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독립영화제 출품작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박수남(왼쪽), 박마의 감독.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유명인이었는데 한국에서는 100살 다되어 이제 데뷔 감독이 된 것 같습니다. 하하”
8일 폐막하는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 부문 상영작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박수남 감독이 말했다. 올해 88살인 박 감독은 딸 박마의 감독(55)과 공동 연출로 이 다큐멘터리를 완성해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젊은 관객들이 영화가 끝나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많은 질문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나 제암리 학살사건 등 오래된 문제에 대해 젊은 세대가 이처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희망을 봤습니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수남 감독이 말했다.
1980년대부터 일본 내 원폭 피해와 강제동원 피해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아온 재일한국인 2세 박수남 감독은 다큐멘터리스트보다 작가로 20대 때 이미 일본에서 명성을 얻었다. 1950년대 말 일본 고마츠가와 지역 여학생 살인사건에서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수사와 재판, 사형집행까지 지속해서 차별받았던 피의자 이진우와 나눴던 서신을 1963년 책으로 묶은 ‘죄와 죽음과 사랑과’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일본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고마츠가와 사건’이다.
당시 이진우와의 대화,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 유족을 만나면서 박 감독은 재일 한국인 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손님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정도로 돈을 벌었던 그의 고깃집은 “책을 읽은, 차별에 시달리던 재일교포와 일본 젊은이들이 편도티켓을 끊어 찾아오는 거처가 됐다.”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서울독립영화제 제공
박수남 감독이 좋아하던 노래 ‘마의태자’를 따서 이름을 지은 박마의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따라다니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함께 만나고 영화들의 전단을 만들고 카메라도 들면서 엄마의 작업을 지원해왔다. 처음으로 모녀가 나란히 공동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이번 작품은 “작품화되지 않은 10만 피트, 50시간 분량의 16㎜ 필름과 그보다 더 많은 6㎜ 음성녹음 기록”을 디지털로 복원하겠다는 박마의 감독의 의지로 완성될 수 있었다.
“예산 문제와 어머니의 건강 등 여러 제약으로 30년 가까이 보관만 하고 있었어요. 이 필름들이 부식되면 여기에 담긴 200여 피해자들의 목소리도 영영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라 다급한 심정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돈을 모았습니다.” 이를 통해 전체 5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을 디지털화해 이번 영화에 담아낼 수 있었다.
한평생 함께 작업해온 모녀 사이지만 공동작업은 쉽지 않았다. “그 갈등은 보통 갈등이 아니고 전혀 아름다운 이야기도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두 모녀 감독의 긴장은 영화 초반 날 선 대화로 등장한다. “어머니는 복원된 필름 속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셨어요. 저와 스태프들은 이와 함께 어머니의 여정을 함께 담으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자이니치 100년의 역사를 담고 싶었죠.” 영화는 딸과 스태프들의 뜻대로 필름 속에 오래 머물고 있던 강제동원과 원폭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이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분투했던 박수남 감독의 삶이 오롯이 담겼다.
황반변성으로 이제 눈이 거의 보이지 않고 나이 들며 암 투병, 뇌졸중 등으로 쇠약해진 박수남 감독이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단단했다. 그는 현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한국기업의 기부금으로 배상하는 ‘제3자 변제’ 방식을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더 얕잡히고 우습게 보이는 꼴이 된다. 일본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간식으로 주는 오므라이스를 한 국가의 정상에게 대접이라고 했던 게 바로 그 징표”라며 “침략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으면 한일 관계는 장기적으로 더 악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마의 감독은 “나 같은 재일한국인 3세들은 여전히 식민지에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눈빛이 바뀌는 일본 사회라 일상에서는 일본인 이름을 쓸 수밖에 없어요. 특히 아베 정권 이후 최근 5년간 분위기가 너무 나빠져서 2018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침묵’을 상영할 때는 그 작은 규모의 상영에 일본 경찰 100명이 왔습니다. 역사 속에 묻혀버린 피해자들의 존재를 회복해야 살아있는 사람들의 인권도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만드는 영화가 그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