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유독 가정을 끌어들이게 하는 사건들이 있다.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지 않았다면, 계엄령이 서둘러 해제됐다면, 총소리를 들은 국방부 장관이 도망가지 않았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대한민국의 역사를 뒷걸음치게 한 12·12 군사 반란이 대표적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불행한 사건 중 하나인 12·12 사태가 마침내 스크린에 걸린다.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 등을 거치며 장르적 세공력이 정점에 오른 김성수 감독의 연출과 주·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놀라운 호연에 힘입어 코로나 이후 대작 영화 중 최고의 완성도라고 할 만한 작품이 탄생했다. 22일 개봉하는 ‘서울의 봄’이다.
영화는 궁정동의 총소리로부터 시작된다. 계엄사령관을 맡은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이성민)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언론을 쥐락펴락하며 최고 권력자 흉내를 내는 전두광 보안사령관(황정민)을 견제하기 위해 이태신 소장(정우성)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정상호가 자신을 강원도 한직으로 쫓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두광은 절친 노태건 9사단장(박해준)과 하나회 동료들을 규합해 반란을 도모한다. 여기까지가 30분가량 진행되는 빌드업이고 많은 이들이 대략 알고 있는 역사적 내용이다.
영화 ‘서울의 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의 봄’의 알맹이는 1979년 12월12일 저녁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에서 총소리와 함께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9시간의 숨 막히는 전개다. 총을 쏘며 정상호를 끌고 가는 반란군과 최한규 대통령 권한대행(정동환)에게 체포동의안 결재를 압박하는 전두광, 전두광의 계략에 요정에서 발이 묶인 이태신과 헌병감 김준엽(김성균) 등의 공간이 빠르게 교차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후 반란을 알아차리고 이를 저지하려는 이태신의 사투, 수시로 뒤바뀌는 시나리오 속에서 무모하게 감행되는 반란군의 도발, 우왕좌왕하며 무력하게 무너지는 엘리트 군인들의 민낯이 통렬하게 펼쳐진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날의 긴박한 상황과 전방 부대까지 서울로 이동했던 군사 움직임, 예견됐던 신사협정의 배신까지 관객은 마치 현장을 목도하는 당사자가 된 것처럼 숨 가쁘게 그때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서울의 봄’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면서도 역사가 침묵하는 9시간의 빈틈에 영화적 상상력을 촘촘히 채워 넣는다. 반란군들은 전두광의 야심에 빌붙어보고자 30경비단에 모였지만 욕망과 불안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육군본부에 모인 군 간부들은 눈치만 보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성수 감독은 “이런 순간에 내리는 판단은 자신이 처한 위치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연속성에서 나온다.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 엘리트 군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형편없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2019년 제작사에 시나리오를 받은 김 감독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반란군의 승리를 기록한다는 게 자칫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까 우려돼” 고사했다. 하지만 고3 때 한남동 집 앞에서 들은 뒤 머릿속에 새겨진 당시의 총소리는 “결박당한 느낌으로 10개월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영화 ‘서울의 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야심과 신념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2시간 20분을 이끌어가는 전두광과 이태신 캐릭터는 영화적으로 각색됐다. 다혈질에 강인한 군인의 면모를 지녔던 실제 모델 장태완 소장과 달리 정우성이 연기하는 이태신은 차분한 지식인처럼 그려진다. 김 감독은 “장태완 소장은 호랑이 같은 분이었는데 전두광과 두 인물이 끓어오르듯 대결하는 것보다는 사태를 냉정하게 보기 위해 가라앉은 시선이 필요했다”면서 “원리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온화하고 낭떠러지 끝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인물이 지금 세대에게 더 울림을 주는 리더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캐릭터를 다듬었다”고 했다.
마침내 진압군의 굴복을 받아낸 승리의 순간 전두광은 기뻐 날뛰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혼자 걸어 30경비단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포효한다. 김 감독은 “이게 부끄러운 승리라는 걸, 막말로 똥뒷간에서나 환호할 수 있는 승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도 떳떳하지 않다는 걸 느끼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이겼다고 소리 지르는 전두광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