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는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역사학의 눈으로 ‘분단과 통일’ 문제에 길을 내고자 했던 진보 역사학계의 거목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0.
고인은 193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959년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부터 같은 대학에서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으며 조선 후기 상업자본이 마치 작은 싹처럼 자라고 있었다는 데 주목했고,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1973)을 썼다. 조선 후기 관영수공업장에서 독립 생산자가 형성되고 노동력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이 책은 우리 국사학계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의 대표 저작으로 꼽힌다.
고인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해방 이후 현대사에 관심을 가지며 ‘역사학의 현재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인의 탐구는 ‘분단시대’라는 선구적인 용어로 집약됐다. “오늘날의 국사학이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사론을 세워나가야 하며 거기에서 국사학의 현재성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 저작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은 우리 사회와 여러 지식인들에게 널리 충격을 주었다. 이 같은 현실 참여 활동으로 1980년 광주항쟁 직후엔 신군부에 의해 항의집회 성명서 작성과 김대중으로부터의 학생선동자금 수수 혐의 등으로 구금되었다가 고려대에서 해직됐으나, 4년 뒤 복직했다.
고인은 1999년 정년퇴임 이후에도 연구·저술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월간 <사회평론> 발행인,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 발행인> 발행인 등을 맡으며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을 화두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상지대 총장으로서 학원 민주화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역사 바로세우기’를 이끌기도 했다. 국가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장,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등도 역임했다. 민족해방운동의 경제적 기초가 되는 식민지시대 민중의 삶을 탐구한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1987), 자신의 연구를 시민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실천적 역사교양서 <20세기 우리 역사>(1999), 개인의 삶을 역사학적으로 재구성한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2010) 등 180여권의 학문적 성과를 남겼다.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민족문제연구소는 23일 오후 고인의 궂긴소식을 알리며 “선구적인 업적을 남겨 한국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에 앞장서는 등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헌신했다”고 기렸다.
빈소는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5일 오전 8시30분이다. 장례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른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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