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개봉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올여름 한국영화 4파전 가운데 가장 독특한 영화다. 다른 세 작품과 달리 흥행공식에 맞춰 이야기와 볼거리를 조합한 이른바 기획영화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갈래를 탄다면 ‘해운대’(2009), ‘엑시트’(2019)같은 재난영화로 분류될 수 있지만 재난과 맞서 싸우는 인간의 지혜와 용기를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굳이 닮은 작품을 찾으려면 먼저 떠오르는 건 ‘기생충’(2019)이다. 신랄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뛰어난 밀도로 몰입하게 한다. 코로나 이후 나온 한국 상업영화 가운데 가장 도전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 2편 ‘유쾌한 이웃’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원작이다.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리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철저히 내부자의 관점으로 재난 이후의 삶을 그린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건물인 황궁아파트 103동으로 생존자들이 몰려들자 아파트 주민들은 위협을 느낀다. 부녀회장의 주도로 회의를 거친 입주민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외부인의 침입을 막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나선다.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재난 속에서 당신의 집이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면 외부인과 안식을 공유하겠는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난민’을 좀비 아닌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빌라촌과 아파트 단지를 가르는 육교 하나를 넘기 위해 20년 넘게 고생했다는 한 주민의 울분은 손쉽게 외부인 배제의 명분이 된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똘똘 뭉치는 것 같지만 처음부터 균열의 조짐이 드러난다. 조별 대표를 뽑으면서 자가 소유자와 세입자를 가르고 기여도에 따라 배급을 차등분배하는 ‘민주적 합의’는 불만과 적개심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잉투기’(2013), ‘가려진 시간’(2016)의 엄태화 감독은 원작 웹툰이 아닌 박해천의 한국 아파트 문화 연구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화의 제목을 따왔다. 엄 감독은 “웹툰 원작을 본 뒤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자 이 책을 읽고 시나리오 가제로 먼저 붙였었다”면서 “콘크리트는 아파트를,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는 않는 이상적 공간을 상징하는데 두 단어의 아이러니한 조합이 현실과 잘 맞아 떨어져 영화 제목으로 저자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감독은 주거의 한 형태가 아니라 재산과 권력, 욕망의 총합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아파트가 가지는 상징성을 재난이라는 필터로 걸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다소 무겁고 추상적일 수 있는 주제의식을 구체적인 질문과 재미로 이끌어내는 건 현재의 ‘우리’를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주인공 영탁은 이병헌의 놀라운 호연에 힘입어 올해 최고의 캐릭터로 꼽힐 만하다. 택시기사로 일하며 내 집 한 채 가지기 위해 안간힘 쓰며 살던 영탁은 우연한 계기로 입주민 대표가 된다. 어리바리하던 그는 권력을 쥐자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용기와 리더십을 발견하지만 점차 주민들 위에 군림하며 의심과 광기에 사로잡히는 폭군이 되어간다.
박서준이 연기하는 민성은 많은 관객이 자신을 투사시킬만한 인물이다. 평범한 공무원인 그는 주민들의 이기심이 내키지 않지만 살아남기 위해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배타적 체제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아내 명화(박보영)로 인해 영탁의 미움을 받고 궁지에 몰리자 적극적인 자경단 행세를 하고 이는 그의 내면까지 파고든다. 박서준은 “영화를 찍는 내내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면서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면면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가족을 지키려는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가족과 재난이라는 익숙한 소재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여름 영화의 관습에 도전하는 이 작품이 어떤 결과를 내올지 주목된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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