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망미동 복합문화공간 에프1963 내부에 자리한 국제갤러리 부산점과 옆 석천홀에서 열리고 있는 줄리 오피 개인전의 모습. 작가가 최근 작업한 대형 도시인 군상 조형물들이 서있다. 노형석 기자
찬란한 주홍빛 노을로 물들어가는 부산 을숙도 강변의 오후. 이국적이기까지 한 이 철새도래지 풍광을 창밖으로 비춰 보여주는 미술관. 수풀로 온통 벽체를 덮은 미술관 내부 영화관에 들어가면 중앙아시아의 요지경이 나타난다.
카자흐스탄 우주기지의 로켓 발사대와 우주 기지 근방에서 무당들이 영험한 기운을 받는 접신의 장소들이 등장한다. 거기서 차를 타거나 전철을 타고 1시간여 걸려 서쪽 시내로 가면 저 유명한 국민문화재 <자화상>의 작가 공재 윤두서가 실제로 자기 얼굴을 비췄다는 전설의 백동거울과 오늘날 현대식 주방의 원형이 된 프랑크푸르트 부엌 디자인을 구경할 수 있다. 좀 더 욕심을 내어 동해선 전철 타고 북상하면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거장의 명작과 이건희 컬렉션의 명품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울산의 전시 잔치도 기다린다.
지금 부산과 울산은 미술과 역사의 바다로 일렁거린다. 이달 초부터 전철로 40~50분 거리인 부산과 울산의 공공미술관과 갤러리에서는 서울 못지않은 양질의 전시 콘텐츠들이 무더기로 선보이고 있음. 미술, 문화재 애호가들 사이에서 1박2일 혹은 2박3일짜리 아트투어를 하는 게 일종의 트렌드가 될 만큼 화제를 낳고 있는 부울 지역의 주목 전시들을 살펴본다.
17세기 일본에서 들여온 백동거울. ‘조선의 역관’전을 대표하는 출품유물 가운데 하나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소장했던 것으로 공재가 전남 해남의 거처 녹우당에서 자화상을 그릴 때 비춰보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유물이다. 노형석 기자
다른 곳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한다면 우선 갈 수 있는 곳이 대연동 부산박물관. 조선 시대 역관의 활동상을 다룬 특별기획전 ‘조선의 외교관, 역관’이 지난주 개막했다. 조선시대 내내 국외 사신단 행차와 부산 등의 국경 지역 무역과 외교교섭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던 역관의 활동상과 우리 문화사에 남긴 다양한 자취들을 150여 점의 유물로 보여준다. 특히 부산에 있던 일본인 촌인 왜관의 역사와 왜인들과의 소통 구실을 했던 지역 외교관인 소통사의 활약상, 그리고 조선 중후기 새로운 시각문화의 유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역관의 예술적 안목 등을 색다른 수집품 등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역관 등 중인 출신 문인들의 풍류 사회 모습을 담은 유숙의 1853년작 <수계도첩>과 공재 윤두서가 소장했던 17세기 일본제 백동거울은 전시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백동거울은 공재가 전남 해남의 거처 녹우당에서 자화상을 그릴 때 비춰보았던 것으로 드물게 공개된 유물이다. 7월9일까지.
역관 등 중인 출신 문인들의 풍류 시회 모습을 담은 유숙의 1853년작 <수계도첩>의 일부분. ‘조선의 역관’ 전을 대표하는 출품작들 가운데 하나다. 노형석 기자
해운대에 가까운 망미동 복합문화공간 에프(F)1963에는 현대미술과 근대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시를 만나게 된다. 국제갤러리 부산점과 석천홀에서 차려진 영국의 현대미술가 줄리안 오피의 개인전은 2018년에 이어 두 번째 부산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로, 공들여 만든 가상현실(VR) 작품들이 관람의 핵심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걷거나 율동하는 사람들을 단순화한 동영상 외에 고풍스러운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든 회화와 거대한 군상 조각, 라이브 퍼포먼스 등 43점의 작품들을 통해 오피의 다채로운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틱톡 영상에서 셔플 춤을 추는 이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춤추는 사람들의 엘이디(LED) 동영상과 가상공간에서 거대한 인물군상들의 도보 모습을 바로 옆에서 감상하다 보면, 삶의 역동성과 활력을 전해주는 한편 숨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현대 문명 체계의 기계적이고 삭막한 이미지도 섬뜩하게 와 닿는다. 7월2일까지.
이 전시장 바로 인근에 있는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서는 20~21세기 인테리어 공간 디자인사를 한눈에 섭렵할 수 있는 자리가 차려져 있다. 독일 비트라디자인 뮤지엄과의 협력전시인 ‘홈 스토리즈’다. 1960년대 이후 세계 미술과 디자인의 역사를 휘저었던 핀율 의자, 앤디 워홀의 팩토리 작업 공방, 주방 공간 디자인의 혁신을 몰고 왔던 마가레테 쉬테 리호츠키의 <프랑크푸르트 키친>(1926)의 원형 모델 공간, 아돌프 로스의 미니멀한 건축 미학이 반영된 비엔나 분리파의 건축공간도 볼 수 있다. 10월1일까지.
부산 망미동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 마련된 독일 비트라디자인 뮤지엄과의 협력전시인 ‘홈 스토리즈’의 전시장. 20세기초 주방공간 디자인의 혁신을 몰고왔던 <프랑크푸르트 키친>(1926)의 원형 공간이 그대로 선보이고 있다. 노형석 기자
부산 을숙도 옆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미술관 속 영화관’이 등장했다. 개관 5주년을 맞아 기획한 ‘2023 부산모카 시네미디어’ 전시회로 미디어 설치작품과 길고 짧은 실험적 영화와 장편 영화 100여 편을 온종일 상영한다. 특히 안쪽의 전용관 ‘극장 을숙’은 의자와 스크린, 음향, 방음 시설 등 상설영화관 시설이 그대로 들어서 있다. 사우다 이스마일로바의 에스에프 무속 영상, 기후변화에 대한 픽션, 논픽션 영화 등 기획자인 김소영 영화평론가가 발굴한 전세계 주요 영상 작가와 영화감독들의 수작들을 앞으로 석달 동안 계속 볼 수 있다. 8월6일까지.
이 밖에 부산 해운대 벡스코역에서 동해선 전철로 50분 거리인 울산시립미술관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애호가들도 있다. 이 미술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의 부울경 지역 마지막 순회전과 지난해 설립 당시부터 수집에 주력한 세계적인 영상 미디어아티스트 거장들의 수작 전시회를 한자리에 모은 컬렉션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5월21일까지.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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