviiir’, 수중 마이크로 녹음한 바닷속 소리, 재래시장 사람들 소리, 미생물이 발효하는 소리, 풀벌레 합창 소리 등을 모아 소우주를 이룬 ‘마이크로코스모’가 이어진다.

타이틀곡 ‘마테르 돌로로사’는 고통받는 어머니를 뜻한다. 1년 내내 공사판인 제주도에서 그는 포클레인, 그라인더, 철근 등이 내는 굉음을 채집했다. 이를 잘게 자르고 섞고 재조립하니 본래의 날카로운 소리 대신 듣기 편안한 음악이 됐다. “소리 폐기물을 업사이클링하는 윤회의 음악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위로하고 싶었어요. 인간들이 자연과 지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파헤치는 행위에 대한 항의이자 속죄이기도 하고요.”

앰비언트 앨범을 발표한 루시드폴. 안테나 제공
앰비언트 앨범을 발표한 루시드폴. 안테나 제공

마지막 곡 ‘트랜센던스’는 무려 1시간에 달한다. 애초 10분짜리 곡을 가족 장례식장에서 반복해 틀면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같은 바다여도 단 한번도 같은 색깔인 적이 없고, 매년 따는 귤도 단 하나도 같지 않은 것처럼 자연의 속성은 ‘반복 없는 반복’이다. 그런 자연을 닮은 긴 곡을 통해 한 사람의 영혼을 저 너머로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는 이 곡에 ‘너머’라는 제목을 붙였다. 영어로 ‘트랜센던스’다.

앰비언트 음악과 함께 지난해 발표한 10집 ‘목소리와 기타’와 같은 기존 노래도 계속할 생각이다. 손가락은 잘 회복됐다. 예기치 못한 부상이 새 음악적 자아를 만들었듯이 삶은, 소리는, 음악은 그렇게 흐른다.

그는 산문집 ‘모두가 듣는다’(돌베개 펴냄)도 발간했다. 음악을 대하는 마음과 이번 앨범 작업기 등을 담았다. 21일부터 내년 1월7일까지 스페이스 소포라에서 같은 제목의 전시회를 열어 사진, 책, 음반 등을 선보인다. 23일 북토크 자리도 마련한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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