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재능있는 신인 감독의 작품을 소개하는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대된 영화 ‘화란’의 영어 제목은 희망 없는 이라는 뜻의 ‘호프리스’(Hopeless)다. 11일 개봉하는 ‘화란’은 네덜란드를 옛날식으로 표현한 음역어로 희망 없는 현실을 떠나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다들 비슷하게 산”다는 네덜란드로 떠나고 싶었던 소년의 이야기다.
말 없는 고등학생 연규(홍사빈)는 중국집 배달로 부지런히 돈을 벌어 엄마와 함께 네덜란드로 떠나는 게 유일한 꿈이다. 지독한 가난에 더해 새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 휘두르는 폭력으로 연규는 늘 위축되어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새아버지가 데려와 가족이 된 하얀(김형서)이 학교의 질 나쁜 아이들로 인해 곤경에 빠지자 연규는 하얀을 돕기 위해 돈을 구하다가 치건(송중기)이 중간보스로 있는 조직에까지 흘러가게 된다.
반항기 있지만 아직 미숙한 남자가 폭력 조직에 들어가 희생양으로 버려지는 이야기는 누아르 영화의 흔한 얼개 중 하나다. 주류사회의 질서에서 벗어난 두 남자의 브로맨스는 액션 드라마 영화의 익숙한 코드이기도 하다. ‘화란’은 이처럼 익숙한 얼개와 코드로 관객들에게 어필하면서도 일반적인 장르의 길을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연규가 처해있는 지극히 암담한 현실을 냉정하게 담으면서 장르극이 기술적으로 제공하는 시각적,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최대한 억누른다.
조직 폭력에 휘말려 점점 위험한 세계로 빠져드는 연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감 없는 교실 안의 소년처럼 구부정하고 안쓰러운 모습으로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폭력에 직면한다. 특히 초반 한 시간 동안 연규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만연한 폭력과 무기력한 피해자들, 그들을 방치하는 냉정한 사회의 온도가 범죄영화 특유의 어두운 톤과 거친 질감에 잘 녹여져 있다.
‘화란’은 송중기가 노개런티로 작품에 참여해 화제가 됐다. 그가 연기하는 치건은 연규처럼 어린 시절 버림받아 폭력조직에서 자라나 중간 보스가 됐지만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애틋함으로 연규를 돕는다. 그동안 티브이 드라마에서 부드럽고 스마트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왔던 송중기가 왜 노개런티로 기꺼이 ‘화란’에 참여하고 싶었는지 느껴지는, 복잡한 내면을 누르고 있는 상남자 캐릭터다. 송중기는 ‘화란’으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토크, 액터스 하우스 프로그램 등에 참여해 “‘화란’은 가정폭력이라는 공통적 환경에서 자란 소년과 청년이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로 저는 이 작품을 (두 남자의) 멜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5년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화란’의 대본을 쓰고 연출을 준비했다는 김창훈 감독은 시사 후 인터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쓰던 시기에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면서 “한 소년이 점점 더 냉혹한 세계에 도달하게 되면서 본성과 다른 삶을 강요당하고, 위태롭게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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