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이 워낙 심한 동네가 엔터테인먼트 업계지만 김선호는 2021년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의 나락을 고스란히 경험했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tvN)로 오래 쌓아온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가 싶더니 사생활 폭로 스캔들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낙인이 찍혔다. 시간이 지나며 왜곡된 내용이 보정됐지만 배우이자 연예인으로 받은 타격을 추스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귀공자> 촬영할 때 기억이 하나도 안나요. 첫 영화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찍을 때 너무 긴장을 했고,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현장을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죠.” 21일 개봉에 앞서 12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카페에서 만난 김선호가 말했다.
그의 영화 데뷔작인 <귀공자>는 <신세계> <마녀>의 박훈정 감독 신작이다. 사달이 나면서 엎어질 뻔한 캐스팅을 박 감독이 믿음으로 밀고 나갔다. “감독님이 저한테는 쿨하게 “할 수 있어?” 물은 게 다였는데 캐스팅을 엎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믿어주신 감독님과 스태프들에게 책임감과 사람으로서의 도리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해서 더 긴장을 많이 했던 현장이었어요.”
<귀공자>에서 김선호는 ‘맑은 눈의 광기’어린 주인공을 연기한다. 한국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온 코피노 마르코(강태주)를 추격하면서 마르코를 잡아 이용하려는 또 다른 인물인 한 이사(김강우), 또 다른 추격자 윤주(고아라)와도 대결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한마디로 선인지, 악인지, 조력자인지, 빌런인지 구별하기 힘든 인물이다.
“현실에 존재하기 힘든 인물이라서 대본을 읽으며 왜? 왜 따라다니지? 도와준다고 왜 말을 안하지? 질문이 꼬리를 이었죠.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캐릭터들을 참고했어요. 웃으면서 순수하게 잔인한 행동을 하잖아요. 일을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추격과 목숨이 위험한 상황까지는 즐기는, 감독님의 세계관 속의 개성 강한 인물이죠.”
웃음 띈 얼굴에 깔끔한 수트 차림으로 쉼 없이 달리고 쫓는 “깔끔한 미친놈” 연기는 물리적 도전이기도 했다. “숨이 터져나가게 달리다가 멈춰 웃으면서 머리를 매만지고 이러는 게 처음엔 정말 힘들더라고요. 한번은 태주가 와서 쓱 영양제 음료수를 건네고는 “이거 먹으면 한시간은 더 뛸 수 있어요” 해서 같이 마시고 같이 뛰기를 반복했죠. 진짜 열심히 뛰었는데도 시사 때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저걸 더 뛰었어야 하는데, 좀 더 잘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네요.”
2009년 연극 무대로 데뷔한 뒤 2017년 <김과장>(KBS2)으로 드라마에 첫발을 내디뎠고, 2023년 주인공으로 영화 데뷔를 하기까지 차근차근 밟아왔다. 성실함이나 노력의 무게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삶의 흘러갈 수 있다는 경험도 했다. 대중의 뜨거운 관심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내가 성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신경 써주는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많다는 건 깨달은 것 같다”고 했다.
“다음에도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자” 배우로서의 목표는 벌써 달성한 것 같다. <귀공자>에 이은 박훈정 감독의 차기작 <폭군>에도 차승원, 김강우와 나란히 캐스팅돼 지난 4월 촬영을 마쳤다. 최근 촬영을 시작한 김지운 감독의 드라마 <망내인>의 촬영까지 영화 속 ‘귀공자’처럼 숨 돌릴 틈 없이 달리고 있다.
“<폭군>의 캐릭터 물을 빼내면서 <망내인>을 연기하고 있어요. 칭찬도 금방 잊어버리고 안좋은 평가에도 주저앉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은, 무엇을 하든 좀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21일 개봉.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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