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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우리를 열받게 한 서양 콘텐츠 속 혐오…K드라마는 자유로운가?

등록 2023-05-24 08:00수정 2023-05-24 10:38

‘보라! 데보라’ 아우슈비츠 비극 외모 치장에 비유 등
역사·문화 왜곡 작품 난무…특정 질병 무지·혐오도
나치수용소 생존 문제를 외모 치장으로 설명한 ‘보라! 데보라’. 이엔에이 제공
나치수용소 생존 문제를 외모 치장으로 설명한 ‘보라! 데보라’. 이엔에이 제공

지난달 12일 시작한 <이엔에이>(ENA) 드라마 <보라! 데보라> 9회. 연애코치 ‘연보라’(유인나)는 ‘이수혁’(윤현민)한테 외모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자기 배설물 위에 누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한컵의 물을 받아 반만 마시고 나머지 반으로는 세수했다. 유리 조각으로 식판 뒤 얼굴을 보면서 면도도 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라는 거다.”

역사적 비극을 외모 치장에 빗대어 왜곡한 장면에 시청자 항의가 빗발치자, 제작진은 “그럴 의도는 없었다”며 사과했다. 다시보기에서 이 장면을 삭제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보라! 데보라>가 한국 드라마에 퍼지고 있는 ‘무지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등을 외모 치장으로 규정하는 것은 감수성 부족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오랜 경력의 드라마 피디는 “나치수용소 비극을 이런 장면에 인용한 것도 충격적이고 작업 과정에서 문제를 인지한 이가 없었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이라며 “대사에 책 제목이 언급됐다면 책을 읽었다는 것인데, 책을 읽고도 의미를 몰랐다면 문제이고 온라인에서 돌아다니는 내용만 갖고 마음대로 해석했다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대에 드라마 제작 편수가 늘고 규모가 커지면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 등을 잘못 다루는 경우가 늘고 있다. <작은 아씨들>(tvN)은 “제일 잘 싸운 전투에서 한국군 1인당 베트콩 20명을 죽였다”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 영웅” 등이라고 표현해 베트남에서 반발을 사고 방영 중단됐다. <수리남>(넷플릭스)에서는 수리남을 마약 밀매가 이뤄지는 부패한 국가로 묘사해 외교 문제로 번질 뻔했다. 드라마 제작 관련 일을 하는 관계자는 “드라마 배경이 되는 지역을 공부하는 것은 기본의 문제다. 실수로 치부하고 관대하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주인공 삶 바꾸려고 한약 먹고 간 나빠져 이식하게 만든 ‘닥터 차정숙’. 제이티비시 제공
주인공 삶 바꾸려고 한약 먹고 간 나빠져 이식하게 만든 ‘닥터 차정숙’. 제이티비시 제공

특정 질병에 대한 무지와 혐오를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닥터 차정숙>(JTBC)은 부모가 크론병을 앓는 남자한테 “이런 못된 병을 숨기고 결혼할 수 있느냐. 이 병 유전도 된다면서. 이 결혼 포기해달라”는 막말을 퍼부어 논란이 됐다. 또 ‘차정숙’(엄정화)이 한약을 먹고 간이 나빠져 이식 수술을 받게 되는 설정도 한의사들의 반발을 샀다. 한 시청자는 “부모가 아무 말이나 퍼붓는 상황이어서 캐릭터상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있다고 해도 뒤에 차정숙이나 의사의 대사를 통해 크론병은 그런 게 아니라는 정확한 정보를 줘야 했다”고 말했다.

손쉬운 설정이라는 점은 더 큰 문제다. <닥터 차정숙>에서 한약 먹고 간이 나빠지는 상황은 차정숙이 의사의 꿈을 다시 꾸는 데 활용된다. 차정숙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꼭 한약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tvN)도 나희도(김태리)가 백이진(남주혁)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담으려고 9·11 테러를 등장시켰다. 방영 당시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데 대형 참사를 활용한 건 적절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 드라마 작가는 “극 중에서 어떤 계기를 손쉽게 만들려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했다.

2020년 영국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시즌2 예고편에서 성병에 걸린 등장인물의 “내 XX에서 김치 맛이 난다”는 대사에 한국 시청자들은 반발했다. 2021년 영화 <몬스터 헌터>의 인종차별적 대사에도 항의했다. 한국 콘텐츠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 국내 콘텐츠 시장이 커지면서 오히려 특정 직업군 비하 등의 문제에서 아픈 역사를 가볍게 소비하는 문제로 번지고 있다. 오티티 시대는 콘텐츠로 문화를 흡수한다. 한 나라의 역사 왜곡과 정체성 훼손 문제는 문화 침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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