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알던 노래를 오랜만에 듣다가 놀랄 때가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감성을 담은 노래도 있지만, 이미 완전히 바뀌어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노랫말도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 청취자가 사연과 함께 한스밴드 노래 ‘선생님 사랑해요’를 신청했다. 나온 지 25년이 돼가는데도 스승의 날만 되면 신청이 급증하는 노래인데, 5월도 아닌 한여름에 이 노래가 나가도 괜찮을까 싶어 들어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나의 첫사랑 너무 소중해/ 그 사람 나를 어떻게 보실까/ 내가 바라는 건 단 한번이라도/ 나 그분 앞에서 여자이고 싶어’
1990년대까지는 그랬다. 학생이 교사에게 연정을 품는 일이 노래로 나와 사랑받을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선생님을 이성으로 좋아하는 애들을 정말 쉽게 볼 수 있었다. 요즘도 그럴까 싶어 아들 녀석에게 물어봤더니, 학생과 교사가 그러면 큰일 나는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이 노래보다 몇년 먼저 나온 이현석의 ‘학창 시절’ 가사는 훨씬 더 순한 맛이다.
‘가끔은 무거운 눈을 참기가 힘들어/ 나도 몰래 꿈속으로 가/ 무서운 선생님의 꾸중으로/ 힘든 하루 보냈지/ 그래 그때는 몰랐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학창 시절을/ 나는 사랑할 거야’
언젠가부터 학창 시절을 추억하는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학교폭력을 소재로 삼은 웹툰과 드라마가 넘쳐난다. 당연히 현실의 반영이다. 같은 아이들끼리 조직폭력배 못지않게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결국 피해 학생이 심하게 다치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뉴스를 얼마나 많이 보았나. 그런데 이제 학부모까지 괴롭힘의 가해자로 나섰다. 피해자는 선생님이다.
학부모 민원에 힘들어하던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난 사건 이후, 같은 학교 동료 교사들은 물론이고 전국 교사들이 들고일어났다. 상복처럼 검은색 옷을 입은 선생님들 수백 수천 명이 한데 모여 슬픔과 분노를 나누는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선생님들이 공개한 악성민원 실제 사례는 황당함의 연속이다. 또 다른 차원의 학교폭력이다. 손과 발로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과 달리 학부모는 사회 경험으로 익힌 교묘한 방법으로 상대를 괴롭힌다는 점이 다르긴 하다.
온라인 맘카페를 위시한 엄마들의 극성이 소아과 전문의 수가 급감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이 입게 된다. 학부모들의 과도한 민원 때문에 우수한 청년들이 교사라는 직업을 덜 선호하게 된다면, 역시 그 피해는 학생들이 입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의 흐름은 단기간에 되돌리기도 어렵다.
교사의 권위가 강력했던 시대에는 교사가 가해자이고 학생이 피해자인 경우가 보통이었다. 학생과 학생 사이의 폭력은 늘 있었으나 그 잔혹함이 심해졌고, 학부모가 선생님을 괴롭히는 가해자로 등장하는 일이 최근 들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렇듯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는 시대에 따라 변했지만, 그때의 폭력도 잘못되었고 지금의 폭력도 잘못되었다. 제도를 바꾸고 공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라도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 학교는 불가침의 신성한 곳이라는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물론 대다수 학부모는 선생님을 존중하고 신뢰할 것이다. 눈물 나게도, 스스로 삶을 마감한 선생님이 몇달 전에 쓴 손편지에도 아이들과 학부모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하다. 아이 손을 잡고 병원에 가는 부모님들도 대부분은 의사를 믿고 진료받을 것이다. 어느 집단이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비율은 극히 낮지만, 모집단 숫자가 워낙 크다는 게 문제다. 한반에 한두명, 하루 환자 중 한두명만 진상으로 돌변해도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학창 시절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노래가 더는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때가 좋았지’ 식의 푸념은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증거일지도 모르니까. 중요한 건 학교에 만연한 폭력과 괴롭힘을 이제라도 없애는 일이다. 이 일은 수능 시험에서 킬러 문항 출제를 막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며 우선순위도 먼저다.
글을 맺으며 다시 한스밴드의 노래를 들어본다. 지금 나왔다면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르겠으나 타임캡슐처럼 그 시절의 정서를 제대로 담아냈다. 명곡 인정.
이재익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