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역할을 물으면 배우들은 대개 개성 강하고 사연 많은 캐릭터를 예로 든다. 사이코패스를 포함한 악역, 현란한 액션물 주인공도 많이 거론한다. 보여줄 게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 그런데 이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과 잘 지내는 착하고 상처 없는 청소년을 하고 싶어요. 스무살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 못 해본 평범한 10대 역할을 하고 싶어요.” 2005년생 배우 전채은이다.
그는 2020년 독립영화 <돌멩이>의 주연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이제 겨우 3년차. 그런데 2021년 <악마판사>를 시작으로 <오늘의 웹툰>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 <작은 아씨들>까지 2년간 쉼 없이 내달렸다. 맡은 역할은 죄다 이런 식이었다. 실패한 만화가인 아빠와 벽을 쌓고 지내거나(<오늘의 웹툰>), 가정불화로 호흡 장애가 있거나(<작은 아씨들>). 하나같이 복합적인 이유로 마음이 어긋난, ‘만만한 청소년’이 아니다. “대본 연구할 때 이 아이들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이 커요. 제 이전 작품을 본 분들한테는 또 다른 느낌을 줘야 하니까 내면을 겉으로 잘 드러내야 하는 게 늘 숙제였어요.”
똑 부러지게 말하는 이 배우가 찾은 답은 영리하게도 눈빛이다. 그는 “화를 낼 때나 생각을 깊게 할 때, 슬프고 아플 때, 눈동자에 강약 조절을 하려고 연습한다”고 했다. <한겨레>가 그를 한국 드라마를 빛낼 기대주로 꼽은 이유도 이 눈빛이다. 눈빛 좋은 배우는 많지만, 그는 쌍꺼풀 없이 가로로 긴 눈매가 묘한 느낌을 준다. <작은 아씨들>과 <당신이…>에서, 상대를 가만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대사가 없지만 많은 감정이 느껴진다. <돌멩이>에서 그가 누군가한테 가지 말라며 울부짖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돌멩이> 예고편을 보고 <악마판사>에서 오디션 제안이 왔고, 그 작품을 보고 또 다른 작품 제안이 오는 식이었다”는데, 청소년 배우를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어렸을 때 관심사가 다양했던 것도 감정 연기에 도움 되지 않았을까. “곤충을 좋아해서 곤충학자도 되고 싶었고, 위인전을 읽고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노래하는 거 좋아해서 합창단(남양주시립소년소녀합창단)에서 활동했고….” 끝이 없다. 결정적인 건 이거다. “사람의 감정도 읽고 싶어서, 심리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어렸을 때부터 사람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런 게 흥미로웠어요. 동생 심리를 늘 관찰했죠.(웃음) 연기하려면 여러 경험을 해봐야 하니 대학에서 공부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올해는 당장 한 작품이라도 더 하는 것보다, 좀 더 신중하게 바라보며 학업을 충실히 하는 중이다. “지난해 와이어 달고 연기하기, 레드카펫 밟기 같은 버킷리스트를 이뤘다”며 “한두개 이루니 뭐든 다 이뤄질 것 같은 희망이 생긴다”고 했다. 다음 버킷리스트는? “연기대상 참석. 그리고 상처 없는 청소년!”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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