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 중견 영화 제작자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 대형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내년 겨울부터 극장에 걸 한국영화를 구하기도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지만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국 영화산업의 비상 신호음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18일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3월 한국 영화산업 결산’ 자료를 보면 지난달 한국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전체 관객의 26.8%(187만명), 매출액 점유율은 25.1%(215억원)로 나타났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극장 운영이 제한됐던 2020~2022년을 제외하면 영진위가 집계를 시작한 2004년 이후 3월 수치로는 가장 낮다. 팬데믹 전인 2019년 3월과 견주면 관객수는 30%, 그 사이 극장 관람료가 40%가량 올랐음에도 매출액은 40% 수준에 불과했다.
영화 <웅남이>. 씨제이 시지브이(CJ CGV) 제공
1월부터 개봉한 주요 한국영화 개봉 성적을 보면 참혹한 수준이다. 설 연휴 대작 영화였던 <교섭>과 <유령>을 비롯해 모든 개봉작이 손익분기점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관객수 100만명 이상 동원한 영화는 현빈·황정민 주연의 <교섭>뿐이다. 2019년 같은 시기엔 9편이 관객수 100만을 넘겼고 200만명 이상 넘긴 영화도 5편이나 있었다. 한국영화의 최고 호황이었던 2019년과 긴 시간 극장이 사실상 문 닫은 팬데믹을 거쳐온 지금 상황을 단순 비교할 수 없지만 한 분기에 개봉하는 모든 한국 상업영화가 손해를 보는 국면은 사상 초유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관객을 뺏기고 극장 관람 문화가 꺾이면서 투자배급사들은 투자와 개봉 포트폴리오를 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최대 투자배급사인 씨제이이엔엠(CJ ENM)은 <더 문>(김용화 감독), <외계인+> 2편, <베테랑> 2편 등 굵직한 대작들을 가지고 있지만 개봉 일정표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이미 나와 있을 극장 최성수기 여름 개봉 일정을 잡은 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뉴)가 배급하는 류승완 감독의 <밀수>(7월26일)가 유일하다. 씨제이이엔엠 관계자는 “코로나 전 같으면 이전까지의 개봉 데이터에 기반해 100만, 300만, 1천만 등 대략적인 목표 설정을 잡고 다양한 제작 규모의 영화 개봉 일정을 배치했지만 지금은 관객 수 예측이 사실상 어려워진 상태라 개봉 일정을 확정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병헌·박서준이 주연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여름 개봉 시기를 조율 중인 롯데엔터테인먼트 쪽에서는 “전에는 모니터링 시사 반응을 참고해 관객 수를 예측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올해 초 개봉했던 권상우 주연의 <스위치>도 모니터링 반응은 괜찮았지만 흥행 성적은 손익분기점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개봉작들이 판판이 흥행에 실패하는데다 코로나 유행기에 개봉 시기를 못 잡았던 개봉 대기작들이 쌓이면서 투자도 위축되고 있다. 영화 투자사들은 제작사에서 제안받은 시나리오가 모이면 직원들이 함께 검토하는 투자심의 절차를 거치는데 투심위가 열리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고 각 사들은 입을 모은다.
<밀수>의 투자배급사인 뉴의 투자 관계자는 “투자 결정에 더 신중해진 건 사실이다. 옛날처럼 배우나 감독의 이름값만으로 100억원, 200억원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콘텐츠산업 전체의 투자가 줄어든 건 아니지만 오티티 시리즈 등으로 투자가 분산되다 보니 영화 쪽은 극장에서 특별히 소구할 수 있는 작품에 투자하려는 흐름이 전체적으로 강해졌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개봉 대기작이 남아 있는 지금보다 내년 말이나 후년에 더 큰 위기가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화 <리바운드>. 바른손이앤에이(E&A) 제공
개봉작들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순제작비의 최소 30% 이상을 마케팅비로 추가 투입해야 하는 개봉 대기작들은 개봉 시기를 잡기 더 어려워진다. 결국 돈을 회수하지 못하는 투자사가 재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서 내년 겨울쯤이면 극장에 걸 영화가 없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극장 관객들의 콘텐츠 소비가 오티티 등으로 분산되면서 특히 직격탄을 맞은 건 총제작비 100억원 안팎 규모의 중급 예산 영화들이다. 이달 5일 개봉한 <리바운드>가 대표적이다. 장항준 감독이 연출한 <리바운드>는 시각적 쾌감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씨지브이(CGV) 골든에그 지수를 만점 가까이 받는 등 관객 반응이 좋았음에도 개봉 3주차에 관객수 50만명 수준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투자배급사들 사이에서 “천만 영화보다 백만 영화 만들기가 더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예전 같으면 100만, 200만명이 들 수 있는 영화들도 절반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건 한국영화가 전체적으로 불신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안 좋은 징후로 읽힌다”고 우려했다. 심 대표는 “다양한 규모의 영화가 제작되어야 제2의 박찬욱, 봉준호가 탄생할 수 있는데 요즘처럼 이른바 ‘똘똘한 한편’에만 투자가 몰리면서 대작 편중이 심해지면 역량 있는 신인 발굴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화산업에 있던 돈과 인력이 오티티 등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가면서 명필름이나 제이케이필름 등 영화에 집중해오던 제작사들도 드라마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이태원 클라쓰>를 제작했던 쇼박스 관계자도 “그동안 부수적인 사업에 가까웠던 드라마 제작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하면서 영화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분산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의 가입자 정체로 인한 주가 하락과 디즈니플러스의 대규모 적자로 인한 구조조정, 토종 오티티인 티빙과 웨이브의 늘어나는 적자 규모 등으로 이미 드라마 제작에서도 치킨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다.
영화계에서는 스크린 독과점과 홀드백(극장 상영 뒤 다른 플랫폼에서 영화를 상영하기까지의 기간) 붕괴 등 코로나 전부터 영화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들이 오티티 간의 경쟁 등으로 심화했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영화판의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리얼라이즈픽쳐스의 원동연 대표는 “영화산업이 레버리지(지렛대)가 되지 않으면 넷플릭스 같은 일부 글로벌 오티티들이 협상의 절대 갑이 될 수밖에 없다”며 “존립 위기에 놓인 영화산업이 되살아나려면 잘못된 제도 정비와 제작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영진위는 지난 3월부터 투자배급사와 제작사, 감독 등 분야별로 업계 관계자들 간담회를 열면서 새달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협의체’ 구성을 준비 중이다. 박기용 영진위 위원장은 “한국영화가 처한 위기는 팬데믹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 팬데믹으로 가속화돼 총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며 “영화발전기금 고갈에 대한 해법 등을 비롯해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지 않으면 위기 극복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협의체 발족 뒤 도출한 핵심 이슈들에 대해 늦어도 6월 초에는 액션플랜(실행계획) 실행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영화 <유령>.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